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발언으로 공산 침략 자초
모호한 발언으로 공산 침략 자초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1.12 01:05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속의 오늘]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12일)

1950년 무렵, 미국 국익 면에서 볼 때 한국은 원조를 해야 할 가치가 없는 지역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연설을 했다.

이날 애치슨 장관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이어 애치슨은 “타이완과 한국은 모두 미국의 방어권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 방위권 밖의 일에 대해서 미국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정책상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래스카-알류산 열도-일본 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하는 선으로, 한국과 자유중국을 제외한 것이었다. 이 선언이 발표된 지 5개월 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 의회는 애치슨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비평가들은 애치슨의 이 모호한 연설이 스탈린과 김일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더라도 미국이 이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애치슨 발언의 본심은? 

 그러나 애치슨은 자신의 회고록 <창조에의 참여(Present at the Creation)〉에서 ‘애치슨 라인’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다음은 애치슨의 회고록 가운데 ‘애치슨 라인’ 관련 내용이다. 

‘내가 말한 방위선이라는 것은 맥아더가 말한 선을 따른 것으로, 이 중에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이르는 부분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이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를 따라 일본, 류큐 제도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류큐 제도를 중요한 방위 거점으로 생각한다. 이 방위선은 류큐 제도에서 필리핀까지 이어진다.” 

나는 맥아더 장군의 권위를 뒤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정책을 만든 책임을 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 방어선 밖에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서 언급했다. 

“태평양의 다른 지역에서의 군사안보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지역의 안보에 대해 보장을 할 수는 없다. 만일 어떤 지역에서 군사적인 공격이 발발할 때 그 최초의 책임은 그 국민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유엔헌장에 의거해 전 문명 세계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애치슨의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가 허동현 교수(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다. 그는 “애치슨이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했다는 주장은 7700단어에 이르는 긴 연설문의 몇몇 문구만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부각시킨 결과이다. 애치슨은 한국을 포기한다는 말을 결코 한 적이 없다”면서 애치슨 선언의 핵심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대만이 군사적으로 침략을 당하면 우선 공격당한 국민이 이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결코 갈대처럼 약하지 않은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문명 세계가 개입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조 포기나 중단은 가장 철저한 패배주의이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가장 넋 나간 짓이다.”(허동현, ‘좌우파가 서로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 애치슨 라인’ <중앙일보>, 2010년 1월 11일) 

김영명은 애치슨의 연설은 한국에 대한 방위를 명백하게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지적한다. 남한 당국은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 포함시키지 않은 연설 때문에 동요했고, 북한 수뇌부는 같은 이유로 고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치슨 선언을 아무리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그 핵심은 미국 방위선 밖의 지역에 있는 대한민국의 방위는 일차적으로 한국민의 책임이고, 다음에는 유엔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이 무렵 미국의 언론에는 큼지막한 검은 색 헤드라인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트루먼, 공산당에게 공격해오라고 초대하다!’ 

미국 국익 상 한국은 원조할 가치가 없는 나라 

사실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애치슨이 처음은 아니다. 1948년 3월 5일 미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국무성 정책계획실장 조지 캐넌과 도쿄에서 면담할 때도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데 합의했다. 맥아더는 1949년 3월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방위선에 대해 애치슨과 똑같은 발언을 하여 이 내용이 <뉴욕타임스> 3월 2일자 1면에 특종 보도됐다. 

▲ 애치슨 미 국부장관이 밝힌 애치슨 라인.

사례에서 보듯 당시 미국의 고위 정책결정권자들이 한국을 홀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병력 1200만 명, 242개의 항공단과 100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미 의회는 1947년 7월까지 병력을 107만 명으로 감축할 것을 의결했다. 미국이 이처럼 급격하게 군비를 감축한 이유는 핵무기로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군비 축소로 인해 급격히 줄어든 병력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가 당시 미 국방부와 국무부 등 군 수뇌부의 고민이었다. 10분의 1로 줄어든 병력을 미국의 이익이 가장 첨예하게 걸려 있는 지역에 투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를 위해 미 군부는 공동전략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 안보의 견지에서 세계 여러 나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측정했다. 

이 위원회가 1947년 4월 27일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16개 나라와 지역 중에서 중요도가 15등이었다. 동시에 원조의 시급성 등급에서는 5등, 두 가지 조건을 결합해서 매긴 등급이 13등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원조를 해야 할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해방군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남침전쟁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4월 10일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은 스탈린과 회담하여 남침전쟁의 승인을 받았다. 

1950년 봄 북한에 나와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이 거의 전원 교체되었다. 소련 수석 군사고문이었던 스미르노프 중장 대신 소련의 군사영웅 바실리예프 중장을 수석고문으로 하여 총참모부 고문 포스트니코프 소장, 총정치국 고문 마르첸코 소장으로 구성된 새 고문단이 부임했다. 이들은 남침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스탈린이 엄선하여 보낸 군인들이다. 

전쟁 개시 15주 전인 1950년 3월 11일 바실리예프와 포스트니코프, 마르첸코는 김일성·강건·김책 등 북한 수뇌부와 비밀 회담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 개시에 대한 최종 결심을 밝히고 남침전쟁을 위한 작전계획서 작성을 소련 고문단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전쟁 개시 13주 전 강건은 포스트니코프 소장으로부터 소련어로 된 남침작전계획을 받았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남침작전계획의 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었다. 

남침작전계획 소련군이 작성하여 제공 

이 작전계획서는 소련군 출신으로서 북한에 와 있던 유성철·김봉률·황석복 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됐고, 이 과정에서 ‘선제타격계획’은 남침을 증거하는 표현이니 곤란하다면서 ‘반격계획’으로 명칭이 번경됐다. 

이정식은 6·25는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현인(wise man)들이 “한국을 방위하겠다. 한국에 대해 공격하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만 확실히 했더라면 6·25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불행하게도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애치슨 라인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발언들을 지속적으로 남발했다. 

1893년 미국 코네티컷 주의 미들타운에서 태어난 애치슨은 예일대와 하버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3년 루스벨트 행정부의 재무차관, 1941~47년 국무차관보, 국무차관을 역임했다. 1947년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입안하여 냉전체제를 개막했으며, 트루먼 대통령 때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북대서양조약기구 결성을 추진했다. 

그는 회고록 <창조에의 참여>로 1970년 역사부문 퓰리처상을 받았고, 1971년 사망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익명 2016-06-02 10:48:53
애치슨의 생각이든 맥아더의 생각이든 맞는 말입니다.
애치슨 라인은 맥아더의 관할구역을 명확히 하는 발언입니다.
한국과 대만은 맥아더의 관할구역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949.6.29 남한의 미군이 철수하며 맥아더는 한국과 관련이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국무부 소속 군사고문단이 남아서 국군을 지휘하고 원조했습니다.
한국은 국무부 관할지역이 되었습니다.

익명 2016-06-02 10:40:38
1950.1.26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체결함.
'군사고문단이 국군과 경찰의 조직 통할에 있어서 대한민국 정부를 고문한다'는 내용임.
군사고문단의 의견이 대한민국정부(대통령의 통수권)보다 우선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군사고문단이 국군을 지휘했음.
이른바 10대 불가사의는 군사고문단이 지시 했음.
1960년이 되어서 겨우 '군사고문단이 국군을 조언한다'는 내용으로 개정하여 지휘를 못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