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측에서 지워진 신의주 학생의거
남북 양측에서 지워진 신의주 학생의거
  • 미래한국
  • 승인 2015.11.2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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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란의 평양별곡]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올해 11월 23일은 신의주에서 학생들이 반소·반공(反蘇·反共) 의거를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는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진영을 탄압하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약탈과 강압정책을 쓰는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세력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가장 증오하고 철저하게 숙청했던 집단은 신의주 반공학생봉기 참가자들과 함흥 반공학생 참가자, 서북청년단 연고자들이었다. 북한에서는 수십 년 세월이 흘러서도 신의주 학생의거와 함흥 학생의거, 갑산 폭동, 서북청년단 연고자들을 철저하게 찾아내 정치범 감옥으로 끌어갔고, 그 가족을 집단관리소(완전통제구역)에 감금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것은 김일성 정권 수립에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와 함흥 반공학생의거, 갑산 폭동과 서북청년단이 그만큼 위력적인 존재였고, 이들의 반공의거가 성공했다면 오늘의 북한 세습독재정권은 애초에 수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정권 수립 이후에도 이 운동 연고자들을 땅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찾아내 처형했던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한국인들과 자유주의를 반대했던 한국인들은 각각 남과 북에서 서로의 목적 달성을 위해 시위를 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김일성은 반공운동을 진압하고 오늘의 사회주의 탈을 쓴 수령 독재국가 건설에 성공했고, 이승만은 제주 4·3사건 등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내세운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남노당과 그 추종세력의 반대투쟁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성공했다. 

소련군의 만행 

김일성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에 방해가 되었던 북한의 반공학생의거를 수십 년 세월 속에서 철저히 숙청하여 그 뿌리를 없애버려 오늘과 같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수령독재 사회주의 왕국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그들 세력은 세월이 흐른 후 장성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민주화 투쟁으로 자리매김하고, 기념비와 기념일이 만들어져 국민들을 혼동시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와, 함흥 반공학생의거, 서북청년단을 극우세력들의 난동쯤으로 폄훼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1945년 8·15 해방 당시 38선 이북지역을 강점한 소련군은 꼭두각시인 김일성을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내세우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곳곳에서 강간·약탈 등을 일삼았다.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들어온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테러 행위와 민족진영에 대한 와해 작업을 자행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북한에서 공산체제를 세우기 위한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을 비롯한 그 추종세력들과 공산당 및 소련군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고, 강하게 반발했으며, 도처에서 반소·반공 운동이 연이어 일어나고 각종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 신의주 학생의거의 주요인물(左)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右). 학생의거에서 피살당한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4학년 생 박태근 학생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이다.

특히 신의주에서 발생한 반공학생의거는 그 시기 가장 큰 규모의 학생의거로 알려져 있고, 북한 정권이 세대를 이어가며 연고자들을 축출하여 탄압하는 전설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5년 11월 18일 신의주에서 서쪽으로 20㎞ 지점에 있는 용암포에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주도하에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 축하 연설을 위해 연단에 올라선 학생대표가 공산당의 여러 가지 비행(非行)과 소련군정의 압제와 소련군의 행패를 폭로·규탄하고 공산당이 정치훈련소로 사용하고 있는 수산학교(水産學校)를 반환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대회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기세를 올리면서, 환영대회는 삽시간에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하게 되었다. 

당황한 소련군과 공산당은 경금속 공장 직공들을 동원해 이들을 기습했는데, 평안교회 장로 홍 씨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학생들과 시민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신의주 학생들에게 알려졌고,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 학생들은 그곳 공산당 당국과 소련군 현지 사령관에게 사건의 사후 처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반소·반공을 위한 일대시위(一大示威) 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고, 신의주시의 6개 중학교 학생들과 부근의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24명 사망, 350여 명 부상, 1000명 체포 

11월 23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신의주의 모든 중등학교 학생 3500여 명은 “공산당은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하여 약탈·강권발동·불법·기만 등 갖은 학정(虐政)을 자행하고 있고, 보안대는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있다.

또한 공산당은 적색제국주의의 침투를 위하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궐기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했다. 

공산당과 소련군은 기관총·따발총·권총 등으로 학생들에게 발포하고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기총소사를 자행했다. 그 결과 피살자 24명, 부상자 35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1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체포 구속됐다. 이들 중 200여 명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때 체포 구금된 사람들은 애국지사와 민족진영의 간부, 종교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신의주 학생봉기를 교사했다는 죄목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북한은 1990년대에 텔레비전 연속극 ‘첫기슭에서’를 만들어 방영했는데 신의주 학생의거를 기독교와 부르주아 세력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하면서 송 장로와 그의 딸 송애희라는 전도사를 내세워 기독교를 폄훼했다.

그러나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북한 주민의 반공의식을 대변한 것이며, 1919년의 3·1운동, 1926년의 6·10 만세사건,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한국 청년들의 민족적 의기(義氣)와 애국심의 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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