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전 20세기 최대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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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09.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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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전의 세계사적 의미’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

낙동강 방어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자유진영의 ‘맏형(Big Brother)’으로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의한 국제 질서 유지, 유엔은 권능을 되찾아 국제 평화의 파수꾼 역할 수행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종전(終戰) 이후 각자의 길을 가면서 갈라서게 됐다. 전시(戰時)에는 필요에 의해 힘을 합쳤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소련은 숨겨 놓은 전체주의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후 미국은 ‘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해 국제기구 설립을 추진했다. 이른바 항구적인 국제평화를 위해 유엔(UN)을 설립하고, 세계경제 질서를 위해 브레튼 우즈 체제(Breton Woods System)를 구상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의 전후(戰後) 국제질서를 위한 회의에는 참여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의 독자적인 행보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소련은 이런 독자적인 붉은 마수(魔手)를 맨 먼저 한반도에 뻗쳤다. 스탈린은 한반도의 주변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하자,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현대식 공격용 무기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스탈린의 예상대로 북한군은 국군과 이를 도우러 온 미군을 낙동강까지 밀어냈다. 유럽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공산주의 팽창정책이 한반도에서 먹혀 들어갔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실패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침 후 북한군은 승승장구하며 단숨에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낙동강 방어전은 6·25 전쟁의 최대 분수령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美蘇)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미·소 중 과연 누가 정치적·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될 것인가 하는 보다 거시적인 국제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전후 그들의 헤게모니를 위한 대척점이 됐다. 

이른바 낙동강 방어전은 미국과 소련이 국제질서의 주도권과 이데올로기의 자존심을 놓고 벌이는 일대 싸움판이었다. 결과의 향배에 따라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계속 구가할 수 있었고, 소련은 세계 공산화 팽창정책에 가일층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낙동강 방어전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는 중대사였다. 

▲ 낙동강 방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 경쟁을 하던 미·소가 정면으로 격돌했던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다. 국군과 미군은 대한민국을 넘어 자유 진영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낙동강 전투의 성패가 몰고 올 미국과 소련 대외정책의 파장 

낙동강 방어전은 스탈린의 롤백 전략(Rollback Strategy)이 곧 완성될 것처럼 보였다. 최초 1개월 작전이라는 남침공격 계획과는 다소 일정상 차질을 빚었지만, 북한군은 최종 목표인 부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전쟁 발발 1주일 만에 해·공군에 이어 지상군까지 동원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았지만, 미국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낙동강까지 떠밀려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암중모색하며 탐색전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이 ‘아시아 대륙의 귀걸이’로 알려진 한반도 남쪽자락의 한 귀퉁이인 낙동강에서 한판 승부를 남겨놓고 있었다. 이의 승패에 따라 향후 국제무대에서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소련의 영향력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유엔을 동원하여 소련과 중국의 사주와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군을 압박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아직 소련과 중국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유엔까지 동원한 미국이 낙동강에서 군사적으로 밀려 패배하고, 미국이 전후에 세운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고 했을 때, 미국에게 그런 결과는 참담, 그 자체였다.

국제사회에서, 좁게는 자유진영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물론이고, 미국이 전후 소련의 팽창정책에 맞서 추구해왔던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그리고 봉쇄정책이 모두 시험대에 오를 판이었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 방어전은 단순한 한미 연합군과 북한군과의 공방전(攻防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운명과 미국의 대소(對蘇) 봉쇄정책, 그리고 전후 미국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국제평화유지를 위해 설립한 유엔의 권능에 대한 훼손까지 몰고 갈 수 있었고,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소련 전체주의 공산침략에 그대로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것이 분명했다. 

이른바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지 못할, 힘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연쇄 도산을 가져올 ‘도미노 게임’이었다. 이는 인류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이자,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될 ‘3차 세계대전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저지해야 했다. 

낙동강 전황에 쏠린 국제사회의 눈과 귀 

한반도의 끄트머리 땅 낙동강의 전황에 세계가 주목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이 한국에서 첫 전투를 시작한 이래 매일 아침, 백악관에서 브래들리 합참의장이나 합참을 대표하는 고급 장교로부터 전황 브리핑을 받았다. 직접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한국의 상황, 그 중에서도 벼랑 끝까지 몰린 낙동강에서의 전황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미국의 안보, 나아가 세계 안보에 미치는 파장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였다. 그런 점에서 이는 대한민국만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자 세계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 

유엔에서도 한국의 상황에 귀를 쫑긋거리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북한이 남침했을 때,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그것은 유엔 헌장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라고 했듯이, 이는 유엔 헌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국제평화에 대한 파괴행위였다. 그래서 유엔은 유엔 회원국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여 돕도록 신속히 결의했고, 이들 군대를 통합 지휘할 유엔군 사령부도 긴급 설치했다.

유엔에 의해 창설된 유엔군 사령부(UNC)는 격주 단위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한국에서의 전황을 보고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국제사회가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세계 전쟁이자 ‘유엔의 전쟁’이었다. 

모스크바의 소련 수상 스탈린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스탈린은 스스로 북한 주재 소련대사와 소련 군사고문단장, 그리고 김일성으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필요한 전문을 보내 그때그때 전황에 맞는 ‘전쟁 훈수’ 두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미군이 기세등등하게 참전해 낙동강까지 밀려가며 혼쭐이 난 모습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스탈린은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 안보리 참석도 늦춰가며, 낙동강의 전투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북한에 대한 승리를 낙관하고 있는 듯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도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는 북한의 승전보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북한에 군사사절단을 보내 전황을 챙기며 나름 관심을 보였다. 전쟁 이전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미군이 참전하면 도와주겠다며 그들의 등을 토닥였던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대견스럽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들이 다년간에 걸쳐 어렵게 완성했던 중국대륙의 공산화를 불과 짧은 기간 내에 완성할 단계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아무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중국과 북한 관계에서 북한의 승리는 그들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은 북한이 승리하면, 미처 이루지 못한 공산혁명의 마지막 과업인 ‘대만 사냥’에 나설 참이었다. 

▲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모스크바역에서 도착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김일성은 이때 스탈린을 만나 남침전쟁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미군이 철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며 허가하지 않고, 대신 최신무기 공급을 시작했다.

戰後 소련의 팽창정책과 미국 봉쇄정책의 시험대 

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며 국제무대의 최강자로 등장한 미국은 압도적인 국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국제질서 개편에 나섰다. 이의 기조에는 미국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이 담겨 있었다. 

미국은 국제평화유지를 위해 유엔을 창설했고, 경제적 번영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설립했다. 워싱턴 교외의 덤버튼 오크스에서는 유엔 창설을 협의했고,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튼 우즈에서는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부흥개발은행의 설립을 논의했다. 다시는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혹한 전쟁이 없는 가운데, 인류에게 주어진 행복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고 나섰다. 소련은 20세기 두 차례에 걸쳐 침략을 받았다면서 전쟁 기간, 또는 전후 그들이 점령했던 국가에 친소(親蘇)국가 또는 위성국가를 설립하며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추구했다.

소련은 자유 민주 진영의 보루이자 그들의 해양 진출의 교두보가 될 그리스와 터키에까지 공산주의 마수를 펼쳤다.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주창하며, 그리스와 터키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그것만으로는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미국은, 경제적으로 ‘건강한 유럽’을 부르짖으며 마셜 플랜을 통해 전후 피폐해진 서유럽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도모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에 반발하여 동구판(東歐版) 마셜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몰로토프 플랜(Molotov Plan)’으로 맞서며 동유럽 공산국가의 결속에 나섰다.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정책은 일찍부터 시작됐다. 전후 얼마 되지 않아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 대부분을 공산화했다. 그리고 그들 국가를 소련의 강력한 통제 하에 뒀다. 유럽이 자유진영의 서유럽과 공산진영의 동유럽으로 나뉜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를 두고, 1946년 3월, 미국을 방문한 처칠 영국 수상이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유럽을 동서로 가로막은 것을 빗대어 ‘철의 장막’이라고 했을까? 스탈린의 철권(鐵拳)정치에 놓여 있는 동유럽을 지칭한 말이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해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대소(對蘇) 봉쇄정책이다. 소련의 공산 팽창정책에 단호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공산주의 붉은 물결이 자유진영으로 단 한 방울도 새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겠다는 개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봉쇄선이 필요했다. 소련 국경과 소련 위성국 내지는 공산주의 국가를 에워싼 미국의 봉쇄선이 설정됐다. 

소련은 미국의 대소 봉쇄선을 시험이라도 하듯 도발에 나섰다. 그것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됐다. 소련은 터키와 그리스에서 실패하자, 베를린을 봉쇄하며 미국과 서방국가들을 압박했다. 미국이 여기에 단호히 대처하자, 소련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이때 아시아 대륙에서 대이변이 발생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공산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쫓겨 갔다. 이는 소련이 아무런 노력 없이 그냥 전리품으로 얻은 불로소득이었다. 유럽에서 미국의 봉쇄정책에 밀리기만 했던 소련이 뜻하지 않게 중국에서 횡재(橫財)를 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아시아 대륙의 대소 봉쇄선의 전초기지인 38도선 이남의 대한민국에서 미군을 철수한다 싶더니 얼마 안 돼, 애치슨 국무 장관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됐다고 선언했다. 유럽에서 미국이 보인 외교적·군사적 행보와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대한민국을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조르던 김일성에게 선심을 썼다. 6·25는 그렇게 발발했다. 그리고 낙동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지켜봤다. 결과의 향배에 따라 미국의 봉쇄정책과 소련의 팽창정책이 직접 영향을 받게 될 중요한 시험대였다. 

닉동강 방어전 성공 : 유엔의 권능 강화와 對蘇 봉쇄정책의 공고화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화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손 하나 안대고 코’를 풀려고 했다. 이른바 불로소득(不勞所得)이다.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도, 미국과는 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회피하고, 북한을 앞세워 미국의 봉쇄정책을 무너뜨리며, 자유진영에서 미국의 위신과 신뢰를 깎아내린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런 점에서 초기 낙동강 방어전은 스탈린이 품었던 야망이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하지만 미국도 만만치 않았다. 원자폭탄을 제외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끌고나와 총력전 태세로 맞섰다. 일본을 굴복시켰던 항공모함과 B-29 전략폭격기까지 나섰다. 북한군의 병참선은 긴 호스처럼 낙동강까지 연결됐으나, 유엔 공군에 의해 곳곳에서 차단됐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 전차와 무기, 식량도 떨어졌다. 

이때쯤 소련이 나서야 했다. 최소한 공군을 지원했어야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낙동강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와 “자신은 한 대도 안 맞고 싸움에 이기겠다”는 ‘순진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속으로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탈린의 그런 우유부단함이 결국 낙동강에서 북한군을 말라죽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는 한미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됐다. 

그 결과, 낙동강 방어전을 극복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에 의한 국제 질서를 유지하게 됐고, 유엔은 그 권능을 되찾아 국제 평화의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됐다. 미국은 또 자유진영의 ‘맏형(Big Brother)’으로서, 그들의 미국적 이념에 기반을 둔 대소 봉쇄정책을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것이 낙동강 방어전의 승리로 얻은 결과였다. 이로써 미국과 자유진영은 냉전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세계사적 전리품’을 낙동강에서 공산주의로부터 획득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 방어전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했고, 유엔의 권능을 회복했으며, 미국의 대외정책과 팩스아메리카나를 구현시킨 ‘20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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