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로의 질주 시작되다
군국주의로의 질주 시작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2.26 09: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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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2·26 사건(1936년 2월 26일)

2·26 쿠데타는 일본 군부의 정치 개입 불러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일으켜 비참하게 패망 

1936년 2월 26일 새벽,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도쿄 시내 곳곳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도쿄에 주둔 중이던 1사단 소속 노나카 시로·코다 기요사다·안도 데루조 대위, 구리하라 야스히데 중위 등 15명의 황도파 위관급 청년장교들은 보병 1연대, 근위보병  3연대 사병들을 연병장에 소집했다. 

구리하라 중위는 “소위 원로, 중신, 군벌, 재벌, 관료, 정당 등은 국체(國體)를 파괴하는 원흉이다. 우리는 천황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궐기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쇼와(昭和)유신을 향한 행동을 개시한다”고 일장훈시를 한 다음 사병들에게 실탄을 분배했다. 2·26 쿠데타의 봉화가 오른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총리대신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를 비롯하여 내대신(內大臣) 사이토 마고토(齋藤實), 대장(大藏)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추밀원 의장 이치키 키토쿠로(一木喜德郞), 귀족원의장 이자와 다키오(伊澤多喜男) 등 내각과 의회, 재계의 거물들이었다. 쿠데타군은 이들 거물들을 제거한 후 천황이 직접 친정하는 체제로 국가를 개혁(쿠데타군은 이를 쇼와유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반란군은 6개 그룹으로 분산하여 수상관저, 국회의사당, 경시청, 육군성, 육상 관저, 참모본부 등 정부와 군부의 주요 기관을 포위했다. 구리하라 중위는 300명 병력을 인솔하여 수상 관저로 진격했다. 쿠데타군은 저항하는 경비경찰을 간단히 제압하고 관저 안으로 난입했다. 

반란군이 들이닥칠 무렵 오카다 수상은 취침 중이었는데 비서관이자 처남인 마츠오 렌조 대좌가 반란군들에게 수상 행세를 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반란군들이 마츠오 대좌를 수상으로 착각하여 실랑이를 하는 사이 오카다 수상은 재빨리 벽장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2월 27일 정오경 헌병의 도움을 받아 문상객으로 가장하여 반란군에게 포위된 수상 관저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대장대신 다카하시는 나카하시 중위가 이끄는 근위보병 병력에게 사살되었고, 사이토 마고토 내대신도 47발의 총탄과 열 번의 난도질을 당하며 참혹하게 살해됐다. 와타나베 교육총감도 피살되었고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었다. 

▲ 2·26 일본 군부의 천황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돼 이후 일본은 급속하게 군국주의화 된다. 사진은 쇼와천황(히로히토)의 젊은시절 모습.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국방예산 축소 

2·26 쿠데타의 원인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을 대재앙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과 독가스로 인한 대량의 인명 살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화에 대한 갈구가 시작되었다. 일본도 이러한 평화 무드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10여 년 간 일본에서는 정우회(政友會)와 헌정회라는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민주주의가 구현되어 선거권이 확대되었고,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 서구의 사상 사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일컬어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이식된 일본의 민주주의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대중적 지지에 기초하지 못한 정당정치, 국민의 정치적 각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선거권 확대는 헌정회 내각=미쓰비시(三菱) 내각, 정우회 내각=미쓰이(三井) 내각으로 불릴 정도로 극심한 정경(政經) 유착과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에 민간 정치지도자들은 국방 예산을 대폭 감축했고, 2개 사단을 없앴다. 또 장교들의 월급이 너무 적어 아무도 군인에게 시집오려 하지 않고, 전차를 탈 때도 군복을 벗고 타야 할 정도로 군의 사기가 저하됐다. 

게다가 군비 투자도 점점 뒤처져 기관총이 영국군 20만 정, 독일군 50만 정인데 일본군은 겨우 1200정에 불과했고, 전차는 영국·프랑스가 35만 량, 독일군 6만 량에 비해 일본은 겨우 300량에 불과했다.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일본을 강타하자 격렬한 반(反)자본주의 분위기가 젊은 장교들 사이에 퍼졌다. 

군부는 요인 암살, 쿠데타로 자신들의 불만을 직설적으로 표출했다. 참다못한 군부는 만주라는 변방에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국가를 수립하는 전략을 표출한 것이 만주국이다.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 

관동군은 정부나 군 지휘부의 허락도 없이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켜 획득한 만주를 일본 본국이 간여할 수 없는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했다. ‘독립국’을 표방한 만주국은 식민지가 아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본국과 대등한 관계여서 관동군이 일본 중앙정부의 명령을 거부할 법적 지위를 제공했다. 

1930년대에 들어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급증하고 농촌에서는 기근이 계속됐다. 그러나 부패한 정당 정치인들과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 정치인, 고급 관료와 군 상층부, 재벌들은 이런 민생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다. 

이런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는 ‘국가개조’, ‘쇼와유신(昭和維新)’을 내건 우익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년 3월의 쿠데타 미수 사건, 1932년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수상을 암살한 5·15 사건, 같은 해 미쓰이 재벌 이사장 단 다쿠마(團琢磨)를 암살한 혈맹단 사건 등 우익에 의한 테러와 쿠데타 시도도 잇따랐다. 

이 무렵 군부는 천황 중심의 국수주의적 체제 개혁을 주장하는 황도파(皇道派)와, 총력전에 대비해 군부가 국가 전반을 통제하는 ‘고도(高度) 국방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통제파(統制派)로 양분되어 있었다. 

황도파란 천황의 친정과 관료, 재벌 같은 특권 계급의 타파를 목표로 하는 파벌이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좌익 노동운동을 제압하고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하여 소련과 전쟁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군을 일본 전통의 무사 정신으로 강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반면 통제파는 현 정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군부의 입지를 서서히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소련이 아니라 미·영을 주적으로 설정하여 군 전력을 현대화해야 하며, 중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1사단은 황도파의 본거지였다. 이 와중에 1사단을 만주로 파견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조선주둔군의 경우 19·20사단이 붙박이로 배치된 것에 비해 만주의 관동군은 각 사단들이 돌아가면서 파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사단은 러일전쟁 이후 해외로 파견된 적이 없었다. 1사단 일부 장교들은 통제파가 자신들을 만주로 쫓아내려 한다고 판단,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반란군 수괴 중 한 명인 고다 대위는 육상 관저를 포위한 후 육상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대장에게 천황의 친정 등 8개조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쇼와유신의 실현을 요구했다.

그러나 쿠데타 보고를 받은 쇼와(昭和) 천황(히로히토)은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는 헌법 위반이자, 메이지(明治) 천황의 군인칙유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면서 “저들이 내 오른팔과도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고 이제 내 목을 조이려 하고 있다. 단호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삐 풀린 군부, 광란의 질주 

천황을 태양처럼 숭배했던 반란군들은 천황의 진압 명령으로 쿠데타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실패를 직감한 장교들은 천황의 명령에 의해 영예로운 자결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자결하려거든 너희들 맘대로 하라”며 이 요구를 물리쳤다. 

사건 초기 쿠데타군에 동조적이었던 육군 수뇌부는 천황의 강경한 의지에 굴복, 2월 29일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근위 사단을 중심으로 전차까지 포함한 약 2만 명의 토벌군이 출동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반란군을 포위하고 교통을 차단했다. 당시 일본군 59연대장이었던 영친왕 이은도 휘하 연대를 지휘하여 도쿄로 출동, 반란군을 포위하고 토벌전 준비를 했다. 

계엄사령부는 2월 29일 오전 라디오를 통해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투항 권유 방송을 했다. 토벌전이 벌어지기 직전, 반란군 지도부는 부사관과 사병들을 원대 복귀시켰고,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 나머지 장교들은 오후 5시에 투항하여 체포되었다. 

군사법원은 반란에 참가한 장교 중 자결한 노나카 대위를 제외한 19명 중 13명에게 사형, 5명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들 청년 장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줬다는 이유로 우익 국가주의 사상가 기타 이키(北一輝)를 비롯한 민간 우익인사 네 명도 특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이후 대대적인 숙군작업이 벌어져 황도파가 몰락하면서 육군은 통제파 천하가 되어 미·영과의 전쟁으로 질주한다. 

군부의 광기를 목격한 일본 정치가들은 이후로는 감히 군부의 뜻을 거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2·26사건으로 퇴진한 오카다 내각의 뒤를 이어 1936년 3월 5일 히로타 고키(田弘毅) 내각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은 군부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예산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7년부터 1942년까지 6년에 걸쳐 41개 사단과 142개 항공중대 증강이 결정됐고, 해군은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포함한 함정 66척 건조에 돌입했다. 

군국주의 일본의 운명은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그 근원이 있었다. 막부를 타도한 사무라이들이 허수아비 천황을 제위에 앉혀 놓고 국가를 주물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천황은 실질적으로 아무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였고, 군부는 사실상 초헌법적 존재였다. 메이지 유신 이래 러일전쟁까지 내각과 군부의 수장은 황족이거나 조슈 번(육군), 사쓰마 번(해군) 출신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두 파벌의 사병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일본군은 군정권(군을 조직 편성하는 군사행정권)과 군령권(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명령권)을 분리시켜 군정권은 육군성과 해군성이, 군령권은 참모본부와 군령부가 소유했다. 

네 개나 되는 독립기관이 군사권을 나눠 가지면서도 이를 통합 조정하는 기구(국방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시에는 혼란 방지 위해 최고사령부로서 천황을 수장으로 육해군대신, 참모총장, 참모차장, 군령부장, 참모본부 작전부장 등 주요 군 수뇌부로 대본영 구성하여 군을 지휘 통솔했다. 일본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이 무시되어 국군이 아니라 국가의 이름을 빌린 폭력조직 집단이 된 것이다. 

천황은 허수아비, 군부가 진짜 실세 

제국주의 일본군은 직속상관의 명령조차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했고, 정치에 개입하여 1932년 5월 15일 장교후보생들과 민간인들로 구성된 혈맹단이 총리 관저에 난입하여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수상을 암살했고, 1936년 2월 26일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로 정당 정치가 붕괴되고 군부의 정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이 와중에 재벌이 군부에 영합하여 군국주의 체제가 고착화된다. 

일본의 정당정치가 무너져 통제파 출신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이끄는 군부 정권을 불러오는 역할을 했고, 고삐 풀린 군국주의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연이어 일으켜 패망의 길로 질주했다.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일본은 사관학교 졸업 장교의 50% 이상이 고위 장성의 자제이거나 관료, 사무라이, 지주 출신 등 기득권 세력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엘리트 의식과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쳐 정당한 명령도 거부하는 하극상을 연출했다. 게다가 동향이나 동기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이 큰 문제였다. 

당시 일본 사회 최고의 출세 코스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이었다. 매년 30~40명의 육군대학 출신들이 정계와 군부 핵심에 포진하여 일본이라는 국가를 좌지우지했다. 이들은 전쟁만 알 뿐 정치 사회는 문외한이었다.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출신들이 연대장 이상 고위 직책 독식하고 쇼와 군벌을 형성했다. 이들이 국가를 농락하며 일본을 패망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의 충(忠)과 조선의 충(忠)은 글자는 같지만 내포한 의미는 큰 차이가 있다. 조선의 충은 군주를 위해 무조건적인 충절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 사무라이들의 충은 자신과 계약 관계를 맺은 주인이 개인적 은혜를 베풀면 그것에 대한 보상 개념이다. 따라서 은혜가 없으면 충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천황 숭배사상은 군부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천황을 자신들의 방패막이용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을 뿐이다. 군부에 있어 천황은 숭배의 대상이긴 했지만 충성과 복종의 대상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천황은 물에 비친 그림자일 뿐 진짜 달은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군부였다. 

‘정상국가’ 일본의 모습은?

군부의 비뚤어진 우월의식과 횡포로 장교들은 정부와 민간 분야 엘리트들과 곳곳에서 심한 마찰을 빚었다. 한번은 군인들이 교통신호를 위반하여 경찰이 단속하자 “황군은 헌병이라면 몰라도 경찰 명령에 복종할 필요 없다”면서 반항하여 군과 경찰 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군 수뇌부가 나서서 “경찰이 군의 체면 실추시켰다며 사과하라”고 요구하여 경찰이 정중히 사과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내무성, 외무성 관료들도 도가 넘은 군부의 횡포에 분개했지만 군국주의 하에서 군의 기세등등한 위상에 눌려 한숨만 쉬고 마음 속으로만 분노를 삭였다. 

일본 패망 후 그 동안 억눌렸던 군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관료들은 군에 철저하게 보복을 하기 시작한다. 평화헌법 하에서 군의 위상은 어쩌면 군국주의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오만방자한 군부에 대한 민간 엘리트 관료집단의 집단 이지메였던 셈이다. 

일본은 ‘정상국가’로 회귀를 준비 중이다. 일본이 말하는 ‘정상국가’가 군국주의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의 일본이 아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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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2016-03-17 09:47:10
편집장님 근대 일본에 관한 기사 잘 보고있습니다.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한가지만 부탁드릴려고요. 청일전쟁에 관한 책은 진순신의 "강은 흐리지 않고", 러일전쟁에 관한 책은 시바 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진순신의 책을 번역한 조양욱 기자의 "청일전쟁"은 번역이 엉망입니다. 이름과 관직이 뒤죽박죽이지요. 이 두 권의 책을 함께 소개해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