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독재자 무솔리니 처형당하다(1945년 4월 26일)
희대의 독재자 무솔리니 처형당하다(1945년 4월 26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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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4월 26일은 파시스트의 대명사 베니토 무솔리니가 처형된 날이다. 1883년생인 그가 1945년 4월 26일 처형되었으니 62년을 살다 간 셈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파시즘이라는 정치사회학적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 무솔리니다. 

한 시절 그는 사자후 같은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고 최고 권력을 쟁취하여 이탈리아 역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최고의 인물이자 전 세계 파시스트의 우상으로 숭배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격변과 파란의 연속이었다.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무솔리니는 반항적이고 난폭한 성격이었다. 그는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 교사로 활동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그만두었다. 

교사를 그만두고 스위스에서 잡일을 하며 전전하던 그는 칸트, 스피노자, 니체, 헤겔, 크로포트킨 등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혁명가의 꿈을 키워갔다.

저널리스트 겸 대중연설가로 명성을 얻게 된 무솔리니는 노조의 파업을 주동하고, 노동자들이 요구사항을 얻어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선동하여 명성을 얻었다. 

▲ 파시스트의 대명사 베니토 무솔리니

1904년 이탈리아로 귀국한 무솔리니는 베네치아 알프스 지역에서 교사 생활로 돌아갔으나 염증을 느껴 또 다시 노조 운동, 급진주의 정치노선을 걷는 선동가로 복귀하여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1909년 석방된 무솔리니는 청년 사회주의자로서 다수의 사회주의 계통 신문의 논객으로 활동했다. 그는 ‘계급투쟁(La Lotta di Classe)’이라는 언론을 창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12년 사회당 기관지 ‘전진!(Avanti!)’의 편집장에 오른다. 

무솔리니가 편집장으로 취임하면서 ‘전진!’은 반(反)제국주의 논조를 유지하며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며칠 전까지 반전(反戰)을 주장하던 무솔리니가 갑자기 전쟁광처럼 날뛰자 사회당은 그의 당적을 박탈했고, ‘전진!’의 편집장 직에서도 쫓겨났다.

무솔리니는 다시 자신의 언론을 만들었다. 이름은 ‘이탈리아 인민(Il Popolo d'Italia)’. 그는 이 언론을 통해 파시즘을 목청껏 외치다 전장에 뛰어들었다. 

저격대에서 활동하던 중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무솔리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에 나섰다. 무솔리니는 대중집회가 열릴 때마다 검은 셔츠를 입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호위를 받았다. 

오랜 동안 대중연설로 단련된 선동가였던 그의 연설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해 군중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무솔리니 같은 선동정치가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국가와 기존 정치 지도자들에 환멸을 느끼고 구세주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1922년 사회당 총파업이 개시되자 무솔리니는 천재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나폴리에서 격동적인 연설을 하여 군중들을 흥분시켜 파시스트 행동대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무솔리니와 그의 지지자들은 흔들리는 정부를 협박하고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내각은 총 사퇴했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총리에 오른다.

끝없는 파업과 소요에 진저리 치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독재적이고 권위적이며 현란한 선동을 앞세운 무솔리니의 선동정치에 열광했다. 그들은 무솔리니를 통해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무솔리니가 열광했던 파시즘은 이른바 국가지상주의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이용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재를 합리화하는 반(反)공산주의적, 반(反)사회주의적, 국수주의적인 대중 독재를 추구했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영웅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단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제하기도 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대외 영토 확장으로 눈을 돌렸다. 1934년 12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접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 삼아 이탈리아군은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군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에티오피아군을 공격하여 1936년 5월 5일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후에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오르는 후안 페론이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 현장에서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적나라한 선동정치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아르헨티나에 적용하여 권좌에 오른 후 포퓰리즘 정치로 아르헨티나를 수렁에 몰아넣었다.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강철동맹을 체결하면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초기에는 관망하던 무솔리니는 독일 전차군단이 전격전(電擊戰)으로 프랑스 서부전선을 무너뜨리자 1940년 6월 10일 연합국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의 참전은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에는 대재앙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알바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참혹하게 패전을 거듭하여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구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엉망진창의 전쟁 전략으로 힘 한 번 못쓰고 곳곳에서 패퇴하여 망신살만 뻗쳤고, 아프리카, 유럽 전선에서 박살이 나면서 완전 호구로 전락했다.

무솔리니의 역할은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함으로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최고 의결 기구인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7월 25일, 무솔리니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다.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외무장관인 치아노 백작도 무솔리니에 대한 쿠데타에 가담했다. 그날 저녁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 직에서 해임했다. 실각한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아펜니노 산맥의 한 산장에 구금되었다.

이탈리아가 추축국(樞軸國)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한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뮌헨으로 탈출시켰다.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 지역의 점령과 통치를 용인하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여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북부에 독일의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을 수립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구축한 독일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1945년 4월 연합군이 북이탈리아로 진격하자 무솔리니는 독일군 사병으로 변장,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트럭 행렬에 몸을 숨겼다. 

4월 26일 밀라노 근처의 동고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빨치산 부대와 조우했다. 독일군복으로 신분을 위장한 무솔리니는 그가 신고 있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정체가 탄로나 빨치산들에게 체포됐다.

4월 28일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됐는데, 무솔리니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 가슴을 쏴라”였다. 

그들의 시신은 밀라노의 거리에 던져졌다. 한 부인은 “죽은 다섯 아들의 복수를 위해” 무솔리니의 시체에 권총을 다섯 발 쏘았다. 

그들의 시신은 시민들에게 능욕을 당한 후 밀라노의 주유소 앞 광장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으나 그가 지구상에 남긴 파시즘이란 망령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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