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反기업 정서의 불편한 진실
한국적 反기업 정서의 불편한 진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6.0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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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한국인의 反기업 정서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국내총생산(GDP)은 국민경제가 생산한 ‘부가가치(value added)의 총계’다. 부가가치 생산에 기여한 바에 따라 임금, 지대, 이자, 이윤 등의 형태로 요소소득을 분배받은 생산요소 소지자가 이를 지출하면서 국민경제는 순환한다.

기업은 생산요소를 투입해 각종 재화를 생산하는 생산의 주체이자 고용의 주체다. 그런데 반(反)기업 정서로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이 위축된다면, 이는 시장경제의 밑동을 뿌리 채 흔드는 자승자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반(反)기업 정서는 ‘반(反)대기업 정서’이며 그 기저에는 ‘반(反)기업인 정서’가 깔려 있다. 삼성과 현대 등 기업 자체에는 반정서가 없다.

도리어 ‘그동안 팔아준 것이 얼마인 데’라는 애정이 깔려 있다. 일반 대중에게 이들 기업은 심정적으로 국민이 주주인, 즉 사회적으로 통제받아야 할 ‘국민기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 기업은 주주의 사적(私的) 재산이다. 인지(認知) 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대기업은 문제되지 않지만 그 지배주주는 싫다는 것이다.

한국적 반(反)기업 정서의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지배주주의 탈법과 편법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반(反)기업 정서가 증폭된 것이다.


기업을 보는 두 시각 

기업을 보는 시각은 ‘재산권적 관점’(property concept)과 ‘사회기구적 관점’(social entity concept)으로 나뉜다. 기업을 시장 거래를 내부화한 ‘계약의 복합체’로 간주하면, 재산권적 기업관을 견지한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공급하고, 채권자는 부채(외부 자본)를 공급하며, 주주는 자본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위험을 부담하며 경영자 행동을 감시한다. 재산권적 기업관은 ‘주주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의 기반을 제공한다.

‘사회기구적 관점’은 기업을 개인과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제도로 인식한다. 사회기구적 관점에 따르면, 회사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경영자는 사회적 가치에 기초해 국가가 제시해준 방향을 충실히 쫓아야 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로 경영자가 통제받지 않는 재량을 너무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재량은 오히려 공적인 목적을 위해 ‘사회적’으로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인들은 대기업은 좋아하면서, 그 기업의 소유주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는 기묘한 정서를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일반 국민은 부지불식간에 기업을 ‘사회기구적 관점’에서 바라봐왔다. 기업은 공공선(公共善)을 위한 사회적 기구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대해 실망한 것이다.

이는 기업을 기업 환경과 유인에 반응하는 이익 추구형 속물이 아닌, 도덕 경영을 실천하는 인격체로 간주하려는 사회 성향과도 일치한다.

반기업 정서는 참여정부 시절 크게 고조되었다. 참여정부의 ‘재벌의 변칙과 반칙론’이 그것이다. 정상적인 실력으로 기업을 키운 것이 아니라는 예단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30대 재벌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30대 대기업 중 11개 기업집단이 해체되거나 합병되었고, 5개 기업집단은 생존했지만 30대 대기업 집단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면 소유·지배구조 측면에서 소유와 지배의 괴리, 구체적으로 말하면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경영 전권(全權)’을 휘둘러온 유사한 특성을 가진 기업집단이 ‘생존과 도산’의 엇갈린 길을 가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변칙과 반칙에 능한 재벌’이 살아남아 사세(社勢)를 신장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불십년(財不十年)은 시장의 구조조정이 진행된 결과다.

시장은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시장규율은 중립적으로 작용한다. 프레임에 의한 대기업에 대한 반(反)기업 정서는 2007년에 이미 폐기되었어야 했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이해 부족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기업가 정신’에 대한 이해부족도 반(反)기업 정서에 일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모든 것이 확실하다면 ‘기업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어디에서 어느 가격에 얼마만큼의 생산요소를 구입해 어떤 산출물을 만들어 이를 누구에게 얼마에 판매할지를 알 수 있다면”, 최선의 경제 행동은 기계적으로 계산될 뿐이다. 

현실의 상업 세계에서 상업실험(commercial experiment)은 도면계획(圖面計劃)이 아니다.

“어떤 재화를 얼마만큼 생산해서 어느 가격에 판매했다”고 가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재화를 생산하려면 실제로 대지를 확보해 공장을 짓고 생산을 해야 한다. 

이익을 내려면 비용 이상의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실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에게 판매는 소비자에 대한 힘겨운 설득을 의미한다. 

상업실험은 실천에 옮겨질 때 비로소 그 성공 여부가 사후(事後)적으로 밝혀진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그동안 쏟아 부었던 모든 비용은 매몰비용(sunk cost)으로 회수가 불가능하다.

상업실험 자체가 ‘투기적 모험행위’인 것이다. 투기적 모험행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기업가 자신도 모른다. 

잠재된 이윤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깨어 있는 경각심(alertness)이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이윤은 기업가 정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이윤의 사회 환원이 도덕 경영의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시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밀턴 프리드먼이 설파한 것처럼 생존해서 계속기업(going concern)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종업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주주에게 배당을 지급하며,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기업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다. 기업이 도산하는 것만큼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없다.

일부 정치세력은 지금도 ‘시장의 권력’ 운운하고 있으며 “권력은 이미 기업(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그들의 저급한 언행은 반(反)기업 정서를 부추길 뿐이다.

‘기업의 권력’은 무엇인가?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고 투자자가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그 기업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권력은 ‘경쟁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장 권력에는 임기가 없다.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바로 권좌를 내줘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상수(常數)일 수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안주하는 순간 1등 기업도 도태될 수 있다. “자다가 죽은 코닥, 졸다가 죽은 소니, 닌텐도, 노키아”란 말이 왜 나왔는지를 곱씹어야 한다.

반(反)기업 정서는 ‘시장경제라는 바퀴에 뿌려진 모래’일 뿐이다. 인습적 사고로서의 반(反)기업 정서를 걷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소프트 파워(soft pow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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