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오늘] 새마을 노래, 이렇게 탄생했다
[역사 속의 오늘] 새마을 노래, 이렇게 탄생했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4.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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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근대화 (1972년 4월 21일)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모든 사람을 다 돕는 보편적 방식을 거부했다. 그보다는 ‘뭔가 해 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서 돕는, 선택적이고 차별적이며 경쟁적 방식을 도입했다

1972년 4월 21일은  한 시절 전 국민이 따라 부르던 ‘새마을 노래’가 탄생한 날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박정희 대통령, 작곡자는 박 대통령의 딸 박근영 전 육영재단 이사장. 박 전 이사장의 언론 인터뷰에 의하면 서울대 음대 출신인 박 전 이사장에게 어느 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를 한 후 “근영아, 콩나물(악보) 좀 붙여봐라”고 해서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 새마을 노래는 당시 새마을 운동이 성공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사를 쓴 후 이은상 선생에게 감수를 받았다. 이은상 선생은 대통령이 직접 쓴 원고를 보고는 “여기다 더 말을 붙이면 사족(蛇足)이다. 그대로 얼마나 쉬운 말이고 얼마나 좋은가. 그대로 갖다 올려라” 이렇게 해서 새마을 노래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

박 대통령이 새마을 노래를 세상에 내놓은 지 5일 후인 1972년 4월 26일 메모한 ‘새마을운동’이라는 친필 문서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적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고 있다.

“1. (1)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여러 부락을 찾아가보고 보고를 통하여 듣고, 우리 농민들이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2)도지사 이하 시장, 군수, 기타 모든 일선 공무원들이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잠바 바람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면서 이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보람을 느끼는 것도 우리 농민들의 그 부지런한 모습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확실히 이 운동은 우리 농촌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 바람이요, 서광이요 희망이라고 본다. 우리 역사상 과거에도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확실히 우리 민족도 잠재적으로 무한한 저력을 가진 민족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이란 설움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겪어봤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대결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천재(天災)는 하늘을 쳐다보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인력으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가난은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분발하고 근면하고 협동하고 단결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이 분연히 일어나게 한 동기가 되고 원동력이 되었다.

역시 여기에는 어떠한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고, 자극이 있어야 된다고 본다. 지난 10년 동안 1, 2차 5개년계획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땀 흘려 이룩한 건설의 성과가 우리 농민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오랜 침체 속에서 잠을 깨고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도 ‘하면 된다’고 하는 자신이 생겼다.

농촌을 부유하게

2. (1)한 민족이 침체에서 벗어나서 일대 비약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이다. 자신이 있으면 의욕이 생긴다. 의욕과 자신이 없는 민족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이것을 이용할 줄 모른다(기회 포착 부족). 반대로 의욕과 자신이 왕성한 민족은 역경에 처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을 줄 아는 슬기를 발견한다.

(2)우리는 그 동안 수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다. 먼 옛날은 고사하고 금세기에 들어와서도 외적으로부터 침략도 받아봤고, 공산당의 수없이 많은 도전도 받아봤고 한해(旱害) 수해(水害)다 하고 수많은 천재(天災)도 받아봤고.

(3)쉽게 말하자면 ‘잘살기 운동’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거냐?
- 빈곤 탈피.
- 소득이 증대되어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 있고, 품위 있고, 문화적인 생활.
-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고 상부상조하고
- 알뜰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내 마을.

◎당장 오늘의 우리가 잘살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내일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서 잘 사는 내 고장을 만들겠다는 데 보다 더 큰 뜻이 있다.(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적 의의 발견하자)”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과 비전, 자신이 꿈꿨던 대한민국의 모습을 추출한 결과 살기 좋은, 우리 힘으로, 초가집 없애기, 마을길 넓히기, 서로 도와서, 소득증대, 부자마을, 싸우면서 일하고, 새 조국 만들기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키워드를 따라 외기 쉬운 내용으로 정리하여 단순하면서도 씩씩한 행진곡 풍의 노래에 담아 전국에 보급한 것이 ‘새마을 노래’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믿는 사람이 없겠지만 5·16이 벌어진 1961년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보릿고개, 초근목피(草根木皮), 절량(絶糧)농가, 춘궁기라는 말이 실제로 존재했다. 박정희와 함께 혁명을 했던 이석제 전 감사원장은 박정희의 근대화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국가건설’, 즉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이는 지도자는 참다운 지도자가 아니오. 여러분들은 어떤 정책이나 법률을 입안할 때 반드시 국민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방법론과 연관을 시켜서 발상을 해야 합니다.”

선택적·차별적·경쟁적 방식 도입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꿈을 항상 지니고 자기 스스로 분기(奮起)할 뿐 아니라 타인을 분기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라는 꿈에 항상 자기를 분기시키고 국민들도 분기시켰다.

국민들을 배불리 밥 먹이고 잘 살게 하려면 잠자는 국민들, 의욕을 상실한 국민들, 절망과 체념에 지친 국민들을 일으켜 세워 물불 안 가리고 뛰게 해야 했다. 지난 수백 년 세월을 양반들에게 수탈당하며 가난을 숙명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일으켜 세우려면 국가의 행정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 새마을 노래 악보와 가사.

그들 스스로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우리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본능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탄생한 정신운동이 새마을운동이었고, 그 구호가 근면, 자조, 협동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모든 사람을 다 돕는 보편적 방식을 거부했다. 그보다는 ‘뭔가 해 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서 돕는, 선택적이고 차별적이며 경쟁적 방식을 도입했다. 아울러 새마을 지도자는 절대 정당 가입을 금지시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했다.

박정희는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농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일깨워 농민이 잘 살고, 마음을 잘 살게 하며, 나라가 잘 되게 하는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새마을운동에 정치색이 끼어들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출발은 정부가 1970년 10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전국 3만 4665개 부락에 시멘트 300~355부대씩의 시멘트가 무료로 배급한 것으로 시작됐다.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조건이 붙어 있었다. 각 가정마다 개인적으로 나눠 쓰지 말고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 즉 마을 진입로 확장이나 작은 교량 건설,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공동목욕탕 건립 등에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멘트를 제공 받은 부락 중에는 농가마다 개별적으로 나눠 쓴 곳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능한 리더가 있는 마을은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로 마을 공동사업에 필요한 공사를 했다.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가 모자란 곳은 각 가정이 조금씩 더 보태서 공동사업을 수행한 마을도 있었다.

다음 해에 전년도의 사업 실적을 평가한 결과, 절반가량인 1만 6600여 마을은 지급된 시멘트를 이용하여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한 반면, 나머지 마을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박정희는 성과가 뚜렷한 마을에 한해 다음 해에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지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당은 대경실색했다.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부락은 다음 선거 때 여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노력하고 협동하는 마을은 적극적으로 돕되, 노력하지 않거나 협동하지 않는 마을은 돕지 않겠다. 이 길만이 수 천 년 내려온 의타심을 뿌리 뽑고 자조하는 정신을 자각시키는 길이다. 이와 같은 방침으로 설령 선거 때 표를 못 얻어 져서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만은 바꾸지 않겠다.”

이렇게 되자 각 마을은 정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고,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협동 단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잠잠했던 농촌 마을들이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개인적 구상에서 출발

정부는 농촌 지역의 소득 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투자도 어느 마을이나 고르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 차별적, 경쟁적 방식을 동원해 잘하는 마을엔 더 많이, 못하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그 결과 1970년에 80%에 달했던 초가지붕은 1975년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을 안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진입로가 닦였고, 농가 마당까지 경운기가 출입할 수 있도록 마을길이 확장됐다. 280만 호의 농가에 전기를 공급하여 농민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각종 가전제품을 사용하게 하여 농촌에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70년 전기가 들어온 마을은 20%에 불과했지만 새마을운동의 결과 1978년에는 98%까지 높아졌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중반부터 소득증대사업으로 전환됐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채소, 양송이, 과일, 엽연초(담배) 등을 키우는 온상재배와 양봉, 목축 사업이 추진되었고, 새마을공장을 건설해 농한기에도 농외소득을 올리도록 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이 증대되어 1974년에는 농촌의 소득이 도시근로자 평균 소득을 초과했다. 통일벼의 대량 보급을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수 천 년 이어오던 보릿고개, 초근목피란 말 자체가 사라졌다.

김정렴의 회고록에 의하면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정희의 개인적 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슨 사업을 어떤 방법으로 추진할 것이며, 새마을지도자는 어떤 방식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까지 거의 모두가 박정희의 개인적 구상에서 나왔고, 본인이 직접 지휘하다시피 했다.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의 값진 성과는 그 동안 수탈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국민들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는 점이다. 피터 드러커는 국가나 조직이 순기능을 발휘하려면 개개인이 잠재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에게 합당한 지위와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는 3%의 양반이 97%의 백성을 수탈하는 계급사회였다. 이러한 계급사회에서는 개개인이 가진 잠재력과 창의력이 발휘될 수 없다. 지배계층은 백성들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할까 두려워 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박정희는 가난의 나락에 빠져 신음하던 농민들의 혼을 깨웠다. 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면서 조국 근대화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그것은 조선조 500년,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짓눌리고 억눌려 살아왔던 97%에 달하는 이 땅의 국민을 일으켜 세워 지도부와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뜨겁게 일하도록 만드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계기를 제공했다.

새마을운동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온,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발전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 라오스 등 아시아 국가와 탄자니아, 콩고 등 아프리카 국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세계은행에서는 새마을운동을 ‘공동체 주도 발전(Community Driven Development·CDD)로 칭하며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조화

1998년 7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제일가는 업적으로 새마을운동을 꼽았다는 것은 이 운동이 얼마나 성공적이었고 그 영향이 큰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엔의 세계빈곤퇴치 특별위원회는 새마을운동을 후진국 발전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권고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 세계 빈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74개국에 수출되었다. 새마을운동을 발상국가에서 배우기 위해 수많은 해외 인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인 2011년에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새마을의 날(4월 22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다. 현재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 모델로 선정돼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로버트 켈리는 조직의 성공에서 리더십의 차지하는 역할은 20%, 80%는 팔로워십에 의한 결과라고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팔로워들의 지지와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새마을운동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드물게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끌고, 국민들이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을 밀어주며 혼연일체가 되어 ‘잘 살아보자’는 열망을 실현한 리더십과 팔로워십(followership)의 조화였다.

새마을운동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온,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발전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이란 책을 쓴 윌리엄 오버홀트는 중국을 산업혁명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고 평가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경제 발전하게 된 것은 수출주도의 경제 발전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대외개방에 신중을 기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며, 새마을운동을 따라 하는 등 한국의 경험과 접근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을 추종해왔던 우리나라가 중국에 영향을 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새마을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I0Od5IJ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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