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의 퇴치 위해 거악(巨惡)과 손잡은 루즈벨트
악(惡)의 퇴치 위해 거악(巨惡)과 손잡은 루즈벨트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10 20: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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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루스벨트 미 대통령 사망 70주년(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의 친소(親蘇)정책으로 미국 수뇌부에 소련 간첩망 대대적으로 침투.
미국판 ‘햇볕정책’ 시행하여 소련에 퍼주기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무장해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독일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온 1945년 4월 12일, 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네 차례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였고, 재임 중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와 싸워 승리했다.

이 와중에 영국 중심의 세계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와 미국인들은 역대 사망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네 차례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하기도 한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으로 경제가 파탄 상태에 빠진 1932년, ‘뉴딜 정책’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로 치면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아 김대중 후보가 ‘준비된 대통령’,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당선된 사례와 비슷하다.

전임 대통령 허버트 후버 재임 시절까지만 해도 미국의 외교정책은 소련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임 대통령 루스벨트는 소련의 고립이 미국의 국익(國益)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 집권 초부터 소련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1933년 11월에는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 미국인들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중 그는 소련을 향해 미국판 ‘햇볕정책’을 시행하여 대대적인 무기 제공, 군수지원을 했다.

이 와중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마저 침공하자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미·영·소(美英蘇) 대동맹을 결성하여 공산 독재자 스탈린과 손잡았다.

그리고 소련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무기대여 및 군수지원 정책을 추진했다. 말하자면 루스벨트는 히틀러라는 악(惡)을 물리치기 위해 스탈린이라는 거악(巨惡)과 손잡은 것이다.

루스벨트가 1941년부터 1945년 9월까지 소련에 제공한 군수지원은 항공기 1만4834대, 전차 1만3000대, 트럭 42만7000대, 지프 5만 대, 철강 200만 톤, 상선 95척, 양곡 899만 톤 등 막대한 양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러한 군수 지원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까다로운 조건을 달지도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해상교통로가 마비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에 중고 구축함 50척을 긴급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영국에 구축함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뉴펀들랜드로부터 영국령 기아나에 이르는 8개의 영국 해외 식민지를 미국이 99년 간 해·공군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등 가혹한 조건을 내걸어 영국을 경악시킨 바 있다.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조치는 영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親蘇정책과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닮은꼴

루스벨트의 지나친 친소(親蘇)정책에 대해 숱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루스벨트는 일편단심으로 소련을 지원했다. 

그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햇볕정책과 대북 유화정책으로 한반도 평화 유지를 하겠다며 북한에 퍼주기를 한 것과 정확하게 닮은꼴이다. 

▲ 루스벨트가 친소련적인 정책을 통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밝혀낸 이주천 교수의 저서 <루즈벨트의 친소정책>

‘루스벨트의 친소정책’을 펴낸 이주천 원광대 교수는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흑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군수 지원을 제공한 덕에 결국 소련의 힘을 키워 전후(戰後) 냉전체제 성립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비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자 미국도 추축국(樞軸國)에 선전포고를 하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두 방면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자 만주 쪽에서 일본군 견제를 위해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갈망했다. 

문제는 소련이 만주 쪽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한국 점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미국의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해 미 국무부를 방문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지 한 달 후인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헐 국무장관의 보좌관 앨저 히스와 만났다.

이날 이승만은 앨저 히스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 재미 한인 교포들이 대일전(對日戰)을 위한 게릴라 활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야 일본 패망 후 소련의 한국 점령을 막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히스는 “미국의 전시(戰時) 동맹국 소련을 공격하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 문제는 일본 패망 후 결정할 문제”라면서 이승만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승만의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소련 간첩 앨저 히스, 미 국무부에서 승승장구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앨저 히스가 소련 간첩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존스홉킨스대학과 하버드 법과대학원 출신의 엘리트인 앨저 히스는 1935년 국무부 차관보의 특별보좌관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1944년 국무부 특수정치담당사무국 부국장으로서 전후(戰後) 세계질서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고, 1945년 초에는 특수정치담당사무국 국장으로 승진하여 얄타 회담에 참가하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이 되었다.

▲ 소련 간첩 앨저 히스는 루스벨트를 보좌하여 얄타회담에 참석,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폴란드 등 동유럽을 스탈린에게 넘겨줬다.

앨저 히스가 소련 간첩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 알린 인물은 휘태커 챔버스였다. 전향한 소련 간첩인 챔버스는 국무부 차관 아돌프 벌에게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암약하는 소련 간첩 24명의 명단을 제공했는데, 그 중에는 국무부 고위관료 앨저 히스와 그의 동생 도널드 히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돌프 벌은 즉각 이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루스벨트는 앨저 히스를 파면, 혹은 체포하기는커녕 얄타 회담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요직으로 승진 시켰다. 

루스벨트는 10여 년 전부터 미국 정보기관 등으로부터 앨저 히스가 소련의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를 싸고돌았다. 

덕분에 히스는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옆자리에 앉아 한반도의 신탁통치 및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을 스탈린에게 넘겨주는 결정을 하게 된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의 진원지가 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서방 동맹국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폴란드를 지켜내야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얄타에서 폴란드를 스탈린에게 제물로 넘겨줬다.

훗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앨저 히스가 루스벨트에게 “폴란드를 스탈린에게 넘겨주는 것이 전후(戰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 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도 앨저 히스를 국무부의 요직인 정책국장으로 임명했다. 

덕분에 히스는 유엔 창설을 논의한 덤바턴 오크스 회담을 주관했고, 유엔 헌장을 기초한 샌프란시스코 회의 때는 사무총장을 맡아 유엔 탄생을 주관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엔은 소련 간첩 앨저 히스가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는 1946년 ‘국제평화를 위한 카네기재단’ 총재를 역임하던 중 소련 간첩 혐의로 내사를 받자 국무부의 권고에 의해 행정부를 떠났다.

앨저 히스가 소련 간첩이라는 사실이 또 다시 제보된 것은 1947년이다. 1945년 이고르 쿠젱코라는 소련 외교관이 캐나다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극비문서를 빼돌린 후 캐나다로 망명했다. 

쿠젱코의 증언으로 캐나다에서 암약하던 22명의 소련 간첩이 체포됐다. 쿠젱코는 미국 정부 고위층에도 소련 간첩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진술하자 캐나다 정부는 이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캐나다로부터 심상치 않은 정보를 입수한 미국 정부는 공직자 국가충성심사위원회(Civil Service Loyalty Review Board)를 설치하고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이 와중에 앨저 히스가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1948년 8월 3일 휘태커 챔버스는 미 하원의 반(反)미국적 행위 조사위원회(House Committe on Un American Activities)에서 ‘국제평화를 위한 카네기재단’ 총재인 앨저 히스를 비롯한 몇몇 전직 국무부 관리들이 1930년대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미국 정부에 침투하여 활약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베노나 프로젝트가 밝혀낸 진실

 숱한 의혹과 논란 끝에 앨저 히스는 1948년 비밀 공산당원으로서 국무부 기밀문서를 소련에 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히스는 완강하게 무죄를 주장했으나 위원장인 리처드 닉슨 의원(후에 37대 미국 대통령)이 집요하게 히스를 물고 늘어져 그를 위증죄로 기소했다. 

그에게 적용된 위증이란 ‘조국을 배신하는 스파이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선서한 것’이 위증이란 혐의다. 

결국 히스는 ‘소련의 스파이라는 것을 부인한 진술’로 위증죄 처벌을 받았고, 간첩 혐의는 실정법상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받지 않았다.

히스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 뒤 감형되어 1951년 3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앨저 히스가 유죄 판결을 받은 1950년 1월 25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는 앨저 히스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애치슨이 앨저 히스를 싸고도는 기자회견을 하기 2주 전에 유명한 ‘애치슨 선언’을 했다. 이것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공산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남침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앨저 히스를 옹호하고 나선 지 2주일 후인 1950년 2월 9일,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 주(州) 휠에서 “국무부에 소련을 위해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 미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하여 간첩행위를 하고 있다고 폭로하는 매카시 의원. 1995년 미국 정부가 발표한 ‘베노나 프로젝트’에 의해 매카시 의원이 제기한 소련 간첩 명단이 상당 부분 사실임이 드러났다.

1954년 석방된 히스는 자기가 매카시즘의 희생자로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좌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히스는 진실을 끝까지 숨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41년 후인 1995년 7월 11일, 미국 정부는 그동안 극비에 부쳐졌던 냉전 시절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진행됐던 소련 암호 해독 문서를 공개했다.

베노나 프로젝트 덕분에 매카시 의원이 공산당, 혹은 소련 간첩으로 지목했던 인물들이 실제로 간첩활동을 한 행각이 드러났다.

얄타 회담에 참석한 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갔던 핵심 간첩이 ‘알레스’란 가명을 사용한 앨저 히스로 밝혀진 것이다. 

이밖에도 미국의 원폭 관련 설계도를 소련으로 빼돌린 줄리우스 로젠버그,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전쟁이 미국의 음모에 의해 북한을 먼저 침략한 것으로 기술한 ‘비사(秘史) 한국전쟁’의 저자 I. F 스톤 등이 모스크바의 첩자임이 밝혀졌다.

소련 정보기관인 KGB 공작관으로서 속칭 ‘케임브리지 5인방’ 간첩(영국 첩보기관인 MI5, MI6, 외무성의 고위직에서 활약한 소련 간첩 헤럴드 킴 필비, 도널드 맥클린, 가이 버제스, 앤서니 블런트, 존 케른크로스)을 지휘했던 유리 모딘은 자신의 저서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에서 베노나 프로젝트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매카시 의원의 주장은 옳았다

‘2차 대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호주의 오지 마을에 무선통신소를 설립하고 미국과 소련, 영국 사이를 오가는 모든 민간, 외교, 군사 통신을 도청했는데 암호문으로 된 내용을 해독할 수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1941년 6월 핀란드는 소련에게 빼앗겼던 페트사모 시(市)를 탈환하기 위해 소련군을 공격했는데, 페트사모 전투에서 승리한 핀란드 군이 수색 도중 소련군 암호병이 암호 책자를 불태우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핀란드는 불덩이 속에서 거의 타버린 책자 조각을 건져내는 데 성공하여 이를 극비리에 보관하고 있다가 1944년 미국에 제공했다. 

이 귀중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몇 년을 매달린 끝에 1948년에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소련은 이론상으로는 풀 수 없는 암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비밀의 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몇 조각의 해답을 핀란드 정부가 제공해 줬다. 미군은 비밀리에 특수부대를 설치하고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작전명 하에 소련 암호 해독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호주의 무선 통신소에서 도청한 암호 문서들을 해독하여 미국에서 영국을 통해 소련으로 1급 기밀이 새 나가는 루트가 당시 ‘케임브리지 5인방’ 중 미국에 파견되어 양국 간 정보 교류 책임을 맡았던 MI6(영국 정보기관)의 책임자 킴 필비, MI6 본부의 미국담당 과장 도널드 맥클린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군 특수부대는 또 매카시 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앨저 히스와 로젠버그 부부 등의 간첩활동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베노나 문서를 통해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암호명이 ‘진보주의자’라는 사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재무부 차관 해리 덱스터 화이트도 소련 간첩이었음이 드러났다. 화이트는 11명의 소련 간첩을 재무부 고위 관료로 채용했다. 

그는 동료 간첩인 프랭크 코우, 솔로몬 애들러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타이완에 제공되던 차관을 폐기하고 100억 달러의 차관을 소련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제공하라고 설득했다. 

FBI로부터 화이트가 소련 간첩이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화이트를 재무부 차관으로 계속 근무시키다가 IMF 총재에 임명했다.

중국 문제에 대해 트루먼을 보좌했던 프랭크 코우도 소련 간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자 공산 중국으로 탈출, 마오쩌둥(毛澤東)의 고위 정책입안자에 임명되었다. 그는 마오가 대약진운동 때 수백 만 명의 중국인을 살해하는 것을 옆에서 도왔다.

 

맥아더의 군사정보,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

▲ 미 행정부 고위층에 침투한 간첩들의 실상을 폭로한 앤 코울터의 저서 <반역>

1940~50년대 미국 정부 고위직에 침투하여 암약한 소련 간첩들 이야기를 폭로한 ‘반역’이란 책의 저자인 앤 코울터는 1940~50년대 미국 행정부 안에 수백 명의 소련 간첩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진을 치고 앉아서 원자폭탄, 군사, 레이더, 항공, 로켓 프로그램 등 모든 기술 정보를 닥치는 대로 훔쳐 소련으로 퍼 날랐다고 폭로했다.

앤 코울터는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미국이 소련의 암호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보다는, 이들을 무죄로 방면할 위험을 택했다고 말한다. 

소련의 암호 해독 사실을 공개하면 소련에 대한 지속적인 도청이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하여 ‘베노나 프로젝트’ 관련 내용을 극비에 부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매카시 의원의 주장은 ‘근거 없는 망언(妄言)’으로 매도되어 비난을 받았으나, 훗날 베노나 문서가 공개되면서 일정 부분이 사실로 밝혀져 매카시 의원은 사후(死後)에 명예를 회복했다.

미국의 고위층에서 암약하는 소련 간첩 명단을 미국 정부에 넘겨준 또 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벤틀리라는 ‘금발의 스파이 여왕’이었다. 

벤틀리는 소련 간첩으로 활동하다 1945년 FBI에 자수하면서 80여 명의 미국 내 소련 간첩 명단을 넘겨줬다. 

덕분에 벤틀리도 휘태커 챔버스나 매카시 못지않게 좌파 지식인과 언론으로부터 “신경질적인 노처녀의 공상”이라고 거센 공격을 받았다.

미국 내에 침투한 소련 간첩망은 6·25 전쟁 양상까지 바꿔놓았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자 중공군이 개입했다.

중공군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한반도에 투입하자 맥아더는 만주와 중국 본토로의 확전, 원자탄 사용 등으로 공산세력의 절멸을 주장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의 방지를 위해 제한전 원칙을 고수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 병력의 추가 도강과 보급선 차단을 위해 한‧중 국경 너머에 대한 폭격을 준비할 때마다 워싱턴 당국은 “어떤 경우든 국경선을 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한국전 당시 워싱턴에 파견되어 미·영 간의 정보교류 업무를 담당하던 킴 필비-도널드 맥클린 루트를 통해 미국은 중공군이 참전해도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고, 중공 본토로 확전하지 않는다는 핵심 전략정보가 통째로 소련, 중공으로 넘어갔다. 

중공군은 미국 수뇌부에 침투해 있는 소련 간첩망을 통해 이런 결정들을 훤히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으로의 확전을 통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64년 4월 6일 맥아더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10년 전 맥아더와 비밀 인터뷰를 했던 짐 루카스(Jim G. Lucas) 기자는 당시 맥아더와의 미공개 인터뷰 내용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짐 루카스 기자의 맥아더 인터뷰 내용은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의 자서전 ‘임정에서 인도까지’ 384~388쪽에 실려 있다).

‘맥아더 장군은 그가 워싱턴에 보낸 메시지와 워싱턴이 그에게 보낸 메시지는 모조리 국무성에 의해 영국에도 제시되었으며, 그러면 영국은 인도를 경유하거나 런던 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해 이런 메시지가 영국에 의하여 중공에 48시간 이내에 전해졌다. 

따라서 중공은 맥아더 장군이 취하라고 제의한 조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미리 알고 있었으며, 중공은 맥아더가 손발이 묶여 효과적으로 항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영국으로부터 확인받고서 한국전쟁에 참전키로 한 것이다.’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

이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보자. 1929년 10월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되어 세계 경제를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간 대공황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국제무역 의존도가 낮았던 소련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중공업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착실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미증유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는 공산주의 소련에서 새로운 사회가 창조되는 것을 보면서 소련식 계획경제가 자유시장의 병폐를 해결하고 인류가 나아갈 유토피아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 유럽의 최고 지성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소련의 첩보원들에게 포섭되어 소련 간첩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앨저 히스와 ‘케임브리지 5인방’이다.

이 와중에 등장한 루스벨트의 과격한 친소(親蘇) 정책으로 인해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긴장감이 풀리자 다수의 공산주의자, 소련 간첩들이 미국 정부를 비롯하여 군부의 핵심 전략부서에 파고들어 최고 기밀 정보를 소련으로 빼돌렸다. 급기야 미국의 세계전략도 일정 부분 소련 간첩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루스벨트의 사망일을 맞아 그의 친소(親蘇) 정책의 본질을 바라보고, 한반도의 분단과 6·25 전쟁, 휴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 곳곳에 침투했던 소련 간첩들의 입김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다 더 상세하게 밝혀내 다시는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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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2019-02-06 01:05:14
앨저히스 얼굴이 다른 사람 얼굴 인거 같아서요 구글 검색하면 이 사람 얼굴이 아니더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