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스파이였던 세기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일생
나치 스파이였던 세기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일생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3.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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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24년 5월 5일 역사 속의 오늘 - 샤넬 No.5 향수 탄생

세계적 패션 브랜드 '샤넬'을 설립한 가브리엘 코코 샤넬(1883~1971)이 독일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비밀문서가 70년 만에 공개됐다. 샤넬이 1942~1943년 독일 공작원인 귄터 폰 딩크라게 남작의 정부(情婦) 겸 공작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래는 본지가 지난해 5월 샤넬의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하며 나치의 프랑스 점령 시기 독일에 협조적이었던 내용을 강조했던 기사로, 이번 문건 공개를 계기로 재개재한다.

기자가 마릴린 먼로에게 물었다.

“당신은 잠 잘 때 무엇을 입는가?”

먼로가 답했다.

“샤넬 No.5.”

잠옷 대신 벌거벗은 알몸에 뿌리고 잠이 든다는 뇌쇄적인 발언으로 유명세를 탄 것이 샤넬 No.5 향수다. 전 세계에서 30초에 한 병 씩 팔려나가고,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이 제품의 기획자와 제조자는 세기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과 러시아 황제를 위해 향수를 만들던 조향사(造香士) 에르네스트 보. 그 유명한 샤넬 No.5 향수가 탄생된 날이 1924년 5월 5일이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 향수 ‘샤넬 No.5’는 83가지의 꽃향기와 화학합성 알데히드를 브랜딩하여 제조되었다. 한 가지 원료로만 향수를 만들던 시대에 천연원료와 합성물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때문에 향수 전문가들은 향수를 논할 때 종종 No.5 이전과 이후라고 시대 구분을 하기도 한다. 장식이 전혀 없는 투명한 크리스탈 병에 이름마저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No.5로 작명되어 너무 난폭하다, 남성적이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이다 라는 악평이 난무했지만, 그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반열에서 이름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 만약 가브리엘 샤넬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사회로부터 매장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세기의 명품 ‘샤넬 No.5’ 향수는 가브리엘 샤넬과 러시아 황제의 사촌인 드미트리 공작, 그리고 화가인 호세 마리아 세르트가 몬테 카를로로 여행을 하면서 구상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러시아 황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합류했다. 가브리엘 샤넬의 제품 컨셉은 ‘럭셔리하면서도 매혹적인 여성미를 느낄 수 있는 여성용 향수였다.

그녀의 컨셉을 완성하기 위해 에르네스트 보는 필리핀이 원산지인 일랑일랑, 프랑스 중부 지방에서 자란 장미 꽃잎, 재스민 등 83가지의 꽃향기와 인공 합성물을 브랜딩하여 혁신적인 향을 완성했고,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병에 그것을 담았다.

에르네스트 보가 번호 1~5, 20~24가 적힌 10개의 샘플을 내놓았을 때, 샤넬은 그중 ‘5번’을 선택했고, 그것으로 상품명이 되었다. 샤넬이 ‘5’라는 숫자에 집착한 이유는 그 숫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5월 5일에 발매를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동안 니콜 키드먼과 로렌 허튼, 알리 맥그로우를 비롯한 유명 톱 여배우들을 모델로 앞세워 광고를 하다가 할리우드의 톱 배우 브래드 피트를 내세우기도 했다.

나는 샤넬 No.5의 럭셔리하고 향기로운 세계를 논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천재적인 디자이너의 어두운 역사의 굴곡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가브리엘 샤넬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녀는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고 시궁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극단적인 민족주의 광풍이 불고 있는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코코 샤넬’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은 프랑스의 위대한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처럼 기구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세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아이들을 돌볼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샤넬과 어린 여동생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버리고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다.

샤넬은 수녀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바느질도 수녀들에게 배웠다. 그러던 중 샤넬의 여동생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샤넬은 고아원을 나와 생 마리 의상실의 보조 재봉사로 일했다.

보조 재봉사 직업으로 생계 유지가 어렵자 그녀는 캬바레 밤무대의 무명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 샤넬이 즐겨 부른 노래가 ‘코코리코’였는데, 그의 애칭 코코 샤넬은 이 때 만들어졌다.

백옥 같은 피부와 우수에 젖은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 짙은 머릿결이 어우러진 우아한 미모는 남성들을 한 눈에 사로잡았다. 25세 때 코코 샤넬은 에티엔 발장의 애인이 된다. 샤넬의 천부적인 디자인 감각은 모자 디자인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샤넬은 영국 출신의 사업가 카펠과 운명처럼 얽혔다. 카펠의 후원으로 1910년에 파리의 캉봉 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점을 내면서 유명세를 탄 샤넬은 작가 장 콕토, 화가 피카소,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등과 어울리며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가브리엘 오르지아가 샤넬 모자의 열성 팬이었다.

샤넬이 추구한 패션 철학은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편안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샤넬은 혁명가였다.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없애버리고 실용적인 원피스를 선보였다. 그것은 충격이었고, 억압적인 관습에서의 해방이었다.

모조 보석을 귀부인의 목에 걸게 하고, 검정색 포드 자동차가 미국에서 유행하자 샤넬은 장례식에서나 사용되던 검정색으로만 구성된 리틀 블랙 드레스를 내놓아 샤넬의 시대를 이끌어 갔다. 그녀가 20세기 여성에게 남긴 것은 ‘자유’였다.

“여성이 어떻게 자신을 조금도 꾸미지 않고 집을 나설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그날이 운명의 상대와 데이트를 하게 될 날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녀의 발언은 이처럼 늘 도발적이었다.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성’으로 꼽은 인물이 퀴리 부인과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앙드레 말로는 말했다.

“이번 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드골, 피카소, 그리고 코코 샤넬.”

▲ 인류 최초의 인공 향수 ‘샤넬 No.5’. 샤넬 No.5는 향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수와 주얼리, 그리고 디자이너로서의 성공으로 순탄한 삶을 이어가던 샤넬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닥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 악몽에 시달렸던 프랑스는 당대의 최첨단 과학을 총동원하여 총연장 약 750km의 마지노 요새를 건설했다.

마지노 요새는 완벽한 지하설비와 대전차(對戰車)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전차부대를 동원하여 마지노 요새가 건설되지 않은 벨기에 북동쪽의 아르덴스 숲지대를 돌파하고 전광석화처럼 파리로 진격했다.

프랑스는 개전 6주 만에 독일군에게 항복했고,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구한 전쟁 영웅 필립 페탱이 독일의 괴뢰국가 비스 프랑스 정부를 수립했다. 프랑스인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독일군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일 때 코코 샤넬은 나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와 사랑에 빠졌다. 독일군 장교의 비호 아래 샤넬은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4년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가브리엘 샤넬은 졸지에 ‘나치에 프랑스의 혼(魂)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비난과 함께 반역자 신세로 전락했다. 신변이 위태로워진 그녀는 고국을 탈출, 애인과 함께 스위스의 로잔으로 망명하여 15년간 객지 생황을 해야 했다.

15년 후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조국에선 별 대접을 못 받았으나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미국에서 열광적인 선풍을 몰고 왔다. 1955년 샤넬은 미국에서 ‘과거 50여 년 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로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상했다.

1971년, 88세로 사망한 가브리엘 샤넬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고 망명 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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