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③
‘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③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10.1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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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러일전쟁 주요 전투

쓰시마 해전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지역의 러시아 함대를 돕기 위해 발트 함대(제2태평양함대)를 극동 지역에 파견하기로 작정했을 때 로제스트벤스키 소장(후에 중장으로 승진)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종 무관 출신인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독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비테 백작은 그를 우둔한 지휘관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로제스트벤스키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러시아 발트함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기함이었던 전함 ‘크냐츠 수보로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는 대부분의 함정을 잃고 5045명이 전사하며 참패했다.

석탄을 원료로 하는 증기선 대함대를 수병과 무기, 탄약을 만재한 전시 편성 상태로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까지 3만여 ㎞를 항해하여 전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함대를 극동 지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함대 파견은 러시아의 파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런 발언을 하지 못했다. 

고급 군사지도자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새 함대가 모든 면에서 일본 함대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만큼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은 강행됐다. 

1904년 10월 14일 리바우항을 출항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함대는 함선 40여 척과 승무원 1만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출항 직전 크론쉬타트에서 열린 함대 환송식에서 장갑함 알렉산더 3세호의 함장 부흐보스토프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승리는 없을 것이다. 항해 중에 함대의 절반이 손실될까 그것이 두렵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우리를 격파할 것이다. 한 가지 장담하건대 우리는 모두 전사할 것이다. 그러나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잡동사니 함대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해 5월 27~28일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알렉산더 3세호는 격침당해 승조원 900명 전원이 전사(戰死)했다. 

로제스트벤스키의 제2태평양함대는 여러 종류의 함정들을 모아놓은 잡동사니 집단이었다. 즉 수보로프호, 알렉산더 3세호, 보로디노호, 오렐호, 오슬랴바호 등은 1만3500톤 급으로 12인치 주포 4문, 6인치 포 12문을 장착한 세계 최신예 함정으로서 18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나머지 배들은 속력이 느리고 무장도 빈약한 구형 함정들이었다. 너무 빠른 배와 너무 느린 배, 게다가 툭하면 엔진 고장을 일으키는 수송선 등 함선 40여 척이 함대를 이뤄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돌고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3만여 ㎞를 항해하여 국운을 건 해전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장교와 사병들도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데다 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 함대 소속원 가운데 1500명은 알레르기 증세를 보였고, 800명은 우울증, 700명은 정신불안 증상을 보였으며, 최소 20명은 극동에 도착하기 전에 자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병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군 출신으로, 현대식 군함은 ‘무쇠로 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눈에는 선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전선과 계기판과 파이프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이런 잡동사니 함대를 이끌고 220일 간에 걸쳐 3개 대양을 무사히 항해했다. 항해 도중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함대가 너무 약해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건강을 이유로 자신을 송환하고 새 지휘관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에게 날아온 답신은 “페테르부르크의 명령에 복종하여 일본 함대와 일전을 벌일 것”이었다. 

▲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궤멸된 러시아 발트 함대(제2태평양함대)의 3만 여 km에 달하는 이동 경로. 발트 함대는 최신예 함정 외에 속력이 느린 구형 함정과 수송선 등이 포함된 잡동사니 함대였다. (출처: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석화정, 지식산업사)

1905년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규슈 서쪽해역을 통과하던 러시아 함대의 병원선 오롤호의 등불이 연합함대에 포착되었다. 당시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네보가토프 함대의 합류로 인해 총수 50척, 배수량 합계 16만200톤의 막강 전력이었다.

일본은 전함이 미카사 이하 4척에 불과했으나 러시아 함대는 전함이 8척, 그 중 4척(수보로프·알렉산더 3세·보로디노·아료르호)은 미카사보다 신형이고, 함포도 12인치 거포를 다수 탑재하고 있었다. 

일본 전함 중 미카사·시키시마·아사히호는 1만5000톤이어서 러시아 주력 전함보다 약 1500톤 정도 더 우세했고, 순양함 수와 속사포 능력에서 일본 측이 우세를 보였다. 

천신만고 끝에 로제스트벤스키의 제2태평양함대는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 진입했다.  이날은 마침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 기념일이었다. 이날부터 5월 28일 이틀 간 벌어진 쓰시마 해전은 레판토 해전, 트라팔가 해전, 유틀란드 해전, 미드웨이 해전과 함께 인류 역사상 5대 해전의 하나로 꼽힌다. 

무슨 이유인지 로제스트벤스키는 항해 도중 자기 함대의 모든 함정의 굴뚝을 노란색으로 칠하도록 했다. 덕분에 일본 함대는 노란색 굴뚝을 표적으로 하여 사격했고, 손쉽게 피아 함정을 식별하는 덕을 보았다. 도고 함대는 전원이 신품 전투복으로 갈아입었고, 포탑 주변에 모래를 뿌렸다. 포 옆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경우 병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고는 미친 것일까?” 

연합함대와 러시아 함대는 1만m 거리를 두고 전진하다가 선두에 섰던 도고 제독은 적함 앞에서 이른바 ‘도고 턴(turn)’이라 명명된 대회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스 문자 알파(α) 형태의 항해였다. 적함의 사정거리 안에서 함수를 왼쪽으로 급히 꺾어 단종진(종대 대형)으로 항해하는 적 함대에게 옆구리를 드러내며 진로를 가로막아 세우는 진형을 취한 것이다. 

이때 러시아 기함 수보로프호의 장교들은 미카사호의 기묘한 항진을 보면서 “도고는 미친 것일까?” 하고 의문을 표했다. 도고의 움직임을 본 로제스트벤스키가 사격을 명령했다. 수보로프 함미의 12인치 거포가 최초의 포탄을 미키사를 향해 날렸다. 오후 2시 8분, 양측 함정의 거리는 7000m였다. 미카사호는 이날 하루 동안의 해전에서 우현측에 40발, 좌현측에 8발의 포탄을 얻어맞았다.

기함 미카사호가 빙 돌아 정면으로 뱃머리를 향했을 때 발트 함대의 함정들은 미카사호의 우현 쪽에 놓이게 되었다. 2시 10분, 일본 함대에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목표는 적의 기함 수보로프호. 이어 시키시마·후지·아사히·가스가·닛신도 미카사와 같은 방향으로 회전을 마치고 같은 방향에 서서 수보로프를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은 연합함대의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지휘부 제거 작전’이었다. 수백 발의 집중타를 얻어맞은 수보로프호는 화재가 발생하고 상부 구조물이 대부분 파괴된 채 전열에서 이탈했고, 파편을 머리에 맞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부상을 당해 의식을 잃었다. 17시 30분 구축함 브이누이호가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 및 참모들을 옮겨 태웠고, 지휘권은 네브가토프에게 이양됐다. 

▲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도고가 그 유명한 ‘대회전’을 한 이후 최초 30분간의 포격전으로 사령관이 탄 수보로프호를 파괴한 것이 해전의 대국을 결정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불과 24시간 만에 로제스트벤스키의 함대를 궤멸시켰다. 러시아는 단 한 차례의 해전에서 격침된 전함이 6척, 순양함 4척 등 16척, 자침 5척, 그리고 6척을 일본에 포획 당했다. 

순양함 올레크, 오로라, 젬추크호는 미국령 마닐라항에서 무장 해제되었다. 구축함 보드루이호, 수송선 코레아호, 스빌리호는 상해로 도주했다. 재앙을 피해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들어간 함정은 경순양함 알마즈호, 구축함 그로즈니와 브라비호 세 척 뿐이었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는 5045명(장교 209명 포함)이 전사했고 포로는 6100명이었다. 반면에 도고 제독은 구축함 3척 침몰, 7명의 장교와 108명의 사병이 전사하고 장교 40명, 사병 620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다. 

포로로 붙잡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쓰시마 해전의 패전 소식이 페테르부르크에 전해지자 혁명이 더 거세졌다. 농민들은 지주의 재산에 불을 질렀고,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니콜라이 2세는 포로가 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전지전능한 신(神)은 귀관에게 성공의 영광을 주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조국은 귀관의 탁월한 용기를 늘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짐은 귀관이 속히 회복되기를, 그리고 주의 은총 속에서 귀관과 휘하 장병들 모두가 위안 받게 되기를 바라노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회복 후 러시아로 돌아가 1906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어 지휘권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인정되어 무죄로 풀려났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일본에선 쓰시마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여 5월 27일을 해군 기념일로 제정했다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면서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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