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절대善인가?
‘민족’은 절대善인가?
  • 신중섭 강원대 교수
  • 승인 2016.05.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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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틀 깨기] 이념의 과잉이 빚은 비극

한민족의 DNA에서 민족주의는 상당 기간 동안 약화되지 않을 것. 민족주의의 해악 자각하고, 그것을 약화시켜야

우리 땅과 우리 것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고집은 왜곡된 정치 체제와 경제 제도를 낳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보편적 정치 이념으로 보지 않고 지역적 특수성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상한 형태의 정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고려대 철학 박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그리고 이러한 정당성 뒤에는 항상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한반도의 정세가 일제시대와 다름이 없다는 퇴행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민족’을 내세운다.

지금 우리는 열린 사회, 세계화 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민족’은 이런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방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세상은 변해도 인간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민족’에 대한 선호와 애정은 이념과 종교를 초월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이념 갈등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우리 사회지만, ‘민족’에 대한 애착은 이념을 넘어서 있다. 식민지화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민족, 민족주의를 우리의 동 신앙으로 삼은 것이다.

포퍼에 따르면 민족주의에 대한 신앙은 어리석은 신앙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신앙에는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신화뿐만 아니라 이른바 민족 자결권을 인간의 자연권으로 보는 입장까지 포함된다. 그는 인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까지도 민족 자결권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 자결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요청한다.

“각각의 국가는 민족-국가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자연적 경계선 안에 제한된다. 이 경계선은 한 종족 집단의 소재지와 일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자연적 구역을 결정하고 지키는 것은 종족 집단 즉 민족이어야 한다.” K.R. Popper, Conjectures and Refutations, p.368.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런 민족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자들이 꿈꾸고 있는 ‘민족’(nation)이나 ‘국민’(people)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적 경계선에 의해 구별되는 나라 안에 오랫동안 거주해 온 동질적인 인종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 집단과 언어 집단이 혼재되어 있다. 

민족주의의 위험성

소수 인종이 각각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아일랜드, 인디아, 이스라엘, 유고슬라비아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인종적인 소수 집단은 많은 곳에 존재한다. 포퍼가 제시하는 민족 문제 해결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민족 집단에 대한 억압은 커다란 악(惡)이다. 그러나 민족 자결은 실현가능한 처방이 아니다.” 앞의 책, p.368.

민족자결의 원칙이 하나의 보편적 도덕 원리로 받아들여질 때 문제의 핵심은 감춰지기 마련이다. 이 원칙을 보편적 도덕 원리로 간주하면 그것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비판하기가 힘들다. 이 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와 자연권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와 자연권을 옹호하는 사람을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인간의 존엄한 가치와 자연권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이것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따져보지 않는다. 포퍼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민족주의라는 종교는 강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도덕적으로 선(善)이며, 그리고 실제로 진리라고 열렬히 믿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인 공산주의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듯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민족성에 대한 원칙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은 가장 큰 증오와 잔인함, 무감각한 고통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아직까지도 민족의 억압이라는 비참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앞의 책, p.369.

포퍼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아무 의심 없이 이 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치적 이해가 이 원리와 반대되는 사람들까지도 이 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복거일도 포퍼와 같이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위험성에 민감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는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일이다. 그것은 실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그저 강렬한 것이 아니라 거의 맹목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강렬하지 않은 사회가 있을 리 없지만, 우리 사회처럼 민족주의가 모든 사회 문제들에 대한 시민들의 판단을 뒤틀리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번 경제 위기를 통해 아프게 드러난 것처럼, 생존을 교역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다른 나라들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줄인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행태가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없지만, 지금처럼 모든 문명들이 하나의 ‘지구 제국’으로 통합되는 때엔, 그것은 특히 비적응적이다. 시민들의 애국심이라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우리 사회에 실제로 이로우려면, 거친 민족주의를 길들이는 일이 필수적이다.” 복거일,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문학과 지성사, 1998, pp. ii-iii.  

▲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 사상처럼 역사의 고비에서 민족주의는 힘을 얻어 외세 배격이 애국주의와 동일시된다. 대원군의 외교 정책이었던 위정척사 사상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됐다. 사진은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에서 전멸한 조선군의 시체들.

민족주의가 외세 배격과 맞물리면…

민족주의는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위험한 이념이다. 역사는 너무 거친 민족주의적 열정에 이끌려 합리적 선택을 하지 못함으로써 큰 대가를 치른 경우가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가 미치는 부정적 영향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쉽게 전체주의적 이념들과 결합한다는 점이다. 전체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억압한다. 복거일의 말이다.

“이성에 대해서 본능을, 보다 나은 질서를 향한 합리적 노력에 대해서 역사적 전통의 힘을, 민족들과 나라들의 공통된 바탕과 희망에 대해서 그들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한 독일 민족주의의 영향이 컸던 곳에선 특히 그러했었다. 그런 ‘닫힌 민족주의’는 민족들의 생물학적 또는 역사 결정론을 앞세우게 되어 ‘열등한 민족’에 대한 경멸과 탄압을 불러온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말엽에 세계를 휩쓴 제국주의가 대표적 예이다.” 복거일, 앞의 책, 60-61쪽.

우리 역사에서도 민족주의는 외세를 배제할 때 강한 호소력을 지녀왔다. 역사의 고비에서 외세 배격은 애국주의와 동일시되었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그렇다. 서구 문명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태도는 크게 ‘전(戰)’과 ‘화(和)’로 나누어졌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면 처음에는 경계하고 적대시하기 마련이다. 그 다음 그것의 실제 모습을 파악하고 배척하거나 수용한다. 이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후세의 역사 진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배척하는 쪽에서도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관리들의 정서에 의해 결정된다. 19세기 말 조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에서 계속된 천주교 탄압은 프랑스와의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했다. 유학이 지배하고 있었던 그 당시 천주교는 수용될 수 없었다.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임금도 아비도 없는’ 사악(邪惡)이라고 단정했다. 그 당시 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유교와 천주교와의 정면 대결을 의미했다. 

강재언의 지적처럼 유학자들은 ‘서교’인 천주교와 ‘서학’인 서양 과학을 포함한 학술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서교’와 ‘서학’을 구별하지 않고 한데 몰아 배척했다. 조선 19세기 ‘서학’을 포함한 ‘반(反)서교’는 결국 ‘반(反)서양’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판단은 결국 불운한 우리 근대사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략해 왔을 때 의정부에 친서를 보내 서양 오랑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침을 내렸다. 강재언 지음, 󰡔서양과 조선󰡕, 이규수 옮김, 학고재, 1998년, 215쪽.

①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화친함은 곧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②그 독(毒)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함은 곧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③적이 경성(서울)에 박두했을 때 왕도를 떠나는 것은 곧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 흥선대원군

대원군은 서울의 중심가인 종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양이’의 침범에 대결하여 민심의 결속을 도모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다.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하기 위하여 병인년(1866년)에 지어 신미년(1871)에 세우다.“ 강재언, 앞의 책, 215쪽.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대해서는 ‘전’과 ‘화’의 선택이 있는데 ‘화’를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하기 위하여’라는 확신을 가지고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확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서양세력은 조선 건국이념에 대한 도전

우리 조상들의 ‘반서양’적인 사상은 위정척사 사상에 집약되어 있다. 위정척사란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자는 사상이다. 정학은 공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유교의 학통이다. ‘척사’의 주요한 공격 목표는 천주교였다.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은 대원군의 외교 정책의 이념적 토대였다.

조선의 쇄국양이(鎖國洋夷)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연결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1392년에 유교 입국이라는 건국이념을 표방했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의 침입은 이러한 건국이념에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기독교 국가와 화친하는 것은 왕조의 건국이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1866년 국왕의 자문기관인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기용된 저명한 유학자 이항로가 그 직을 사퇴하면서 올린 글에는 단호한 주전·척화의 주장이 들어 있다. 이항로,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강재언, 앞의 책, 219쪽에서 재인용.

“지금 국론은 교(交)와 전(戰)의 양론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양적(洋賊)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측의 설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것은 적측 사람의 설입니다. 이것(주전론)에 의하면 나라 안의 의상의 구(衣裳之舊, 禮敎)가 지켜지지만, 저것(주화론)에 의하면 인류는 금수의 경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강재언의 지적처럼 그의 주장은 단순 명쾌하다. 조선 사람은 ‘인류’인가 ‘금수’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교’를 택한다면 조선인은 ‘금수’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금수의 경지란 군신 사이의 충도 부자간의 효도 부정하고 인륜도 명분도 없는 세계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이항로의 제자들은 조선 왕조 말기에 가장 강력한 학파였던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위정척사론을 주도했다. 최익현, 유인석은 반일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서양의 공리(功利)를 배우는 부강의 길보다는 유교의 ‘의리’를 고수하는 청빈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의 글에는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덕목으로 숭앙하고 있는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킴(殺身成仁)’, ‘몸을 버려 의로움을 이룸(捨身就義)’,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향에 돌아가는 듯이 여김(視死如歸)’의 의로움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생관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강재언, 앞의 책, 220쪽. 
 
이들에게 있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오직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에 근거하고 있다. 한 왕조의 건국이념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보기에는 의로움의 유일한 근거였다. 때에 따라서는 한 왕조를 넘어 유교 자체에 충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왜 유교를 존중하고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물론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유교를 지킨다고 생각했겠지만,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과 유교가 필연적 인과 관계에 있다는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개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근본을 되돌아보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 구체적인 행복을 떠나 인간다운 도리나 의리만을 논하게 될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에 앞서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어느 시대나 지조라는 이름으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주라는 이름으로 오도되고 왜곡된다.

▲ 정부가 통일을 정치 상품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통일인지를 고민하지 않는 민족·통일지상주의의 담론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족주의의 해악을 자각하고 약화하는 것이다. 사진은 지난해 4월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발족식.

박정희와 민족주의 

박정희 연구의 전문가 조갑제는 박정희의 문법은 항상 동양적 가치관과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했다. 미국식은 교과서가 아니고 참고서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갑제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자 교장실 입구에 있던 두 그루의 버드나무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 이유는 버드나무의 축 늘어진 모습이 군인의 기상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소나무는 토질이 맞지 않았는지 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 체험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사회발전단계가 다른 한국에 이식하려는 것은 착각이다. 토양이 다른 한국 땅에 미국 밀감나무를 옮겨다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는 생각을 박정희가 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조갑제는 하고 있다. 조선일보, 1998년 5월 30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갑제의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박정희의 다음과 같은 글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의 것’, ‘한국적인 것’, ‘한국인적인 것’은 점차 퇴화 소멸하여 가고, 대신 ‘미국적인 것’, ‘서구적인 것’, 그리고 ‘일본적인 것’이 등장하려는 데는 끝없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었다. …우리의 권위, 우리의 존엄성, 우리의 주체성이 이렇듯 자꾸만 거센 ‘남의 것’에 밀리어 마치 풍전등화 격으로 깜박거리고만 있었으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 분노를 분노로 항거한 사람이 있었던가.” 

박정희는 토양론을 정치에 적용한 것이다. 미국의 오렌지 나무가 기후와 토양이 다른 우리 땅에서 미국에서와 같이 오렌지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이 때 우리는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토양 자체를 바꾸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이떤 방식을 택하든 자연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야 한다. 자연 법칙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론을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논리적인 비약의 문제가 따른다. 민주주의와 오렌지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일종의 유비추리다. 그러나 비교하는 두 대상 사이에 유사성이 약하거나 없을 때에는 유비추리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끈다. 박정희의 말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우리 것에 대한 집착은 왜곡된 정치체제 낳을 수도  

우리의 역사발전단계가 미국과 다르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고, 만일 그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하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조건만 성숙되면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민주주의 유보론이다. 

그러나 오렌지와 탱자와의 관계를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는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한 잘못이다. 인간 사회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땅과 우리 것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고집은 왜곡된 정치 체제와 경제 제도를 낳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보편적 정치 이념으로 보지 않고 지역적 특수성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상한 형태의 정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성 뒤에는 항상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통일과 민족주의가 결합되면 

1970년대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도 왜곡된 민족주의이고, 김일성의 ‘주체사상’도 일종의 민족주의다. 두 사람 모두 일제시대를 경험했으니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1968년 선포한 국민교육헌장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해방은 되었지만, ‘민족’과 ‘독립’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는 북한의 민족주의는 더욱 심각하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아직도 한반도에 미 제국주의가 있으니, 미국을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잘 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호소에 경도된 것이 바로 남한의 종북세력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일제시대와 다름이 없다는 퇴행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민족’을 내세운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통일을 원하는 한 민족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단을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상정하는 한 민족은 위력을 가진 언어로 머물게 된다. 그동안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담론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모든 정부가 ‘통일’을 정치 상품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에서 철수해도 통일대박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민족 담론은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민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제시대와 그것을 주도한 일본이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합리적 설명 밖에 있다. 만일 우리가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앞서는 날이 온다면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는 약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먼저 이웃과 선린하는 것이다. 

상당 기간 동안 이 땅에서 한민족의 DNA에서 민족주의는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족주의의 해악을 자각하고, 그것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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