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에서 배우자
조선의 역사에서 배우자
  • 미래한국
  • 승인 2016.04.1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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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보는 눈]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붕당을 금지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정치 참여 의식이 확대되면서 붕당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구양수(歐陽脩)는 붕당을 공적인 도리의 실현을 추구하는 진붕(眞朋)과 개인적 이익을 탐하는 위붕(僞朋)으로 나누고 진붕을 군자의 당, 위붕을 소인의 당이라 규정했다. 당쟁으로 조선이 망했다는 일제 식민사관은 이 같은 붕당의 본질을 외면한 역사 해석이다. 

그러나 붕당이 형성된 최초의 시기는 중종의 서손이었던 14대 선조 8년(1575년)때다.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는 자리를 두고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갈라섰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권력 다툼이 사림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도성의 서쪽 정동에 산 심의겸과 동쪽인 건천동에 산 김효원을 쫓아 서인과 동인으로 불렸다. 동인에는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기호학파가 참여했다. 

정책적으로 동인은 이(理)를 강조하고, 원칙을 중시한 선비들이 도덕성 제고에 역점을 둔 반면, 서인은 기(氣)를 앞세우고 현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둬 개혁을 통한 부국인민을 추구했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심해지자 이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정사를 그르친 서인들을 강경 처벌하자는 한강 북쪽 북악산 아래 산다는 북인과 그 반대파는 남산 아래 산다하여 남인으로 나뉜다.

북인 내부에서는 다시 세력 중심의 대북(大北)과 소장세력의 소북(小北)으로 분화된다. 대북은 다시 인물 따라 육북(肉北)과 골북(骨北) 중북(中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인조 반정으로 북인은 밀려나고 서인과 남인이 정국의 중심에 선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어 각 당마다 공천 파동으로 붕당의 다툼이 도를 넘어 살생부 논란, 괴문서 유출사건, 막말파동, 심지어 여당에서는 친박계와 비박계가, 야당에서는 친노 운동권 솎아 내기냐 운동권 의원 갑질이냐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사색당파가 재현된 느낌이다. 야당의 운동권은 자발적으로 퇴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손으로 강제퇴진 시키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친노 운동권의 기득권과 패권주의로 탈당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자 문재인 대표가 2선 후퇴하고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들어감으로 친노 운동권이 개혁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권력과 기득권을 갖고 정치적 횡포를 일삼으며 국회를 마비시켰다. 국회 입법마다 발목을 잡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체질화한다.

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 심지어 노사정(勞使政) 합의가 이루어진 노동개혁법마저 거부한다. 더 이상 공당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국민이 완전히 등을 돌리자 스스로 친노 운동권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는 안 될 상황에 이르렀다. 

여당인 새누리당 역시 공천 과정에서 전략공천을 극대화 하려는 친박계와, 상향식 공천을 통해 이를 최소화 하려는 비박계가 힘겨루기를 노골화 하고 있다. 사색당파가 정치적 이념과 비전의 차이로 나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지역 따라 나뉘었듯이, 한국 정치판도 사람 또는 지역 따라 나뉨으로써 조선조 시대를 방불케 한다.

북한은 핵을 갖고 날마다 공갈·위협을 하고, 준전시 상태에 빠진 한반도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만 잡겠다는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이여! 부디 조국과 백성을 생각하고 “나에게 내 형제 친척 이스라엘을 위해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고 한 사도 바울의 양심을 회복하고 지도자로서 존경받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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