그가 생각했던 페레스트로이카
그가 생각했던 페레스트로이카
  • 정용승
  • 승인 2015.03.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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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고르바초프 소련 집권 30주년

소련은 1991년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역사학자들은 소련이 붕괴한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소련의 적폐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련이 1960년대부터 소비재 부족, 원시적 생활조건, 노후한 공장, 제 기능을 상실한 농업, 중화학공업과 국방부문에 대한 불균형적인 집중투자, 제로에 가까운 경제성장 등을 겪어왔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방점을 찍은 것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였다. 어쩌면 그의 개혁이 소련 붕괴의 시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고르바초프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5년 3월 11일 체르넨코의 사망이 알려진 지 5시간 만에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취임이 발표됐다. 1931년 3월 2일 출생한 그는 ‘10월 혁명’을 겪지 않은 소련의 첫 번째 서기장이었다.

당시 54세로 젊은 세대에 속했던 그는 더 이상 지도부의 약화를 방치할 수 없었던 정치국 노인들의 합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면서 조심스럽게 개혁노선을 밝히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침체된 국가경제를 살리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획과 관리를 포함한 경제기구 전반에 걸쳐 철저한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다. 대내 개혁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은 취임 후 1985년 4월 개최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였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시도돼야 하지만,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통한 정치 분야의 민주화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 ‘공개’를 의미한다.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정책집행의 확실성과 함께 개혁세력을 창출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약 70년간 억압 속에 있었던 소련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개방에 적응하지 못했다. 정치적 민주화는 당의 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동안 무결점으로 여겨지던 당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졌다.

국내문제가 당초에 예상했던 대로 풀리지 않자 대외정책에 있어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실행계획이 필요했다. 신사고(新思考) 외교정책이다.

고르바초프는 이 정책을 통해 평화공존 노선을 제시했다. 그는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를 발표했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종결지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통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성공리에 추진하고자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개혁과 개방된 소련 사회는 지식인들의 비판을 가능하게 했고 소련은 이런 비판을 견딜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소련은 점차 붕괴돼갔다. 고르바초프도 같이 기력을 상실했고 그 사이로 옐친이 들어왔다.

지금 러시아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만약 고르바초프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정용승 기자 jeongy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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