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
탈북민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2.22 00:3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탈북민과 북한 해방

오늘날 대한민국은 북한을 탈출한 월남자들이 세운 나라다. 탈북민들은 북한 해방을 촉진시켜 통일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소중한 존재들

과거 동서독이 분단되었을 때 동독을 탈출하여 서독에 정착하게 된 탈출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독 작가들의 소설들을 본 적이 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살던 동독 사람이 서독에 정착하면 가장 먼저 월부 판매원들이 찾아온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가 학교 진학에서부터 취업, 주택, 의료, 의식주 등을 책임져주던 동독 출신들은 월부가 뭔지 개념조차 생소하다. 

월부 판매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생활용품, 가전제품 등을 잔뜩 들여놓고는 직장을 다니다 도저히 적응하기 힘드니 실직을 한다. 실직을 하면 월급이 나오지 않으니 월부금을 갚지 못한다. 재판에 회부되어 신용불량자, 금치산자가 되어 폐인이 되다시피 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하류층을 전전하다가 다시 동독으로 탈출하여 사회주의 품에 안긴다. 

1970년대 서독에서 이런 스토리의 작품들이 자주 발표됐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3만여 탈북민들도 일부 성공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심리상태이거나, 일부는 동독의 사례처럼 북한으로 돌아가 사회주의 품에 안기는 사례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탈북민들의 지원 관련 법규나 정착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적응 과정에 실패하는 사례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탈북민들이 사회 부적응하는 것까지 어떻게 다 국가가 책임지는가” 하고 팔장 끼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 국민과 아무런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융화될 때 비로소 통일에 대한 심리기제가 정상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탈북민들의 부적응 사례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사회의 문제를 지적해왔고, 그런 지적에 의해 상당 부분 탈북민의 적응을 돕는 시스템과 인프라가 갖춰졌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혈연·학연·지연에 의한 차별의식까지 말끔히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월남자들이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우리는 그리 오래지 않은 현대사 속에서 140만 탈북민을 용광로처럼 녹여내어 대한민국 국민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로 1945년부터 1953년 해방과 6·25 전쟁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탈출해 온 탈북민, 이른바 ‘38 따라지’로 불리던 월남자들의 존재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6·25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140만 명 정도의 월남자가 발생했다. 특히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월남한 분들은 북한에서 토지개혁이나 주요 산업 국유화 과정에서 토지나 사업체를 빼앗긴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로 낙인찍힌 지도자급 인사들, 기독교인이나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 등 훈련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고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북한을 이탈하여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은 북한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두뇌 유출 현상이었고, 남한 입장에서 보면 훈련되고 교육받은 엘리트 두뇌 집단의 대량 유입이었다. 

특히 월남자의 상당수는 왕성한 생산 활동이 가능한 남성들이 대부분이어서 북측의 생산가능 인구의 급감과 이로 인한 충격은 컸다. 북한이 6·25 후 사실상 전통 봉건사회로 회귀한 데는 공산주의라는 요인도 작용했지만, 이처럼 유능한 인재 집단이 월남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38 따라지’라고 불리던 이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은 오늘날 탈북민들이 정착하는 데 겪는 어려움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요즘은 탈북민 지원과 관련된 각종 지원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주택이나 직업 알선 등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지원이 제공된다. 그러나 해방 후의 혼란기에는 남한 사람들도 먹고 살기가 빠듯해 월남민은 그저 자기 의지 하나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반공의 투사 되어 한국 구출

2000년에 돌아가신 필자의 부친도 월남민인데, 월남 초기엔 장충공원의 텐트에서 잠을 자고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부친의 남한 사회 적응기는 대다수 월남자들이 겪어온 정착 과정의 표본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하고자 한다. 

지주 집안이라 하여 모든 재산과 땅을 다 빼앗기고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부친은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1950년 무렵 주한미군 첩보부대가 운영하는 첩보부대에 몸담아 대북 첩보활동에 종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약간의 돈을 모아 사업을 통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처럼 월남민들 중 일부는 서북청년단을 결성하여 좌익들의 준동을 막아냈고, 여수 순천 반란사건 당시 군내의 좌익 군인들이 숙청된 빈자리를 젊은 월남민들이 들어가 메워주었다. 당시 좌익 4749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숙청되어 군부 내에서 남로당 조직을 뿌리 뽑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군 병력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반공의식이 투철한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군에 입대하여 좌익 인사들의 숙군으로 인한 공백을 훌륭하게 메운 결과 6·25 남침을 당했을 때 우리 국군이 전열이 무너지지 않고 싸워 인천 상륙작전을 통한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은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악착같은 근성과 기질을 발휘하여 남한의 상권을 장악하고 기업을 일궈냈다. 해방·좌우익 격돌·전쟁 등 격렬한 혼란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을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늘날 기독교 문명의 꽃을 피웠다.  북한의 지력 고갈, 두뇌 유출은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지력 폭발을 가져왔고, 이것이 대한민국을 만든 초석이 되었다. 

월남자들의 활약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고는 6·25 당시 서울지역에서 학도병 참전자와 전사자(35명)가 가장 많이 나온 학교다. 전쟁기간 동안 457명의 재학생이 참전했는데, 이는 1회부터 6회까지의 졸업생 1198명 중 40%에 해당하는 숫자다. 특히 3회 기수의 경우 169명 중 118명이 참전하여 70%에 이르는 참전율을 기록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 서울고는 개교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학교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명문인 이튼스쿨과 일본의 귀족학교인 학습원(學習院) 출신들의 참전율이 20%대였다. 단일 학교에서 이처럼 높은 참전율을 기록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경이적인 일이다.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게 높은 참전율을 기록한 것일까. 

강대신 서울고 총동창회장은 “서울고 초창기 입학자의 과반수가 이북 출신이거나, 월남자의 자제들이었는데, 이들 서울고 선배들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전쟁이 나자 이들 다수가 자원해서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많은 분들이 전사했다”고 말한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대한민국은 사실상 탈북민(월남자)들이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6·25 남침 때 북한군과 맞서 싸웠던 국군의 지휘부는 거의가 북한 출신 월남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김일성과 소련과 공산당이 싫어 월남한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은 남한에 정착하여 기독교를 더욱 확산시켰다. 때문에 남한의 기독교화는 남한의 반공 민주화와 궤를 같이한다. 

좌파 학자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한은 월남자들이 만든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월남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연구한 김 교수는 남한은 “월남자들로 인해 이민자의 나라의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다섯 개 중 네 개가 한국에 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나 창설자들이 다 월남자들이다. 조선일보는 전형적인 월남자들의 신문이고, 사립학교 중에서 상당 부분을 월남자들이 세웠다. 제3공화국까지는 경찰, 군부 엘리트도 반 이상이 다 월남자들이었다. 

6·25 전쟁 중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정일권 장군, 백선엽 장군이 북한 출신이고, 역대 국무총리 중 백두진(황해 신천), 유창순(평남 안주), 노신영(평남 강서), 강영훈(평북 창성), 정원식(황해 재령), 이수성(함남 함흥) 등 유독 북한 출신이 많았다. 

정계에서는 북한 출신 국회의원의 숫자가 제헌의회 때 12명을 기록한 이후 늘 20~30명 선을 유지했고, 9대 국회 때는 41명이 당선되었다. 재계에는 현대의 정주영, 진로의 장진호, 대농의 박용학, 태평양의 서성환, 신동아의 최순영 등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함께해온 주력 기업들의 창업주가 북한 출신인 월남자들이다. 

대한민국이란 신생공화국의 기초공사는 이북 출신 월남자+반공주의+기독교가 굳건한 토대를 형성했다. 대한민국의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군의 역할, 반공의 불꽃, 산업화의 대장정은 월남민들의 고군분투에 상당 부분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선배 월남자들의 자랑스런 전통 이어받기를 

오늘날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탈북민들의 모습과 월남자 세대를 비교하며, 이 땅의 탈북민들이 가져야 할 역사적 사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탈북민들의 남한 사회 정착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다. 아무리 정부와 국가, 사회, 종교기관, NGO가 지원을 하고 도움을 줘도 개인의 노력과 분발 없이는 어떤 성과도 거둘 수 없다. 

피눈물 나는 설움과 차별,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면 남들보다 잘 살 수 없다. 어렵다고 해서 설움과 차별, 경쟁을 피할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도전하여 승리하고 극복할 때 보다 풍요롭고 안정되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장점이자 현실이다. 

노력하고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가 하늘에서 날벼락처럼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성공한 탈북민의 숱한 성공 사례들이 있다. 

둘째, 탈북민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김일성 세습 왕조의 실상을 속속들이 체험한 귀중한 존재들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이 된 이상, 선배 세대들처럼 이 나라의 좌익,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나라의 안보를 굳건히 지키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보다 명랑 쾌적한 사회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여러분들의 고군분투는 좌익들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애국우파 세력에 결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셋째, 북한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포들의 해방을 위해 싸워주길 기대한다. 국가가 뭘 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자유지만, 북한 해방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어 투쟁할 때 북한의 붕괴는 촉진된다. 특히나 북한에서 생활했던 여러분들의 체험담과 경험이야말로 북한 해방에 더없이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여러분들은 북한 해방을 촉진시키는 특공대가 되어야 한다. 

넷째, 우리 사회는 통일 준비가 너무나 부족하다. 언제 통일이 될지 알 수 없지만, 통일은 대박이라고 기대감만 계속 부풀리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바로 여러분들이 북한 아이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준비해야 하고, 통일된 북한에 들어가 과거의 동료이자 전우이자 이웃이었던 분들을 가르칠 교사, 군인,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 북한의 문화에 익숙하고, 북한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여러분들이야말로 통일 준비를 위해 곳곳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존재들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6-03-08 10:32:18
동독은 당시 공산권국가들중에서 가장 온건한나라인지라 서독에 살면서도 저런행위를 하는사람들은 지식층들과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별로없는뎅~!!!! 북한은 워낙에 개막장이니까 정치적인 탈북인권운동가들이 많을수밖에 없당께롱~!!!!!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