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승만은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오”①
“나, 이승만은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오”①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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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처절했던 낙동강 방어전 에피소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9월 초, 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風前燈火)’ 신세나 다름없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일대에서는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한미 연합군이 숱한 희생을 치러가며 공산 인민군을 상대로 장엄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창졸간에 기습 남침을 당한 대한민국은 미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려 7월 20일 대전을 상실했고, 이어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기고만장한 김일성은 충북 수안보 온천에 나타나 전선회의를 주재하면서 인민군 주요 지휘관들에게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광복절을 남조선 해방축제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인민군이 대구 코앞까지 밀고 내려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모두 떨치고 일어나 몽둥이, 죽창, 폭약물 등 닥치는 대로 무장하여 적을 무찌르자”고 격려했다.

임시수도인 대구 시내까지 적의 박격포탄이 날아오는 등 전황이 다급해지자 이 대통령은 7월 29일 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마미, 적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부탁해 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라고 도쿄로의 철수를 명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정황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증언록 <6·25와 이승만>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 손을 꼭 잡은 대통령이 “다시는 망명정부를 만들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국군)과 같이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 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창 밖 멀리 떼 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음이 가슴 저리게 들려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픈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걱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박힌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이제 결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 한 명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창틀을 움켜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 6·25전쟁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제30포병단의 포사격 보고를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전쟁 도중 전장을 누비며 장병들을 겨려한 이 대통령은 대구가 위급해지자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여기서 최후를 마치자”고 결사항전의 각오를 밝혔다.

“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맥아더) 

대전이 인민군에게 함락되면서 실종된 윌리엄 딘 미 24사단장(딘 소장은 후퇴 도중 대전 외곽에서 길을 잃고 36일을 산과 들을 헤매다가 8월 25일 전북 진안에서 주민들의 밀고로 인민군 포로가 되어 억류생활을 하다 1953년 9월 4일 포로교환 때 귀환)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월턴 워커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패튼 장군의 참모장, 24 전차군단장으로 베를린을 점령한 백전노장이었다.

워커 사령관은 취임 일성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다. 너희들이 파놓은 벙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는 비장한 사수(死守) 명령을 내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워커 장군의 지휘 아래 한미 연합군은 포항-영천-대구-마산으로 이어진 동서 80㎞, 남북 160㎞의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나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낙동강 전선은 ‘워커 라인’이라고 명명됐다. 

낙동강 방어전에 임한 아군은 국군 5개 사단, 미 8군 3개 사단 등 총 8개 사단이었다. 국군은 왜관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라인을, 미군은 왜관에서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 라인을 맡아 방어에 나섰다.

통상 사단 방어 정면은 아무리 길어야 15㎞인데, 8개 사단이 240㎞를 방어하자니 1개 사단이 통상 방어구역의 두 배인 30㎞를 담당해야 했다. 이중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부산이 하루 이틀 사이에 공산군 수중에 떨어져 대한민국이 패망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무렵 북한 인민군은 김천에 전선 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책이 전선 사령관을 맡았다. 북한군 총병력은 2개 군단(총 13개 사단)으로 미 8군 정면에 4개 사단으로 구성된 1군단, 국군 정면에 6개 사단으로 구성된 2군단, 그리고 예비로 3개 사단을 편성해 놓고 있었다. 

이때부터 유엔군 깃발 아래 뭉친 한미 연합군은 인민군의 총공세를 육탄으로 막아내는 처절한 전투를 벌이며 낙동강을 피로 물들였다.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에서는 백선엽 장군의 국군 1사단이 인민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장렬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2만4000여 명,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혈전이 55일간 계속됐다. 국군 1사단은 대구를 노리고 달려드는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L-19 경비행기를 타고 전선 상공을 누비면서 마이크를 잡고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당시의 통신시설은 오늘날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부대와 부대끼리 통신이 잘 되지 않아 서로 위치를 모른 채 부딪치기도 했다. 

워커 장군의 전속 조종사인 린치 대위는 워커의 공중지휘를 잘 보좌하는 기술이 있었다. 워커 사령관이 밑으로 내려가자고 하면 엔진을 끄고 땅에 닿을 정도로 지상에 가까이 비행하곤 했다. 엔진을 끄고 마이크를 사용하면 그만큼 지상에서 소리가 잘 들린다. 워커는 마이크를 잡고 “적은 저기 있다. 오른쪽을 공격하라” “왼쪽으로 우회하여 궁지에 빠진 우군 부대를 구하라” 라는 등의 현장 명령을 내렸다. 

워커는 소방부대를 끌고 다니면서 위급한 지역을 지원했다. 존 마이켈리스 대령(후에 4성 장군으로 진급하여 주한 미8군 사령관 역임)이 지휘하는 25사단 27연대가 소방부대였다. 다부동이 위험하면 워커는 즉각 마이켈리스 부대를 다부동에 투입하고, 진동고개가 위험하면 곧바로 27연대를 그쪽으로 끌고 갔다. 27연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급한 불을 꺼 한국전의 위대한 별이 되었다. 

8월 14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무초 대사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6·25 당시 미국이 해외, 혹은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구성하려던 계획이다. 이 제안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시 정황에 대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증언이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라고 단호히 말했다.’ 

데이비슨 라인의 존재 

이날 이 대통령이 권총을 뽑아들자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는 지난 6월 24일 ‘뉴스9’에서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일본 망명을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고 역사적 사실을 날조하는 오보를 내보내 목숨 걸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을 모욕했다. 

당시 미군은 낙동강 주저항선을 편성하면서 극비리에 ‘데이비슨 라인’이라 명명된 최종 방어라인을 더 준비하고 있었다. 울산 동북쪽 17㎞의 서동리(경상남북도 경계지점)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지나 밀양 북쪽의 유천과 서쪽 무안리 능선을 따라 마산 동북쪽 고지를 잇는 약 90㎞의 이 방어선은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슨 준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는 주저항선이 무너져 미8군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때 부산항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 공군은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 왜관 부근의 인민군 집결지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의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이처럼 강도 높은 폭격과 적절한 방어태세 유지로 인민군은 8월 한 달 동안 무려 7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8월 18일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 수도를 이전했다.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신성모 국방 장관에게 국방부와 내무부도 부산으로 철수하라고 했다.

신 장관은 국방부를 부산으로 이전했으나 조병옥 내무 장관은 워커 장군을 찾아가 “대구가 함락되면 아무리 유엔군이라도 부산을 고수하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구 철수를 반대한다”고 강력히 거부하고 대구 사수를 주장하며 유엔군에 배속돼 있던 경찰군을 지휘했다.   

미8군 사령부도 부산 이동 준비를 끝내고 있었는데 조병옥의 설득에 워커 장군도 마음을 돌려 “나도 사령관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작전 지휘를 하겠으니 귀하도 계속 경찰군 작전에 협조해 달라”면서 이동 계획을 취소했다.

조병옥 장관의 결단에 의한 내무부 대구 잔류는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두고두고 조병옥 장관의 대구 잔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무초 대사와 미군 장성들은 8월 초부터 이 대통령에게 부산으로 떠날 것을 권고했지만 이승만은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표면적 이유는 “내가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어진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미군의 전의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비서진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으려는 것은 미국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대로 있지, 부산으로 가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몰라. 죽으나 사나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버텨야 해.”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격전에 이어 9월 4일부터 영천을 둘러싼 대혈전이 벌어졌다. 영천은 낙동강 전투 최후 결전장으로서, 국군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인민군은 박성철(김일성의 직계 심복으로 후에 북한 제2부수상에 올랐으며, 1972년 김일성의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했던 인물)이 지휘하는 15사단이 영천에서 유재흥 장군의 부대와 혈투를 벌였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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