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 국가를 집어삼켰다
민족이 국가를 집어삼켰다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승인 2016.04.30 08: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의 틀 깨기] 좋은 민족주의, 나쁜 민족주의

모든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前근대적이며, 反개인적이며, 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이다 

民族이란?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이 공유하는 민족이라는 감정 또는 관념이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추적함이 이 글의 과제이다. 그 민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민족은 공동의 인종, 언어, 종교, 문화에 대한 체험이나 기억을 기초적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것에 더하여 민족을 성립시키는 본질적 요소는 공동의 정치 체험, 그에 대한 기억과 기대라고 생각한다.

▲ 서울대 경제학 박사·교과서포럼 공동대표·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

공동의 인종, 언어, 종교, 문화만으로 민족이 성립할 수도 있지만, 그런 수준의 민족이라면 종족, 부족, 또는 소수민족 등의 다른 말로 대체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는, 한국적 맥락의 민족은 크든 작든 단위 정치체에 고유한, 그에 소속한 인간들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하거나 집단으로 동원하는, 권력 내지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는 민족 감정 내지 관념을 “공동의 인종, 언어, 종교, 문화의 전통과 공동의 정치적 체험에 기초하여 형성된, 과거부터 공동의 운명체였으며 현재도 그러하면서 장래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공동체의식”으로 정의해 두고자 한다.

물론 이 같은 정의가 세계에 무수히 분포한 크고 작은 민족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그 점을 글의 서두에서 명확히 해 둔다.

삼한일통(三韓一統)

역사가들은 한국사에서 민족이 형성된 시기와 관련하여 7세기 말의 삼국 통일을 중대 계기로 평가하고 있다. 삼국의 지배층은 서로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적대감을 강화했다.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배층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역사의식을 보유했다.

신라는 원 삼국에 각각 3개의 주(州), 곧 9주를 설치했다. 신라의 중앙군 9서당(誓幢)은 원 신라인의 3개 서당, 원 백제인의 3개 서당, 원 고구려인의 3개 서당으로 구성되었다. 신라는 해 뜨는 곳, 동해 가의 뭇 신선이 머무는 나라로 찬양되었다.

이 같은 정치적 공동체의식이 다시 한 번 크게 고양되는 것은 13세기다. 몽고와의 전쟁(1231∼1259)을 치르면서 고려인은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자아의식을 고양했다. 1281년 일연(一然)이 찬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그 잘 알려진 징표이다.

단군신화는 오랫동안 삼한인의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고조선의 건국설화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으면서 문자화한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믿을 만한 경험적 근거를 갖춘 이해는 아니다. 신화가 신화적으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8∼14세기 한국사에서 왕도(王都)에 결집한 지배세력이 오늘날의 민족으로 이어지는, 원형으로서 민족이라 부를 만한, 공동체의식을 보유했다는 주장에 그리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공동체의식은 모든 종류의 정치체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일 터이다.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그런 공동체의식을 신라와 고려의 판도에 속한 모든 주민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공유했을까 하는 점이다.

신라와 고려는 왕도에 결집한 왕족, 귀족, 중앙군의 군사공동체가 전국의 대략 1200개에 달하는 군(郡)·현(縣)·향(鄕)·부곡(部曲) 등의 공동체를 지배하는 공납제(貢納制)국가였다. 11∼12세기 고려의 인구는 대략 300만이었다. 그 가운데 약 50만이 왕도 개경 내외에 밀집했다. 그 중 5만이 왕족, 귀족, 관료, 중앙군, 이서(吏胥), 산직(散職)으로서 지배공동체의 핵심을 이뤘다. 고려는 이들 국인(國人)의 나라였다.

국인이 되면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되었다. 농촌에 거주한 향인(鄕人)이 경적(京籍)을 얻어 국인이 되기는 쉽게 허락되지 않은 특권이었다. 국인이 죄를 범하여 귀향형에 처해지는 것은, 곧 출신 본관지로 추방되어 향인이 되는 것은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런데 국인의 공동체의식과 향인의 공동체의식은 같았을까. 그들은 어느 정도나 동질적인 고려인이었을까. 그 점에 나는 회의적이다. 나는 단군신화와 같은 공동체의식은 국인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아가 향인의 공동체의식도 군현별로 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178년의 사건이다. 청주인(淸州人)이 국인으로서 청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그러자 개경의 국인이 결사대를 모아 청주를 공격했는데, 전사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1201년 경주의 별초군(別抄軍)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영천을 공격했는데, 영천의 정예군을 이기지 못하고 패주했다.

개경의 중앙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경주를 칠 궁리를 했다. 비슷한 사건은 14세기에도 관찰된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 공민왕이 피난하여 음죽에 이르니 이민(吏民)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중앙군의 노략과 겁탈을 두려워해서였다. 공민왕이 안동에 파천해 있는 동안 중앙군이 주변 민가의 처첩과 자녀를 심히 난음했다. 그 소식을 들은 청주인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왕의 군대가 이르렀을 때 모두 솔가하여 피신했다.

또 고려의 판도에는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이류(異類)가 꽤나 광범하게 분포했다. 양수척(楊水尺)으로 불린 이들 무리는 고려왕조에 저항한 백제의 후예로 간주되었으며, 수렵과 유기(柳器) 제작과 예능을 생업으로 했다. 양수척은 거란이 침입할 때 길을 안내했으며, 왜구가 창궐할 때 그에 가담했다.

원 복속기 이래 육식의 풍습이 확산되어 도축업이 생겨났는데, 양수척이 그 직업을 담당했다. 그들은 도축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민가의 가축을 훔치는 도둑집단으로 활동했다. 양수척의 무리가 없어지는 것은 15세기 전반의 일이다. 조선왕조는 이들 부류의 이동을 금하고 농민으로 강제 정착시켰는데, 이를 두고 신백정(新白丁)이라 했다. 지방에 따라 신백정의 수는 원주 농민의 3분의 1, 혹은 4분의 1에 달했다.

이상과 같이 고려왕조는 관료제로 잘 통합된 영토국가가 아니었다. 주민은 소속 공동체에 따라 그 사회적 신분을 달리했으며, 공동체 간에는 지배, 차별, 갈등의 관계가 일상적이었다. 그 같은 국가형태는 그에 속한 주민집단이 보편적으로 공유할 정치적 공동체의식을 원리적으로 배제했다. 내가 한국사 8∼14세기에 한국인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립했다는 주장에 회의적인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그 같은 전제로서는 15세기 이후에 전개된 조선왕조의 역사를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기자(箕子)의 나라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몽고제국 하에서 만주를 통치한 옷치긴 왕조로부터 다루가치 직위를 받고 대대로 계승해 온 변방 군사가문 출신이다. 고려 말 정치·군사의 혼란기에 이성계 세력은 개경의 국인 공동체에 침투하여 중앙군을 장악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혁명은 그 정치적 귀결이었다.

그렇게 성립한 조선왕조의 역사의식은 이전 신라·고려왕조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삼한일통의 역사의식을 보유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역사인식은 그 출신 배경에 규정되어 일층 국제적이었다. 조선왕조는 명(明)을 종주국으로 섬겼다. 명이 역성혁명을 수행한 왕조의 명칭을 조선으로 지정했을 때 왕조의 주체세력은 그것을 기자조선의 도통(道統)을 잇는 거룩한 뜻이라고 정당화했다. 조선왕조는 삼한의 정통이 아니라 아성인(亞聖人) 기자(箕子)의 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

이 같은 역사의식은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이전 왕조와 전혀 상이한 형태로 개편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왕조는 전국의 1200여 공동체를 330여 군현으로 통합하고, 매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한 관료제적 영토국가다. 통치이념의 정당적 근거를 제공한 종교는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었다.

이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에 따라 이전의 공동체사회가 해체되고 신분제사회가 성립했다. 조선의 왕과 양반관료는 향·부곡과 같은 예속공동체의 주민과 양수척의 무리를 노비 신분으로 지배했다. 성인 기자가 노비제를 창시하여 캄캄한 야만의 동방을 밝은 문명으로 인도했다는 새롭게 지어진 신화가 그것을 정당화했다.

노비는 주인에 대항할 온갖 법 능력을 상실했다. 노비의 중심부는 그 생사여탈이 주인에 사로잡힌 노예적 존재였다. 노비는 소와 개의 똥·오줌이나 바위와 같은 물상에 비유되었다. 그들에 가해진 오예(汚穢)의 관념은 이전 시대의 한국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 이전 시대와 달리 노비와 하층 상민 간의 결혼이 장려되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까지 노비 인구는 전체 인구의 4할 가까이나 되도록 급팽창했다.

이와 별도로 조선왕조는 그에 속한 성인 남자의 개별 인신에 특정의 직(職)과 역(役)을 부과했다. 관품이 있는 직을 부여받으면 양반 신분이요, 무품의 역을 부여받으면 상민 신분이었다. 천한 역을 진 사람은 곧 노비였다. 양반은 학문을 닦아 관료로 나아갈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상민은 각종 노역의 의무를 강요당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조선왕조의 인신지배체제는 17∼18세기에 들어 상당한 변용을 보지만 그 기본 골격은 19세기 말까지 허물어지지 않았다. 동기간에 노비가 전체 인구의 4할에서 1할로 감소했다. 그 대신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양반과 상민으로 차별하는 신분제가 확장했다.

이 같은 사회 변동의 저변에는 노비도 하늘이 모든 인간에 골고루 내린 인성(人性)을 공유한다는 철학 상의 진전이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성리학은 끝내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을 양반, 상민, 노비로 차별한 신분 원리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로, 조선을 아중심(亞中心)의 소중화로 간주하는 역사의식과 밀접한 연관을 이뤘다. 중국의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의 보편적 위계에서 조선의 왕과 양반은 제후와 대부라는 지위를 세습적으로 향유했다.

그런 세계관은 성인의 도를 실천하지 못하여 상민과 노비로 떨어진 일반 민서(民庶)에 대한 지배체제를 정당화했다. 이 같은 조선왕조의 역사의식은 15∼19세기에 걸쳐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지 않았다. 조선은 점점 기자의 나라로 변질되었다. 조선왕조의 단군에 대한 예우는 사직단에서 소홀하게 거행되는 민속 수준의 제사로 격하되었다.

이 같은 역사의식, 사회관계, 정치철학으로 통합된 조선왕조의 주민들이 공동의 운명이라는 공동체의식을 보유할 리는 없었다. 그런 생각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무책임하기까지 한 발상이다. 극심한 인신 예종(隸從)이 빚어낸 체제의 모순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의 7년간 극히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

왕과 양반이 황급히 떠난 도성의 왕궁은 노비들에 의해 불살라졌다. 함경도로 피난한 어느 왕자는 현지 주민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졌다. 일본군이 7년간 주둔한 한반도 남부의 주민은 그들의 두발과 의복을 일본식으로 바꿨으며, 다시 조선왕조에 복속됨에 큰 실망과 우려를 표했다.

19세기의 정약용은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상당한 정도로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보고 느낀 당대의 조선사회는 더 이상 성리학의 자연법이 보장하는 조화의 세계가 아니었다. 찢어지고 대립하는 세계, 국가, 사회의 제 관계를 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범주로 분해하고 재편성했다.

첫째는 천속(天屬)의 관계로서, 부자와 형제를 말한다. 이는 하늘이 낸 관계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둘째는 의합(義合)의 관계로서 군신, 부부, 붕우(朋友), 장유(長幼), 구고(舅姑), 주노(主奴)의 관계를 말한다. 의로 맺어진 이 관계는 후천적이며, 의가 상하면 해체될 수 있는 관계다. 이 가운데 군신과 주노의 관계를 두고 정약용은 명분이라 했다. 이는 그 절연함이 하늘과 땅과 같아 결코 타 오를 수 없는 관계다.

셋째는 족류(族類)다. 이는 벼슬하여 군자가 된 귀한 족(族)과 생업에 종사하여 천하게 된 족의 구분을 말한다. 그 경학적 근거로서 정약용은 인간은 천성의 도덕 능력에서 동류지만, 후천의 실천에서 천양의 차가 있어 한쪽이 인간이라면 다른 한쪽은 금수나 다를 바 없는 이류(異類)가 됨을 들었다.

넷째는 종류(種類)인데 중국과 사방 오랑캐 간의 구분을 말한다. 흔히들 정약용의 역사관과 지리관으로부터 근대적 민족주의의 추형(雛形)이 발견된다고 하지만,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한 속설이다. 어디까지나 화종(華種)과 이종(夷種)으로 나뉜 세계 질서를 전제한 위에 부풀어 오른 자아 의식의 표출이다.

나는 이 언저리가 조선왕조의 지성이 도달한 최고봉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기서 사회는 상이한 원리의 제 관계로 해체되어 있다. 물론 조선인은 신분과 지위를 떠나 공동의 정치적 운명체라는 관념 따위는 발상조차 없다. 정약용은 해체된 사회를 재통합하기 위해 주노(主奴)의 명분과 관민의 등급을 중시했다.

그 점에서 그는 반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사회를 통합할 강인한 개명군주의 출현을 고대했으나, 객관적으로 19세기 사회는 조선성리학의 원심 작용을 받아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해체된 상태였다.

▲ 반일(反日) 민족주의의 강화에는소중화(小中華)왜이(倭夷)의 역사인식이 무의식으로 깔려 있다. 사진은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 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는 모습.

민족의 유입

16∼18세기 서구에서 발흥한 근대 문명의 본질적 요소는 사적(私的)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이다. 그 개인의 새로운 정치적 협약체가 국민국가다. 그런데 그에 소속한 국민은 스스로를 자유의 인간으로 의식하기보다 민족의 일원으로 감각함이 훨씬 일상적이고 편의적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부족, 장원, 길드, 교구 등 역사적으로 오랜 집단에 소속하는 가운데 대를 이어 전승해 온 감성의 자연스런 발로였다.

국민국가의 지도자들은 열국쟁패의 제국주의 시대에 국민을 통합하고 동원함에 있어 민족이라는 집단감성에 의존했다. 개인의 성립 수준이 뒤처진 후발국일수록 민족의 동원력은 강대했다.

민족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초기에 사회가 보유하는 각양의 집단감성이 대내 결속과 대외 팽창을 위해 국가적 수준으로 재편성된 상상의 공동체다. 개인이 성숙함에 따라, 그리고 민족주의의 부작용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교훈에 떠밀려,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선진국에서 민족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국인이 민족이라는 단어나 관념에 접하는 것은 1907년을 전후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1880년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nation’에 해당하는 일본어를 찾는 과정에서 고안된 그 말이 한국에 들어와서 정착, 확산하는 과정과 시기에 따라 상이했던 역할에 관해서는 아직 신뢰할 만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민족에 관한 연구물이 적지 않게 쌓여 있음에도 내가 별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설령 민족이 구한말 국권이 상실될 위기의 시대에 외부에서 유입된 것임을 잘 인지하는 연구일지라도, 나아가 그것이 지니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깨우치는 건설적 의도의 연구일지라도, 대부분의 연구가 민족이 유입, 정착, 확산하는 과정에 가해진 전통의 작용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족은 독립운동, 사회개량, 계급혁명의 주역으로서 그것이 행한 역할이나 이룩한 성취 또는 끼친 부작용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평가될 뿐이지, 전통과의 상호 작용에서 형성된 민족 그 자체의 특질에 관해서는 좀처럼 실체적 이해가 진전되지 않아 왔던 것이다.

여기서 전통이라 함은 15∼19세기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구성한 여러 수준의 인간관계, 사회단체, 정치철학 등을 말한다. 그것들은 바깥 세계로부터 그와 경쟁적이며 대체적인 새로운 원리의 문명이 유입하더라도 쉽게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재편성하고 강화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민족이란 것도 단지 외래의 유입만은 아니고, 그에 작용을 받는 가운데 전통이 재편성 내지 강화된 형태이기도 한 법이다.

소중화(小中華)의 남은 역할

내가 그 역할과 추이를 중시하는 전통의 한 가지는 화이(華夷) 세계관에 바탕을 둔 소중화 역사의식이다. 그것은 조선의 전통적 사회 편성과 밀접한 연관을 이뤘다. 1895년 유인석을 비롯한 조선 성리학의 적통이 민비 시해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은 민족주의에 추동되었다기보다 왜이(倭夷)에 의해 (소)중화 질서가 큰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인석은 휘하 의병장들과 막료회의에서 반상(班常)의 분(分)을 범한 상민 출신 의병장 금백선의 목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을사조약 이후 그가 일으킨 의병 부대는 주둔지에서 반상의 분을 주민에 훈도하는 향약을 실시했다.

1911년 유인석은 망명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해혁명의 소식을 듣고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중원에서 중화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소중화의 회복도 멀지 않은 일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렇지만 손문이 공화정을 실시하고 공자의 학교를 폐쇄하자 그는 더 없는 실망과 비탄에 빠져 이승을 하직했다.

동학군과 독립협회의 남은 세력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한국사에서 자유민권사상으로 뭉친 최초의 전국적 정치조직이다. 그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찬성한 데 이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적극 추진한 것은 폭정을 일삼는 황제 권력에 대한 자유민권주의자들의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이 맹주가 된 동양평화의 새로운 국제질서와 그 속에서의 민족독립을 꿈꿨다. 그 꿈의 허망함은 전통 유자(儒者)들이 신해혁명을 독립의 계기로 환영한 국제 감각과 다를 바 없었다.

1919년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운동을 촉발했다. 33인은 스스로를 민족의 대표로 자처했다. 인용된 연기(年紀)는 단기 4252년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조선민족의 독립이었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조선인이 이해하기 힘든 생소한 개념이거나 상징이었다. 33인 가운데 조선의 유림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개념과 상징이 생겨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할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독립선언의 사건조차 알게 모르게 소중화의 역사의식에 깊이 포섭된 상태라고 간주한다. 33인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주요 근거는 동양평화였다.

국권을 상실한 민족이 동양평화를 독립의 대의로 내세운 것은 매우 특이한 정신사적 현상이다. 조금 뒤 시기, 북경에 망명한 영남 유림의 종장(宗匠) 이승희는 국민당의 관리 이문치와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어떻게 하면 성인의 도를 회복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이승희에 대해 이문치는 망국의 선비가 마땅히 추구할 것은 국권 회복이라고 충고했다.

1921년 3·1운동으로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이 광동 정부의 승인을 구하기 위해 손문 주석을 예방했다. 광동 정부 요인들이 좌우로 도열한 공식 접견 자리에서 신규식은 손문에게 6차례의 경례를 올렸다. 중국 언론은 황제에 대한 예의라고 보도했다.

이후 임시정부 내에서 큰 분란이 발생했으며, 신규식은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절식하여 자진(自盡)했다. 그렇다고 이후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세력의 역사의식에서 소중화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중국 혁명을 조선 독립의 길로 간주하여 중국 혁명에 참가했다.

소중화의 역사의식이 20세기 한국사에 깊게 각인한 것이 있다면 일본에 대한 인식에서다. 그 역사의식에서 일본은 바다 속의 오랑캐였다. 1945년 전남 장흥의 김주현이란 유생은 파리채로 파리를 잡다가 문득 파리를 일본으로 여겨 파리채가 장검으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두목들을 섬멸해 버리는 장면을 공상했다.

그에게 일본은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의 원수였다. 동년 8월 드디어 그 원수가 패망했다. 그 소식을 듣고 김주현은 “왜노를 두고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자꾸만 악독한 꾀를 지어내지”라고 흥겨워했다. 왜정 하에서 성인의 도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은둔해 온 조선 유림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인은 흑치(黑齒) 또는 칠치(漆齒)로 불리는 야만인이었다.

세계에 대한 폐쇄적 이해는 일본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물러가니 미국이 찾아왔다. 충북 충주의 유생 김인수에게서 미국은 인간이 아니라 금수(禽獸)의 나라였다. 1946년 그 미국이 전국에 과자를 배급했는데, 강화군만이 수령을 거부했다. 김인수는 그 뜻을 장하게 여겼다. 미국의 향기로운 과자를 먹으면 정신이 죽어 반드시 뒷날 매국의 빌미가 된다고 경계했다.

같은 무렵 서울에서 미국인과 우리 여자가 상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김인수는 짐승이 인간을 교잡하고 핍박함이 극에 달했다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날마다 끊어진 500년의 화맥(華脈) 정통을 회복할 대인(大人)의 출현을 기도했다.

이들 은둔 지향의 유림들은, 그리고 그들이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한 농촌사회의 주민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남긴 일기에서 나는 아직 민족이란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즐겨 인용한 자기 정체는 ‘아조선인(我朝鮮人)’이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문명이 개시된 역사와 함께 오랜 인종주의에다 소중화의 500년이 덧씌운 문명적 우월의식 내지 폐색감각의 표출이었다. 그런 신세계는 이후 대한민국이 그의 국민을 민족의 일원으로 교육하고 동원할 때 큰 공명과 화음의 통저음(通低音)으로 울렸다.

혈연(血緣)의 무한 확장

한국사에서 피의 순결을 우월 신분의 상징으로 중시하게 된 것은 7세기 중엽 신라에서 진골 귀족과 성골 왕족이 성립하면서부터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은 족내혼(族內婚)과 근친혼을 통해 피의 순결성을 보존했다. 족내혼과 근친혼은 고려 왕실에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지배세력인 국인 집단에게도 피의 순결성이 요구되었다.

국인들은 벼슬에 나감에 있어 8조 세손(世系)에 더러운 피가 섞이지 않음을 증명하는 단자(單子)를 제출해야 했다. 8조는 부변(父邊)으로는 조부, 조모, 증조모, 고조모, 모변(母邊)으로는 외조부, 외조모, 처변(妻邊)으로는 처부, 처모를 말한다. 8조 세계라 함은 이들 각각에서 올라가는 부, 조, 증조의 남계(男系)로서 도합 30여 명의 선조를 가리킨다. 이 넓고 아득한 범위에서 천한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아야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자격이 허락되었다.

조선왕조의 시대가 되면 그 범위는 본인과 처의 부, 조, 증조, 외조로 축소된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양반 또는 상민으로서 양인(良人)이고, 증명할 수 없으면 노비로서 천인(賤人)이 되었다.

이처럼 피의 순결성을 증명하는 제도가 천 수 백년을 이어온 것은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현상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특별한 혈연주의는 17세기 이후 그 원리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성리학의 종법에 바탕을 둔 가례(家禮)가 농촌사회에 보급됨에 따라 구래의 3변(부변·모변·처변) 내지 양계(남계·여계) 친족집단이 단변(單邊) 내지 남계 친족집단으로 바뀌어 갔다. 대체로 17세기 후반부터 남부지방 곳곳에서 동성 친족집단으로 구성된 촌락이 발달했다. 새로운 형태의 친족은 종(宗)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종은 고조-증조-조-부의 4조가 확보된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속한 친족집단을 가리켜 당내(堂內)라 했다. 당내를 보유한 사람은 양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상민이었다. 당내는 반상을 가르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다. 17∼19세기의 조선인은 당내의 결성과 보존을 사회·경제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추구했다.

당내는 종이 거행하는 4조에 대한 제사 의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내는 동일 규모로 재생산되고 확산한다. 그럼에도 선조를 공유하는 여러 당내는 친족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점이 중국의 친족과 달랐다. 중국에서 친족의 범위는 4조에 국한되지만 조선에서는 무한히 확장했다. 최초의 종은 대종(大宗)으로 승격하여 문중을 결성했다. 그로부터 파생한 종은 소종(小宗)으로 문중에 소속했다.

17세기 이후 한국의 친족집단이 대종과 소종의 위계를 창출하며 확장할 수 있었던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묘제의 풍속이 아마도 그 한 가지 배경을 이뤘을 터이다. 언제부턴가, 아마도 불교식의 화장이 유교식의 토장(土葬)으로 대체된 어느 시기부터 한국인은 철따라 조상의 묘를 찾아 음식을 공양하는 풍속을 일궜다.

후술하는 토지에 기맥이 흐른다는 한국인의 독특한 자연관도 다른 한 가지 배경으로 작용했을 터이다. 어쨌든 어느 한 곳에 붙박이한 조상의 묘는 공신가의 부천위(不遷位) 사당과도 같은 역할을 하여 4대를 넘어 친족집단을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인간의 이동 수단이 도보인 19세기까지 친족집단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낮은 수준의 경제력에다 빈번한 자연 재해는 친족집단의 안정적 형성을 방해했다. 족보의 작성도 대개 일향(一鄕)을 범역으로 하는 파보(派譜)에 그쳤다. 친족집단의 본격적인 확장은 도로가 닦이고 철도가 부설된 20세기 일정기(日政期)의 일이다.

총독부는 호적제도를 통해 일본식의 가부장제 가족을 한국에 이식했다. 생산력이 높아지고 시장이 발전하자 소농경제가 안정되었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구래의 상민들은 가부장으로 그 지위가 승격하는 가운데 4조를 봉사(奉祀)하는 친족집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1930년대가 되면 전국의 동리 가운데 거의 절반이 동성촌이었다.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는 사라졌지만 문화적 감각으로서 양반 신분은 일정기에 걸쳐 확산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반상의 분을 따지면서 혼인하고 교류하고 갈등했다.

그와 더불어 도로와 철도를 따라 친족집단의 공간적 결합이 촉진되었다.

1920∼1930년대가 되면 대부분의 유명 성씨 집단이 전국적 범위에서 대종회를 결성했다. 1930년대는 족보 편찬이 붐을 이룬 기간이다. 족보도 종래의 파보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대동보(大同譜)로 발전했다. 이로써 아마득한 천수백년 전의 어느 인물을 공동의 조상으로 받드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광대한 친족집단이 생겨났다.

1931년 전국의 383개 유명 씨족의 상호 계보를 한 책으로 망라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가 편찬되었다. 여러 사람이 기고한 발문은 공통으로 국가와 사회의 형성 원리로서 혈연을 강조했다. 가령 최초의 시조 한 사람이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이렇게 30대를 거듭하면 10억 7000여 만 명이다. 그러니 현세의 만성은 비록 성이 다르나 원래 한 시조의 자손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한국인 모두는 동일 조상의 자손으로서 바뀌었다. 오늘날의 한국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만성대동보>의 찬자는 현세의 인류가 동일 조상의 자손임을 두고 삼라만상이 태극에서 발원한 것과 동일한 이치라고 했다. 성리학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렇지만 조만간 그 성리학적 태극이 단군이라는 구체적 인격으로 대체되면, 온 한국인은 하나의 혈연으로서 민족으로 완성될 참이었다.

기맥(氣脈)으로서 국토

한국인은 독특하게도 땅에 정(正)하거나 부정(不正)한 기맥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 국토를 기맥이 통하는 신체로 감각한다. 중국의 음양오행설이나 참위설(讖緯說)이 한국사에 유입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10세기 이후 고려왕조의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고려사>는 백두산을 기맥의 근원으로 신성시하는 고려인의 관념을 전하고 있다. 15세기 이후 유교식의 토장이 확산됨에 따라 묘지의 기맥을 중시하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했다. 이래 그러한 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19세기에 걸쳐 민간에서 무성하게 벌어진 산송(山訟)은 좋은 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가문 간의 치열한 경쟁의 소산이었다.

흥부가 제비의 도움을 받아 대박을 터트리게 된 것도 어느 술사의 충고에 따라 집터를 좋은 곳으로 옮긴 덕분이었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몇 년 전에 부모의 묘를 고향인 전남의 어느 섬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충청의 어느 산골로 옮겼다.

18∼19세기에 이르러 토지기맥설은 조선 성리학의 소중화 역사의식과 기묘한 조화를 이뤘다. 조선 유자들의 백두산 이해가 그 좋은 예다. 1776년 백두산에 오른 대제학 서명응은 산꼭대기에 있는 큰 연못의 이름을 태일택(太一澤)으로 지었다. 그는 오늘날 천지로 불리는 그 연못을 보고 삼라만상의 근원인 태극을 연상했다.

그보다 10년 앞서 백두산에 오른 박종이란 선비는 백두산을 천하제일 곤륜산의 적장(嫡長)으로 비유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땅이 이미 중국의 정통을 계승했으니 하늘이 기자와 같은 성인을 우리나라에 내려 주신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탄복했다. 그렇게 백두산은 조선 소중화의 상징이었다.

1751년 <택리지(擇里志)>를 편찬한 이중환은 곤륜산에서 뻗어 나온 기맥이 백두산에서 크게 용트림한 다음 한반도 곳곳으로 백두정맥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지리의식을 정립했다. 이 같이 소중화론으로 순치된 토지기맥설은 중화제국이 해체된 이후 국토신체론으로 승화했다. 백두산은 더 이상 곤륜산의 적장이 아니라 독자의 가부장으로 군림했다.

나는 1927년 최남선이 지은 <백두산근참기근(覲參記)>에서 그 같은 전환의 최초 시도를 발견한다. 최남선에게 백두산은 “우리 종성(種姓)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태(胞胎)이시며, 이미 생명의 양분이다”였다.

그에게서 백두산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속이었다. 그는 “삼계(三界)를 헤매는 외로운 비렁뱅이 아이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자애로운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번 뵈옵기” 위해 백두산을 찾았다. 또한 백두산은 아버지다. 그는 천지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한아버지, 한아버지 저올시다. 아무 것도 없는 저 올시다.”

우리 민족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서 그는 기도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압시사, 압시사, 백두천왕 천지대신.”

1928년 홍명희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의 주인공 임꺽정은 백두산 밀림에서 만난 묘령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처가살이 중의 임꺽정이 어느 날 백두산을 올라 천왕못을 구경하고 내려왔다. 백두산에 관한 홍명희의 감상은 이 정도로 소략하게 그쳤다. 그에게서 같은 시기 백두산에 올라 민족의 갱생을 절규한 최남선의 모습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친일파의 거두 박영철이 백두산을 올랐다. 정상에서 그가 지은 한시(漢詩)는 천지자연의 웅장함과 오묘함을 노래했을 뿐이다. 백두산은 아직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었다.

미리 당겨서 말하면, 최남선이 백두산을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육화한 최초의 시도가 국토신체론으로 완성을 보는 것은 1987년 고은의 장편서시 <백두산>에서라고 생각한다. 고은에게서 백두산은 ‘삼라만상의 정수리’요, ‘온 동아시아’요, ‘조선의 근본’이었다. 나는 고은에게서 18세기의 서명응, 박종, 이중환과 20세기의 최남선이 겹쳐진 모습을 본다. 결국 그에게서 백두산은, 그것을 정수리로 하는 조선의 국토는 하나의 생명이요 신체다. 고은은 흥겹게 그 신체를 노래했다.

“한번 비트니 여기가 팔이요, 저리 비트니 저기가 궁둥이이다.” “이 모두 큰 산 한 자락 치맛자락이로구나, 누가 모르랴 백두산 한 골짜기 마을 마을이여.”

부풀어 오른 민족

한국사에서 민족은 19세기까지 국가체제와 사회 구성의 주요 원리로 작동한 소중화 역사인식, 혈연주의, 토지기맥론의 전통이 20세기 초기에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민족의 외피를 쓰고 해방 후 남·북한 양쪽에서 국민 형성의 일환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에서 민족의 성립은 8∼14세기 고려·신라시대의 일도 아니요, 15∼19세기 조선시대의 일은 더욱 아니며,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전의 장구한 역사는 현대에 이르러 민족이 성립하는 소재와 토양을 제공했다. 내가 언급한 위의 세 가지는 그 중의 중요한 일부일 뿐이다.

나는 민족을 외래 기원의 상상의 공동체 의식으로 치부하는 언설에 대해 불만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허구적으로 민족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에 입각하여 하루하루 민족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일본이 물러가자 그에 눌려 있던 전통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유자들의 역사의식에서 국조(國祖)로 받들어진 기자는 단군으로 금방 대체되었다.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이 남한의 범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던 데는 부풀어 오른 민족 감정의 도움이 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하루 밤 사이에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스스로를 민족진영으로 칭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매국세력으로 단죄했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이 좀 더 현명했더라면 충분히 흡수하고도 남았을 수많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동참했다.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의 정신세계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있었다. 1905년 조국을 떠나 40년을 미국에서 지낸 그가 그 기간에 형성, 강화된 민족주의에 물들 계기는 별로 없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글에서 민족은 공산주의자와 일본을 향한 정치적 공세 이상의 특별한 감흥을 내포하지 않았다.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로 순치된 그의 정신세계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세력은 오직 무력으로만 구축될 대상이었다. 그가 평화통일과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처형한 것은 그 같은 정신세계에서였다. 그로 인해 그도 쓰러졌지만, 그 덕분에 이후 40년간 그가 세운 이 나라는 정체성의 큰 혼란을 면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가 이성의 제약을 벗어나 한껏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다. 그에 따라 소중화 역사의식, 일본 오랑캐론, 사회·국가의 혈연원리, 토지기맥설과 같은 전통 시대의 상징들이 민족의 탈을 쓰고 정치, 교육, 문화의 각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그 향도 역할을 했다.

1961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회담에서 한국 대표는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로서 약 20억 달러를 청구했다. 그 중요 근거의 하나는 금 249톤과 은 67톤을 일본이 무단 반출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도 의심치 않은 이 주장은 불행하게도 사실이 아니다.

일정기 한반도의 주요 금광은 미국, 영국, 프랑스 사람의 소유였다. 그들이 대한제국으로부터 취득한 금·은광 개발권은 병합 이후 일본에 의해서도 그대로 존중되었다. 한국 정부의 요구는 실제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에 불과했다.

패전 이후 한국에서 철수한 일본은 남한에만 약 22억 달러의 정부, 회사, 개인의 물적 재산을 남겼다. 당초 미군정이 접수한 그 재산은 이후 대한민국에 고스란히 인계되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한국 정부가 동일 금액의 피해 보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 외교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좋은가.

박정희 정부가 어렵사리 회담을 성사시키면서 청구권과 경제협력자금의 명분으로 받아 낸 3억 달러에 대해 야당과 대학은 더 없이 분노했다. 그들은 집권세력을 ‘제2의 이완용’이라고 매도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같은 한국인의 집단행동의 저변에 흐른 정신사적 동향의 정체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일정 금액의 보상으로 청산해야 한다고 믿은 한국인의 집단정서에는 아직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자리 잡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인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역사의식의 깊은 작용이다. 그 역사의식은 1945년 장흥의 유생 김주현이 “왜노를 두고 사람이라 할 수 없지”라고 한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967년부터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이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전국 토지의 40%를 수탈했다고 쓰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순전한 상상의 산물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27년 뒤 해방이 되었을 때 어느 누구도 내 토지를 돌려달라고 소리친 적이 없었다.

또 역사교과서는 일본이 조선의 쌀을 대량으로 무단 반출했다고 했다. 그것 역시 순전한 공상의 산물이었다. 일정기에 일본에 쌀을 수출한 사람은 주로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였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태연하게 그렇게 쓰고 가르쳤다. 그렇게 지금까지 어린이들의 한숨, 분노, 눈물을 자아내면서 이뤄진 허위의 역사교육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위대한 민족이 탄생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공동선언은 한국 민족주의의 절정을 이뤘다. ‘우리민족끼리’라는 감상적 통일론의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우리 국민들이 어떠한 불안감도 표출하지 않는 데서 잘 드러났다.

국가를 집어 삼키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서유럽과 일본의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국민국가의 형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대개 1970년대까지라고 여겨진다. 그 시대를 주도한 박정희는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서 민족은 영원불변의 혈통이었다. 그에게서 한국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였다. 그는 10월유신을 결행하면서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끝내 반대한 김구의 동상을 세웠으며, 세종과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으로 칭양했으며, 중앙청 앞에다 허물어진 광화문을 재건했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조국 근대화라는 보다 상위의 목표를 위한 실용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민족주의에 잠복한 공상성, 허위성, 배타성이 몰이성의 야만으로 돌출한 적은 박정희가 주도한 권위주의적 이성의 시대에는 한 번도 없었다. 일본과의 갈등은 현명하게 조절되었으며, 한껏의 협력체제가 구축되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그의 시대가 큰 파열음으로 허물어진 1980년대 이후 민족주의의 역할은 달라졌다. 후속하는 집권자들은 하나 같이 민족주의를 정권의 정통적 상징으로 활용했다. 일본과의 역사분쟁이 시작되었다. 독립기념관이 지어졌으며, 중앙청이 허물어졌으며, 독도,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가 뒤를 이었다.

이 거대한 민족주의의 물결이 대학과 언론에 의해 조장될 때, 정치가 속수무책으로 그에 휩쓸릴 때, 대중이 그에 열광하고 몰입할 때, 그 깊은 바닥에 소중화=왜노의 역사인식이 무의식으로 깔렸음에 대해선 더 이상 지적하지 않겠다.

부풀어 오른 민족주의는 이윽고 이 나라의 정체성마저 삼켜버렸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유혈사태가 그 중대 계기를 이뤘다. 1985년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허락되자 그 동안 건국과 산업화의 권위주의 정치에 눌려온 좌파세력이 고개를 들어 짧은 기간에 대학, 출판, 언론을 장악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방치되어 온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정리했다. 남한은 제국주의 미국의 식민지였다. 반민족·친일세력인 지주·자본가는 미국과 야합하여 분단을 초래하면서까지 그들만의 국가를 세웠다. 이후 독재, 부정부패, 대외종속, 불균형의 역사가 펼쳐졌다. 4·19는 그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서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한 민족·민주혁명이지만 5·16의 반동으로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민족·민주혁명세력은 6·3사태, 반독재투쟁, 광주항쟁, 6월 대투쟁을 이끌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주체로 성장했다. 남한의 혁명세력이 마주하는 최대의 적은 미 제국주의다. 북한 주체사상의 지도력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 같은 역사학이 민족문학·민족예술의 풍조와 어울려 1987년 이후 근 20년간 학계, 문예계, 교육계, 언론계를 넘어 정계에까지 넘실거릴 때 건국과 산업화의 정치세력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방관했다. 이 나라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은 완전히 허물어 내렸다. 건국과 산업화의 지성은 허소(虛疎)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2003년 이 같은 현대사 인식이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로 편찬되어 고등학교 역사교실에 보급되었다.

2000년 남북의 정상이 행한 공동선언은 한국 민족주의의 절정을 이뤘다. 남북의 정상은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민족경제의 추구를 통해 민족통일을 이룩하자고 했다. 이후 7년간 민족통일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각종 이벤트가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한반도 기를 펄럭이면서 체육대회를 열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국토를 종단했다.

그것은 한국인이 그의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국가·사회의 혈연주의와 국토신체론의 더 없이 충실한 재현이었다. 분단은 한 몸이 찢어진 아픔이요, 가족이 흩어진 슬픔이었다. 용서, 화해, 이해, 협력만이 그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길이었다.

이 같은 감상적 통일론은 북한의 정치세력이 그들의 국가이성에 충실하여 핵폭탄을 완성하게 된 근자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환상에 불과함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그 환상이 얼마나 완고한지는 지난 수년간 북한이 행한 몇 차례의 핵실험에도 이 나라의 정치와 국민이 어떠한 수준의 불안감도 표출하지 않은 데서 잘 드러났다. 피를 나눈 형제인제, 한 몸의 국토에서 살고 있는데, 그 핵이 어찌 위협이라고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국가는 이해를 달리하는 인간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하는 정당적 이념의 결정체다. 원리적으로 상이한 이념의 두 국가를 평화적으로 통일할 방법은 꿈에서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화통일을 헌법적 가치로 받들고 있음이 현금 대한민국의 국가이성의 주소다. 개성을 통일공단으로, 서해를 공동어장으로, DMZ를 평화공원으로!

그 어찌할 수 없는 환상성과 몰지성은 개인의 자립, 사회의 협동, 국가의 통합이라는 근대문명의 기본 원리에 대한 국민적 자각과 실천이 결여된 가운데 소중화 역사의식, 일본 오랑캐론, 사회·국가의 혈연주의, 국토신체론, 이것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저급의 물질주의, 육체주의가 민족의 외피를 쓰고 이 땅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필연의 귀결이다. 그대로라면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떠할지 짐작하기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은 말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지식인조차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상과 같은 비판에 선뜻 동의하지 않은 것은 민족주의에는 이어갈 만한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한다.

열린 민족주의, 우파 민족주의, 시민적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이고, 닫힌 민족주의, 좌파 민족주의, 국가적 민족주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는 나쁜 민족주의다. 좋은 민족주의는 한국의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이끌어왔고, 앞으로의 선진화와 통일에도 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내가 민족주의에 상이한 두 얼굴이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의 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역사가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 재산권, 시장, 개방과 같은 근대문명의 요소, 제도, 환경을 올바로 보존하고 육성한 덕분이지, 민족주의에 어떤 건설적 요소나 원리가 배태해 있어서 스스로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한 소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같은 나의 주장이 민족주의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지적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두에서 지적한 대로 국민국가 형성의 초기에, 개인의 자립이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단계에서, 인간들이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집단감성의 역할은 대단히 컸고 중요했다.

둘째, 민족주의의 실체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결여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 지적한 대로 민족주의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물려받은 역사의식, 사회원리, 자연이해, 집단심성이 바깥에서 유입한, 높은 수준의, 무언가 신비적인, 민족이라는 근대적 외피로 융합된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그러할진대, 민족주의의 실체적 내용은 나라마다 같지 않았다. 나라마다 전통사회의 형태와 원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민족주의의 역할도 나라마다 같지 않았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근대문명을 지지, 육성한 반면, 중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저지, 해체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민족주의도 개인을 억압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던 한에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80년대 이후 한국사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모든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전(前)근대적이며, 반(反)개인적이며, 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이다.

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민족주의 비판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얼마든지 찬성이다. 역사의 진행은 생각보다 느리며, 수 백 년에 걸쳐 형성된 대중의 집단감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역사의 전환기에, 시간의 흐름이 급한 구비를 이룰 때, 그 집단감성은 나쁜 이념의 오도 하에서 얼마나 무서운 폭력으로 행세되었던가.

그렇다고 비관할 것만도 아니다. 건강한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과 함께 개인, 자치, 자유의 이념이 올바로 교육된다면 불과 한 세대 만에 민족주의의 역사적 역할은 쉽게 그것들로 대체되고 말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