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을 돕자”
“내 힘으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을 돕자”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6.07 14: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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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5)

국가 근대화 앞당기기 위해 각 부처의 장차관들이 참여하는 특별위원회 구성, 맡은 분야에서 십시일반으로 예산 배정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국정(國政)을 시스템화하는 데 성공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박진환은 박정희는 중요한 국사(國事)와 관련된 의사결정의 방법이 언제나 과학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반드시 거쳤다.

▲ 박정희 대통령은 각 부처가 농촌 관련 사업에 십시일반으로 예산을 배정하도록 함으로써 시스템적으로 농촌 근대화를 지웠다.(두 번째가 박정희 대통령)

첫째,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파악한다. 둘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들을 찾아낸다. 셋째, 대안들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낸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돌입하기 때문에 실패가 거의 없었고, 목표 기한 내 프로젝트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늘 이처럼 엄중한 절차를 거쳐 의사결정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대안 중 한 가지를 선택할 때는 효율성과 능률성을 기준으로 정했다. 때문에 국가운영의 질이 파격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운영의 질을 높여 단 기간 내에 근대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새마을운동이다.

후진국 전통경제 하의 농촌은 수많은 전(前)근대적 요인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을 근대화시키려고 할 경우 다른 제약요인들 때문에 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후진국일수록 농촌 근대화는 힘들고 어렵다.

예를 들면 다수확 품종의 벼를 개발했다 하더라도 품종 이외에 벼농사에 필요한 물의 상시 공급을 위한 저수지나, 보, 다목적 댐의 개발, 비료의 공급, 농기계의 보급, 판매 유통을 위한 교통수단의 근대화 등 수많은 다른 요인들도 함께 개발 발전되어야만 다수확이 가능하게 된다.

주민 스스로 일어나도록 부추겨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요인을 동시에 근대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여 패키지 프로그램(Package Program)이라든가 통합적 농촌개발(Integrated Rural Development) 개념들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실천에 옮겨져 성공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후진국일수록 정부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농촌의 전근대적 요인들을 한꺼번에 제거하고 각 분야의 발전을 유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장 극적인 농촌 근대화의 성공 모델이다. 그렇다면 성공 모델의 핵심에서 국가지도자 박정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1970년대 초 우리 농촌의 약 80%는 초가집이었고, 전기가 들어간 마을은 20%도 안 됐다. 마을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절반 이상이나 되어 먼 거리를 지게를 지거나 머리 위에 물건을 얹어 날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는 부산에서 개최된 한해대책 지방행정 기관장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욕이 우러나지 않는 마을은 5천년이 가도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해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나서면 정부에서 조금만 도와줘도 2~3년이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선의 행정 책임자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마을의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지도하고 권장해서 그 사람들이 눈을 뜨고 자기들 스스로가 모여 앉아서 계획을 짜내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을 구분해서 일해 나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 우리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을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길이 없어 십리 밖에서 지게로 짐을 날라야 하는 이런 고장이 발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주민들의 힘으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야겠습니다. 주민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군(郡)이나 도(道)에다 지원을 요청하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힘으로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새마을사업은 전국의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자기 힘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정부의 역할은 농민들이 자기 마을을 근대화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이렇게 정의하고 설계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뒷짐만 지고 서서 구령이나 외치면서 구경만 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전 행정부서의 참여 유도

박정희는 가장 먼저 일선의 군 지방행정들이 지역 내의 소득증대 특별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관련 부서, 즉 농림·내무·상공·재무·경제기획원의 장차관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장을 국무총리가 맡도록 했다. 그는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농촌 개발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관련 부처들이 서로 협조를 잘 해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리고 농촌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해 각 부처가 맡은 분야에서 십시일반으로 예산을 배정하도록 의무화 했다. 내무부는 시멘트와 철골을 전국의 마을에 배급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것들이 마을 주변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이도록 행정지도를 담당했다. 새마을사업이 추진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8년 동안 새마을사업을 위해 정부가 전국의 마을에 지원해 준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 철골은 2.6톤이었다.

1970년대의 한국경제는 시멘트와 철골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자재들을 마을 단위까지 아낌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만약 시멘트와 철골이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해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다면, 외화 부족으로 충분한 양을 마을 단위에 지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공부는 농촌에 전기 가설을 담당했다. 상공부는 한국전력으로 하여금 농촌의 전기보급률을 높이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한 결과 1970년에는 전국의 농촌 마을의 20%에만 전기가 들어갔으나 1977년에는 전국 농가의 98%에 전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통합적 농촌개발의 전형

체신부는 마을 단위에 전화 1대씩을 가설하는 일을 맡아, 100호 정도의 농가들이 1대의 전화를 공동으로 이용함으로써 농촌 주민들의 긴급한 전화 수요를 충족시켰다. 보건사회부는 읍면 단위로 간이보건소를 설치하여 의사와 간호사 1명씩을 배치하여, 지역 농민들에게 1차 진료와 질병 관련 상담, 가족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농림부는 다수확 신품종이었던 통일벼의 보급과 함께 고미가(高米價) 정책으로 농민들의 증산 의욕을 높였다. 게다가 1968년부터 시작된 품목별 주산단지 조성사업의 성과가 1970년대 들어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함으로써 벼농사 이외의 새로운 소득 작목에서 현금소득이 늘어났다. 그 결과 1970년대의 농가소득은 도시 근로자들의 가계소득보다 높아졌다.

이처럼 농민들이 마을 단위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근대화 사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정부 내의 각 부처들이 십시일반으로 소관 부서 예산의 일부를 농촌부문에 배정하도록 시스템화 한 것은 박정희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평소부터 농촌 근대화는 어느 한 분야만 근대화되더라도 다른 요인들이 전근대적일 경우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는 농촌의 실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이 이와 같은 범정부적 참여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 후 농촌 근대화를 위한 패키지 프로그램(Package Program), 혹은 통합적 농촌개발(Integrated Rural Development)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한정된 인력과 예산으로 성공

이처럼 정부 내의 여러 부처가 새마을사업에 참여했지만, 정부 내의 기존 기구와 인원들을 이 사업을 위해 전용했을 뿐 이를 위해 새로운 기구나 인원이 늘어나지 않았다. 또 1970년대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교육도 기존의 공무원교육원 시설과, 그곳에 근무하던 교수요원들이 새마을교육을 위한 교과과정을 추가했다. 때문에 새마을교육을 위한 별도의 비용지출은 많지 않았다.

새마을사업의 직접 비용은 전국의 마을 단위로 정부가 지원해준 시멘트와 철골, 그리고 우수마을에 대해 정부의 포상금이 지급된 것이 전부였다.

전국의 마을에 지원한 시멘트와 철골을 1974년 시가로 환산하면 마을당 연간 250만 원이었다. 이 정도의 투입(in put)으로 마을 주민들이 건설한 콘크리트 교량의 총수는 전국에서 6만 5000개, 마을당 총 2000m의 마을길이 넓혀졌으며, 토지 소유주들은 새마을사업을 위한 부지를 위해 마을당 약 1500평의 소중한 땅을 희사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10년 동안 무보수로 새마을사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 수치는 전국에 있는 3만 3000여 개 마을에서 실시된 전국 평균치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대통령의 지방시찰, 모내기 등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452&mediadtl=9348&gbn=DT&qualit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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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2016-06-09 22:36:58
박정희 대통령 각하, 당신 덕분에 나라와 민족은 가난에서 벗어 났습니다. 5천년 역사에서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신과 영부인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