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기 침투는 2015 통일대전 최후의 전쟁연습
무인기 침투는 2015 통일대전 최후의 전쟁연습
  • 미래한국
  • 승인 2015.05.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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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김정은의 2015 통일대전

김정은 남침전략의 핵심은 서해안 기습 상륙, 문산·광덕산 루트 뚫고 수도권 포위 공격으로 한미 연합군 섬멸. 남침 사흘 내 상주 점령, 5일 내 부산 점령, 7일내 안정화 작전 종결

▲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김정은은 지난 2013년에 ‘3년 내 무력 통일’을 공언한 데 이어, 2014년 초에는 “2015년 통일대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안보 당국은 북한의 전면전 능력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했다. 재평가 결과 지난해 백령도와 파주, 삼척에서 추락하여 잇따라 발견된 북한 무인기 침투는 김정은이 ‘2015 통일대전’의 최종 전쟁연습 차원에서 도발한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무인기가 정찰한 3개 지역은 김정은이 추진하는 통일대전의 새 남침 작전계획의 핵심 침공(侵攻) 루트로 추정하고 있다.

재평가 보고서는 ‘북한이 아직도 재래식 무기를 활용한 남침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통일대전이라는 전략을 통해 결정적 시기에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결정적 시기란 전시작전권 전환,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등 중일(中日) 간의 영토분쟁, 미중(美中) 간의 군사적 충돌을 말한다.

보고서는 이어 ‘북한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활용한 전쟁과 함께 재래식 기습전을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무인기의 침투 경로는 김정은이 획책하고 있는 통일대전의 윤곽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무인기의 정찰 코스가 북한의 남침계획 루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한국의 주요 시설을 살펴보기 위한 비행이 아니었다. 북한이 무인기로 우리 영토를 정찰했다는 것은 전면전 준비를 완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무인기 잔해는 지난해 3월 24일 경기도 파주에서 발견된 이후 백령도(3월 31일, 9월15일)와 삼척(4월 6일) 등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파주 무인기의 경우 개성에서 5㎞ 떨어진 곳에서 발진, 파주시와 고양시를 거쳐 서울시청 인근까지 날아와 정찰한 뒤 돌아가다 파주시청 근처에 추락했다.

백령도 무인기는 해주 남동쪽 27㎞ 지점인 초암동에서 출발, 곧바로 서쪽으로 비행하여 서해 5도 지역인 소청도와 대청도 상공을 지그재그로 비행하며 18~20초 간격으로 군사기지를 집중 촬영한 후 추락했다.

삼척 무인기의 경우 북한의 강원도 평강에서 동쪽으로 17㎞ 떨어진 탑거리를 출발, 화천과 춘천을 거쳐 복귀하려다 방향제어장치 등이 고장 나 남동쪽으로 150㎞를 더 비행한 후 연료 부족으로 추락했다. 


무인기 침투도발로 드러난 김정은의 핵전쟁 전략

김정은의 2015 통일대전은 전면전 개전(開戰) 3~5일 내 부산을 점령하고 7일내 안정화작전을 종료해 한반도 완전 장악을 목표로 한다. 강력한 속도전으로 침공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전략이다.

먼저 서해안 상륙과 함께 문산과 광덕산 축선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다는 계획이다. 삼척 무인기의 당초 비행 경로였던 광덕산 지역은 우리 3군과 1군의 전투지경선(방어구역)이자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지역이다.

북한군 입장에서 볼 때 광덕산 축선은 한미(韓美)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전쟁전략의 핵심은 광덕산 공략 후 가평을 점령하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통해 남한의 종심(핵심 방어체제)을 신속히 돌파하여 경북 상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다.

특히  6·25 전쟁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한의 도로망이 확충되어 있어 실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전면 남침에 앞서 경보병 부대를 후방에 침투시켜 주요 시설을 장악하여 우리 군의 대응을 무력화하고, 미군의 증원을 핵미사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 전략의 요체다.

북한은 삼척 무인기가 정찰한 광덕산 축선 공격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전략적 의미에 주목했다. 북한군이 한강 이남에서 한미 연합군을 포위 공격하기 위한 루트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 축선은 우리 3군과 1군 작전구역의 경계지역으로서, 상대적으로 돌파하기 쉽다.

또 이 루트를 돌파한 남침 병력은 문산 축선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서해안을 통해 상륙한 특수부대를 동쪽에서 지원하기에 비교적 용이하다.

북한 무인기 3대의 정찰 경로는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침공 루트와도 거의 일치한다. 북한은 6·25전쟁 때 서울 북방, 춘천, 동해안 등을 통해 남침했다.

1군단이 서울을 집중 공격하고, 춘천을 돌파한 2군단 주력은 대전과 대구로 진격하고자 했다.

초전에 격파된 한국군을 소백산맥 이북에서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또 동해안을 돌파한 인민군은 바로 부산으로 진격해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웠다. 


북한 군부, 최후결전의 戰史로 중공군의 1951년 4월 공세 연구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 2사단은 춘천을 조기 점령해 경춘(京春)국도를 통해 서울 동쪽으로 이동, 서울에 주둔한 한국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2사단을 춘천에서 격파해 북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줬다.

반면 중공군은 4월 공세(1951. 4. 22~4.30.) 때 광덕산 산악 접근로를 통해 가평을 점령하고 경춘가도를 통해 서울 측방까지 성공적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중공군과 한미 연합군이 캔사스 라인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현재 휴전선 대치 상황과 유사하다.

▲ 한국전쟁 중공군 4월 공세 개황도

특히 중공군의 4월 공세는 현재 휴전선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이 재침공할 경우의 작전 환경과 매우 유사하다.

6·25 당시 중공군은 1951년 1~2월 공세에서 한미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조기 점령하기 위한 공격로로 동부전선을 선정했다.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미 1·9군단 지역 보다는 험준한 지형을 방어하던 한국군 2·3군단 방어지역을 집중적으로 돌파하는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중공군은 4월 공세에서 한반도 조기 석권을 위해 서부전선과 중부전선, 즉 미 1군단과 9군단의 전투지경선 부근, 한국군 6사단 방어지역인 광덕산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켜 공격했다.

수도권의 한미 연합전력을 포위 소멸하고, 전선 돌파를 확대하여 부산 조기점령을 시도한 것이다.

4월 22일 한국군 6사단을 공격 개시 1~2시간 내에 돌파, 광덕산 줄기를 따라 공격하여 4월 26일 가평을 탈취하고, 경춘 국도를 따라 서울 측방으로 공격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미 2사단이 양수리 북방에서 전면 방어로 차단했다. 또 중공군은 50㎞ 산악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작전 9일 경과로 인한 보급 문제로 실패했다.

반면 현재 광덕산 지역의 사곡-가평 간 산간 소로(사곡리-근남면-잠곡리-광덕리-도대리-가평)와 사창리-가평 간 산간도로(사창리-삼일리-화악리-소법리-북면-가평)는 산간 소로에서 2차선 포장도로로 잘 닦여 기계화 부대의 기동이 가능한 지역으로 바뀌었다.

북한군은 6·25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양호한 도로망과 군 장비의 발전으로 속전속결이 더 용이하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2015 통일대전의 결정적인 지역으로 선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통일대전에서 가장 큰 장애는 미군 증원과 일본의 지원이다. 6·25 당시 북한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미국의 한국 지원에 2개월 이상 걸릴 것이며,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점이다.


韓美, 대북 남침전략 정보공조 실패

북한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강구한 대책이 핵미사일이다. 미군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 위협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침을 감행하더라도 미군이 북한의 핵무기를 우려해 전쟁에 적극 개입하진 않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최악의 경제난 속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전면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 한미 정보당국 간에는 북한 주민이 아사(餓死)하는 상황에서도 북한군이 전력구조 및 군 구조 개편 등을 진행하는 첩보 및 정보를 입수했다.

특히 한미 정보 당국은 북한의 쿠데타 가능성, 핵 및 ICBM 개발 동향과 한반도 전쟁 양상의 변화에 대한 공동연구를 추진한 바 있다.

※ 자료 : 안보정책네트웍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한미 정보 당국은 김대중, 클린턴 대통령에게 향후 10수년 내에 북한이 핵 및 ICBM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묵살되었다. 미국 측도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의 핵 및 ICBM 개발에 대비한 대북(對北) 강경책을 건의했으나, 김대중 정부의 새로운 대북노선의 영향으로 묵살되었다.

당시 미국은 김일성 시대의 전쟁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한국은 김정일 집권 후 변화하고 있는 전쟁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한미 간에는 미일(美日)의 증원·지원차단·전방 방어선 돌파, 서울 점령 방안, 속도전 양상, 부산 점령 전략 등과 관련하여 견해차가 존재했다.

현 시점에서의 1997 한미 공동연구안에 대한 한미 간의 견해차는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의 남침전쟁 시나리오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당시 미국 측이 제기했던 문제점들은 물론 현재까지도 1990년 초반부터 최근까지의 북한의 군사 변화 추이를 미국이 인식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육사 졸업(41기, 퇴역 소령)
국방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국군정보사령부 대북분석관
조성태(前국방장관)의원 보좌관
現국방부 창조국방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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