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核시설 타격 카드 포기하지 말았어야”
“영변 核시설 타격 카드 포기하지 말았어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2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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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태효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역대 정권들마다 ‘핵 문제는 어떻게 되겠지’ ‘지원하고 교류하면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믿음, 북한 정권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비전문성이 문제였다

북한 핵무기의 소형화와 실전 배치가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핵(北核) 억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김태효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을 만났다. 김 원장은 2008년 2월부터 2012년 7월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대외전략기획관으로 재임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 안보 분야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그는 ‘북핵 불가’라는 이명박 정부의 원칙 있고 일관된 대북(對北) 정책과 한미동맹 등을 주도했다. 

특히 MB 정부가 우리 군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300㎞에서 800㎞로 연장키로 한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은 김 원장의 작품이다. 그에게 MB 정부 시절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노력과 비화(秘話)들을 들어보았다. 

-최근 핵 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해 실전배치 단계로 진입한 것 아니냐 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 개발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방식과 우라늄의 고농축 핵물질화 두 단계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플루토늄 농축 방식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후반, 북한과 핵 협상을 타결했던 시기에 이미 개발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공화당 정부가 선거를 의식해서 북한과 타협을 시도할 때 북한 핵능력의 기초가 닦인 것이죠. 이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에 필요한 정밀기계와 부품, 기술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 김태효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북한은 보유하고 있는 두 가지 핵물질로 가볍고 작은 핵폭탄을 만드는 고폭실험을 수백 차례 실시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와 중량의 핵탄두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 김정은이 동서해에서 항해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수십 차례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것을 단순히 미사일 실험으로만 간주했는데, 핵탄두 소형화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서 대외 긴장 조성용 카드라든가 미국에 대한 군사적 메시지라는 등 늘 정치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각론으로 들어가 북한이 어떤 형태의 무기를 어떤 목적에 쓰기 위해 실험하는 것인지 따져야 해요. 특히 미사일을 핵무기와 연관지어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정부를 비롯해 미국 등 우방국들은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북한 핵 보유를 막는 데 실패했습니다. 6자회담이나 미북(美北) 간의 제네바 핵 합의, 경수로 원전(原電) 제공 등은 완전 쇼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국제사회가 북한 핵 개발 저지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993년부터 22년 동안 이어진 북핵(北核) 대응 과정에서 우리 역대 정부와 미국, 일본이 일사분란하고도 일관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핵 위협을 당하는 당사자로서 참혹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역대 정권들마다 ‘핵 문제는 어떻게 되겠지’ ‘지원하고 교류하면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믿음, 북한 정권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비전문성이 문제였습니다. 

정책 당국자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정책을 폈어야 합니다. 미국도 부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우라늄 문제를 봉합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죠. 북한은 그 이후 제대로 된 사찰을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하려 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강력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있습니다. 이때가 북한 핵을 초기에 저지할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동의합니다. 미국 입장은 영변을 정말로 타격하자는 게 아니라, 일정 시한을 주고 핵시설을 해체하지 않으면 파괴하겠다고 북한에게 선택을 주는 카드였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처음 접하는 발상인 데다가 북한의 보복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합리적 카드를 놓친 겁니다. 

당시 온건파라고 여겼던 미국의 민주당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자 김일성은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워했어요. 한미동맹으로 한마음이 되었다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제네바 합의 후에 고농축 우라늄 시설이 발각됐을 때 우리와 미국의 행동 여부에 따라 북핵을 없앨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2005년의 9·19 합의과정에 고농축 우라늄 문제는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천 방안은 도출되지 못했습니다. 2007년 2·13 합의, 10·3 합의도 마찬가지였어요. 임기에 쫓기면서 졸속 처리하다보니 이런 결과에 도달한 거죠.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 핵 개발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현금 지원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핵 개발을 돕는 이적(利敵)행위를 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고 봅니다. 남북 정상(頂上)이 두 차례 만나 합의한 2000년 6·15,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에 북핵 포기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정상회담을 위해 몸이 달았던 당시 우리 정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핵문제를 피해간 것이죠. 저는 우리 국민들도 적지 않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교류협력이 남북관계 개선인 것처럼 착각하고 이를 지지한 것은 북한의 대남전술에 악용된 실수였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때도 2차, 3차 핵실험을 했고, 우라늄 농축을 하는 등 핵개발을 지속했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핵 개발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어떤 조치들을 취했습니까.
     
제가 청와대 근무할 때는 이전 정부 때와는 반대로 북한이 정상회담을 애걸하다시피 했어요. 정상회담을 하자고 하면서도 핵 개발은 계속하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북한이 언제까지 핵을 포기할 것인지 밝히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또 핵 능력의 진전 속도를 더디게 하도록, 퇴보하도록 만들고자 여러 종류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정상회담도 핵 개발 저지를 위한 카드였나요?

그렇습니다. 북한은 현금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원했지만, 우리는 이를 지렛대로 활용하여 실질적인 비핵화 프로세스를 요구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언제까지 어떤 단계의 핵 포기 행동을 공개검증 하에 할 것인지를 북한에 제시했고, 이와 병행하여 중간 중간에 데드라인을 만들어놓고 남과 북이 서로 원하는 것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북은 끝까지 이를 거절했습니다.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최종 답변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북핵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우리도 핵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할 때 우리도 핵 무장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까.

이명박 정부 시절 우리도 핵 무장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답답한 국민들을 달래는 속 시원한 슬로건일 수는 있지만, 냉철하게 보면 가능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됩니다. 

핵무장론은 한미동맹 관계를 악화시키고 우방국들의 지원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통일 한국이 핵을 가질 수도 있다는 욕구를 드러내면 과연 누가 한국의 통일을 지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의 핵우산을 활용하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철수했던 전술핵무기를 한국에 재배치하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술핵무기 재배치보다 더 효과적인 전략은 민첩하고 유연한 핵우산 체계를 가동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 공격 위협이 우려될 때 한반도 인근이나 일본 내 미군기지에서 항모와 전투기가 출동한다든지, 고고도 미사일 방어망 체계인 사드(THAAD)를 주한미군에 접목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으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참모 역할을 했던 김태효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물질을 이용해 수백 차례의 고폭 실험을 실시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와 중량의 핵탄두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제가 청와대 근무 시절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우리 미사일의 사거리를 800㎞로 늘렸고, 덕분에 대단히 정밀한 탄도미사일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수단들을 이용해 우리가 전술핵을 한국에 배치하지 않고도 충분한 억지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나토 회원국들처럼 핵무기를 배치한 나라가 유사시 미국과 공동으로 사용권을 갖는 제도(nuclear sharing)를 도입하도록 미국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미동맹에서는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사용하는 공유(sharing) 개념보다는 확장억지(extended deterrence)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한국이 북핵 위협에 직면했을 때 미, 일, 호주까지를 포함한 각 동맹국의 자산을 신속하게 활용한다는 전략입니다. 

-사드나 MD 관련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핵 공격을 100% 방어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100발의 핵미사일 중 99개는 잘 막았는데, 나머지 한 발을 막지 못하면 우리 운명은 끝장난다는 것이죠.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 즉 북한 입장을 들여다보는 게 억지이론입니다. 만약 북한이 쏜 핵미사일이 우리 영토에 떨어지면 그것은 즉각 북한 정권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선제공격의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대응 능력과 의지가 충만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미사일을 100% 다 방어하지 못한다 해서 그 억지 방식이 실패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최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미 지도층이 북한의 멸망을 시사하는 구체적인 발언들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미국이 핵 태세 검토보고서를 누차 수정하며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핵을 가지고자 하는 불량국가에 대해 미국은 선제 핵 사용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명백한 경고죠. 2012년 김정은 정권이 등장하면서 북한은 헌법에 핵 보유국을 명시했고, 핵·경제 병진노선을 발표했어요. 이것을 보고 미국은 유엔을 통한 대북(對北) 제재를 풀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결론은 핵무장을 지속하는 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투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바마 정부가 보는 북한의 미래는 대한민국에 의한 평화적 흡수통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정치가도 솔직하게 말하는 않는 부분을 오바마 행정부가 말해준 것입니다.

-정치권 일각에서 천안함 관련 북한의 사과도 없이 5·24 조치를 해제하라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고, 광복 70주년 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하자는 이야기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5·24 조치가 내포하는 의미는 천안함 폭침에 대한 징벌뿐만 아니라, 그전에 관행처럼 통용되어 왔던 남북교류의 부작용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5·24 조치를 풀면 과거 남북교류의 파행들이 반복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북한이 원하는 남북정상회담의 조건은 하나는 연방제 통일이고, 또 하나는 현금 지원이었습니다. 

북한은 평상시에도 이명박 정부에 6·15 선언과 10·4 선언을 확고히 지키라고 수없이 얘기했습니다. 6·15는 북한식 연방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10·4는 조건 없이 북한 인프라를 건설해 달라는 뜻입니다. 

북한은 MB정부에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현금과 쌀, 비료, 그리고 1억 달러 규모의 아스팔트 피치, 은행투자자금 100억 달러를 조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이 우리에게 뭘 해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은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가 그토록 심각하게 요구했던 비핵화 문제는 “논의해볼 수는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기에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1차 핵실험을 한 후 2009년 2차 핵실험과 2013년 3차 핵실험을 한 시기 중간에 공기 중에 핵실험 징후를 의심케 하는 물질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핵실험의 결과라고 봐야 하는지에 대해 미국과 비공개 논의를 가졌습니다. 검토해볼 만한 수준의 물질들이 포착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핵실험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양이 너무 적었어요.

당시 북한은 수소폭탄 개발을 의미하는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북한의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北核 개발 略史

북핵의 위협과 이에 따른 지루한 협상 과정은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자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영변 원자로를 폭격하는 직전 상황까지 갔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반대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인해 이 계획은 중단됐다. 

이후 1994년 10월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고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준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가 이뤄진다. 

하지만 2002년 10월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하고, 2003년 1월 북한이 NPT 탈퇴를 다시 선언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된다. 

이후 같은 해 8월부터 6자회담 체제가 가동됐다. 6자회담을 통해 2005년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9·19 공동성명’이 나온다. 

그리고 6자회담은 2007년 핵시설 폐기 및 불능화에 대한 이행 계획인 ‘2·13 합의’와 ‘10·3 합의’를 도출했다. 

이후 미국은 2008년 4월 부시 대통령 재임 마지막 시기에 미북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과 핵 확산 의혹 등을 북한이 스스로 인정하는 선에서 봉합하고 플루토늄 물질에 대한 신고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 이 기사는 '미래한국TV'를 통해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해당 영상 링크 : https://youtu.be/dTSklWZTM80

정리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사진·영상 김학성 미래한국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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