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말과 소를 중국에 바치다
조선 초기에 말과 소를 중국에 바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3.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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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역사 파일] 아무도 모르는 조선 이야기ⓛ

조선은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개국하여 1910년 일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519년 간 지속된 나라다. 지구상에서 명멸했던 숱한 나라 중 500년 이상 하나의 왕조가 이어진 사례는 BC 8세기에 건국되어 서기 476년에 멸망한 로마제국(물론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명맥을 이어갔지만), 그리고 5세기경에 도시국가로 출범하여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한 해상왕국 베네치아 정도에 불과하다.

세계를 정복했던 영웅호걸들이 건국한 나라들도 수십 년, 혹은 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인류 역사의 보편적 상식이다. 

이 험난한 역사의 질풍노도 속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변변한 산업이나 군대도 없이 동북아의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용케 519년 간 왕조를 이어왔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이 개국한 14세기 말의 동북아 3국은 왕조가 교체되는 혁명기이자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강력한 지각 변동기였다. 

일본은 50여 년의 내란기였던 남북조시대가 막을 내리고 통일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 통치체제가 정상화되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이민족 정권인 원(北元)나라가 몰락하고 명(明) 왕조가 개막됐다. 한족(漢族)에 의한 중국 대륙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 역사적 격랑의 와중에 한반도에는 왜구 토벌의 선봉장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조선 개국의 주인공이 됐다.

우선 조선시대 지도부가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 즉 강대국 명나라를 천자국(天子國)으로 섬기고 이웃나라인 일본, 여진 등과는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국가운영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란 백과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큰 나라나 세력권에 붙어 그 존립을 유지하려는 주의’로 설명된다. 그러니까 이웃한 중국의 세력권에 붙어서 중국을 섬기면서 국가의 존립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대정책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 혹독한 대가가 요구되는 것이었다. 즉 한 나라의 절대 권한을 가진 존재를 중국에서는 황제(천자․天子)라 부르지만 조선에서는 중국의 책봉을 받아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했다. 

책봉이란 중국 황제가 주변국가 군주에게 작위를 주어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제도로서, 주변국가가 책봉체제에 편입되면 중국 황제와 군주 사이에는 군신(君臣)관계가 성립된다. 

중국 황제는 책봉된 주변국가가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를 보호해주는 책임을 지게 된다.

조선 입장에서는 사대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고려 말기인 1388년 요동 정벌을 위해 원정군을 지휘하던 이성계 장군이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린 것이 조선왕조 설립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즉 군사력이나 국력, 인구 면에서 절대 열세였던 고려가 중국과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현실파였던 이성계는 자신의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입장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와 그의 일파들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명라나 연호를 사용했으며, 중요한 국정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의견을 묻는 등 정치적 종속관계를 맺었다. 

말하자면 간과 쓸개를 빼주고 나라의 자존을 지켜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즉 ‘중국화의 길’을 택한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중국에 예속되느니 차라리 민족의 운명을 걸고 자주독립을 위해중국과 한판 붙어 사생결단을 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현실을 망각한 명분에 불과하다. 

중국과 인접한 나라 중에서 사대를 하지 않고 중국과 한판 붙어 민족의 독자성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이 예외적인 존재다. 과거 실크로드를 따라 엄청난 문명을 가진 나라들이 중국과 맞붙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힘, 문화의 힘은 블랙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 블랙홀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당한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한 것이 우리 조상들이었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저서 <조선왕조사>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중국화의 길’을 택한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부합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다고 말한다. 

즉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에 대륙은 이미 명나라에 평정된 상태였는데, 명나라는 동아시아의 패권자로서 고립주의를 내세워 주변국과 통상이나 외교관계를 가능하면 축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적극적으로 존명사대(尊命事大)를 내세움으로써 명나라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국가의 안보와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조선의 건국세력들이 사대를 하겠다고 나오자 과거 수천 년 간 이민족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당하고, 나라까지 내 준 경험이 있는 노련한 중국 지도부가 “어서오너라, 요 착한 녀석들” 하고 덥석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도록 철저한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이 사대를 하려면 중국에 맞서는 군사력을 기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군사력이란 전시(戰時)에는 국가를 지키는 핵심이지만 평시(平時)에는 거대한 소비 집단이다. 

군사력, 그 중에서도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가 예산이 필요하다. 이러한 예산은 국가의 주력산업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로 충당한다. 그렇다면 주력산업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도록 적절한 통제를 가하면 군사력을 기를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사라진다. 

물적 토대를 약화시킴으로써 조선에서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 중국의 조선에 대한 기본 정책이었다.

▲ 조선은 중국에 사대를 하기 위해 말과 소를 수없이 가져다 바쳤다. 소와 말은 평시에는 생산력과 유통의 도구이지만 전쟁 때는 군사용으로 전환된다. 말과 소를 수없이 중국에 가져다 바치면서 조선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

당시 조선의 주력산업은 농업이었다. 농업에서의 핵심 동력원은 소이고, 생산된 농산품을 유통하기 위한 핵심 동력원은 말(馬)이었다. 

특히 말은 평시에는 유통의 근간이 되지만 전시가 되면 곧바로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말과 소를 축내면 조선의 농업 생산성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래서 조선 건국 초기 중국은 틈만 나면 조선에 말과 소를 갖다 바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조선은 주력산업인 농업에 있어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었고, 그 결과 적절한 수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힘든 나라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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