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청구권자금, 어디에 썼나?
대일 청구권자금, 어디에 썼나?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6.2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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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교서(1964년 6월 26일)

6·3 비상계엄 선포 20일 후 국회에 나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집권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왜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하고 집권의 정당성 당당히 주장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은 숱한 우여곡절과 비상계엄 선포까지 동원되는 극한의 대립을 거쳐 완결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력을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1963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전국민의 ‘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대 거사를 추진한다.  즉 계획적 경제개발을 위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했고, 여기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하기 위해 한일 수교를 적극 추진했다. 

문제는 한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미국의 무상원조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과거에서 우러나오는 민족감정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일본과 손을 잡고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경제개발 자금의 조달을 위해 재개한 한일회담은 야당과 학생,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1964년 3월 6일, 국회 내 야당 의원들이 주동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특위를 구성하고 윤보선, 박순천, 이인, 장택상, 김도연, 장준하, 변영태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특위가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 중단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목포, 마산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여는 등 회담 반대 집회를 개최했다. 

야당과 학생들의 거센 저항 

3월 24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 5000여 명이 서울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들어 최루탄을 쏘며 막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학생들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수상과 이완용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며 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이틀 동안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8만여 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박정희는 3월 30일 서울시내 11개 대학의 학생 대표 11명을 청와대로 초청, 약 두 시간 반 동안 한일 문제에 관해 대화했다. 박정희는

학생들을 “훌륭한 애국자”라고 칭찬하면서 한일 수교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평화선은 우리의 영해인데 왜 양보하는가” 하며 평화선 사수를 역설했고,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를 요구했다. 정부는 다음날 문제의 메모를 공개했다. 

박정희는 또 국민들에게 “한일 수교 협상은 “오직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추호의 사심 없이 진행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악화되는 민심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심 악화를 책임지고 최두선 내각이 총사퇴하고 5월 11일 오전, 정일권 내각이 출범했다. 정일권(국무총리), 장기영(경제기획원), 박충훈(상공), 차균희(농림), 양찬우(내무), 윤천주(문교), 전예용(건설), 오원선(보사), 이수영(공보), 김병삼(원호처) 등 40대가 주축을 이루자 언론은 새 내각에 ‘돌격내각’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돌격내각은 야당과 언론, 학생들의 도전을 정면 돌파하는 강경 드라이브를 걸었다. 또 다시 학생과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했고,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슬로건은 ‘박정희 퇴진’으로  바뀌었다. 이제 한일 수교 회담은 박정희 정권의 운명이 걸린 건곤일척의 승부처로 변했다.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18개 대학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기관 난입을 시도했다. 시위대에 의해 서울 중심부의 경찰서 하나가 불에 탔고, 군 차량을 탈취하여 시가지를 질주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중앙청 울타리를 넘은 학생들이 현관까지 뛰어 들어와 군인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시내 곳곳에서는 화염이 치솟고 최루탄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가히 제2의 4·19를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수교 후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건설 등의 프로젝트에 투입하여 국가경제 개발의 기틀을 구축했다. 사진은 1974년 6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포항제철을 방문한 장면. 박정희 대통령 뒤로 스커트 차림의 박근혜 대통령이 보인다.

6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인내의 도가 넘었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6월 3일 오후 8시,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일체의 집회 금지, 언론 출판의 검열, 서울시내 각급 학교 무기 휴교, 통행금지 개시 시간을 자정에서 오후 9시로 앞당겼다. 

박정희는 박상길 대변인을 통해 계엄령 선포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서 박정희는 “지금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다”고 개탄했다. 그 후 며칠에 걸쳐 352명의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307명이 추가로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한 후 20여 일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64년 6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자진출두하여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교서’를 발표했다. 이날 박정희는 작심한 듯 야당 국회의원과 언론, 학생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집권한 지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반문하면서 자신의 집권이 헌법적으로 정당함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국민 직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앞세워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도 무한정 보장될 수 없다”면서 민주주의의 남용에 대해 정면 도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도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무한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헌법에도 언론 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8년간 선의이건 악의이건 너무나 많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사를 써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영상 수지는 맞추어 왔었는지는 몰라도 국가 사회에 유익한 일만 해 왔다고 단언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신문이 너무 과하다’ 하면서도 아무도 감히 입을 벌려서 큰 소리로 그것을 시정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과 언론의 무책임한 자유, 왜곡된 자유, 과잉된 자유를 방치한다는 것과는 스스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타기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를 규제할 의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갈한다. 

“우방의 원조도 한정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원토록 우리는 외원에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자립이 없다면 진정한 독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배타주의도 아니요 고립주의도 아닙니다. 우방들도 우리의 자립을 위하여 원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고의로 곡해하여 민족정신의 혼란을 획책하고 반공 태세를 문란케 하고 있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 거리를 나가면 그것이 이북방송이 아닌가 귀를 의심할 정도의 소리가 들렸으니 이러고야 무슨 반공 태세 완비라 하겠습니까? 그것을 분격하는 마음 어찌 난동군인만의 잘못이겠습니까? 

군인이나 학생이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나 위법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것이 국민의 소리인 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조금이라도 소홀이나 불공평이 있다면 기탄없이 규명해 주기 바랍니다.” 

대일 청구권자금 어디에 썼나?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부 자금 마련을 위해 내린 한일 수교를 가로막는 정치인,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계엄이라는 또 한 차례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 결과 일본으로부터 총 8억 달러에 달하는 대일청구권 자금 확보에 성공했다. 

사실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자금은 일제하에서 숱한 희생과 고통을 당한 전 국민의 피와 같은 돈이었다. 박정희는 과연 이 돈을 어디에 썼을까.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 국가 지도부는 청구권자금을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고, 다음 세대 후손들에게까지 기념할 만한 사업을 넘겨줄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투자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과 원칙을 수립했다. 

그 결과 1966년부터 1975년까지의 10년 간 청구권자금의 집행 실적을 종합 정리하여 기록을 남긴 것이 『청구권자금백서』(1976.12)다. 이 백서에 의하면 포항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무상 3억 달러 중 3080만 달러(무상 자금의 10.2%), 유상 2억 달러 중 8868만 달러(유상 자금의 44.3%) 등 총 1억 1948만 달러를 투자했다. 

포항제철 건설이야말로 1970년대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공작기계공업, 산업기계공업은 물론 자동차·선박, 전자공업에서 요구되는 소재와 중간재의 자체 공급이 가능해짐으로써 한국의 공업화 수준을 크게 업그레이드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도 일본의 청구권자금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또 전 국토 종합개발사업의 상징인 소양강댐 건설도 총 소요자금 2161만 3000달러 전액을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 공사기간 무려 6년 반(1967.4~1973. 10)이 걸린 아시아 최대, 세계 4위 규모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 조절기능, 한수해(旱水害) 예방, 생활용수와 농공업용수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만약 그 당시 국가지도부가 포퓰리즘적 정책에 의거, 일제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얼마씩 나눠줬다면 그 돈은 모두 생활자금으로 소비되고 말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전 국민의 피와 바꾼 청구권자금을 전 세계의 전문가나 국내의 야당, 학생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거의 70% 가까운 자금을 투입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수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곳에 호기롭게 투자할 수 있었을까? 

때문에 박정희는 ‘한강의 기적’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어째서 ‘기적’이냐고 반문했다. 우리의 피땀 어린 노력을 어떻게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응당 하늘이 우리에게 돌려줘야 할 ‘노력의 대가’라고 그는 믿었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교서’(1964년6월26일)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366&mediadtl=2874&gbn=DH&quality=M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교서(1964년 6월 26일)

6대 국회 개원 이래로 여러분은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매양 국사에 심혈을 경주하여 오시다가 최근 비상시국 하에서는 더욱 노고가 많으실 줄로 알고 충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오늘 나는 자진하여 여러분 앞에 나와 여러분과 그리고 국민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평소에 반성하고 열망하고 호소하고 싶던 바를 솔직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늘 나의 이 호소가 여러분과 더불어 이 난국을 수습하는 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이상의 다행한 일이 없을 줄 믿습니다.

과거 혁명정부 때나 더우기 제3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조국과 동포의 재건과 복지를 위한 터전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일념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마는 부덕한 소치로 만사가 쉽사리 여의치 아니하였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의욕의 과잉으로 무리한 시책을 강행한 나머지 다소간 민심과 유리된 바도 없지 않아 있었고, 혹은 본의는 아니었으나 경험의 미흡으로 뜻 아닌 결과를 초래한 것도 있고 하여 돌이켜 보건대 한없이 자책의 심회를 금할 수 없습니다. 또 겹쳐서 아래 사람들이 저지른 유감스러운 일들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임을 생각할 때 송구스러운 마음 더욱 금할 바 없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러한 결과적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는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작년과 재작년은 큰 흉년이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그 나라 전반의 정책 변경으로 자꾸 줄어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우리는 전력과 비료와 양회와 정유 등 수많은 공장들을 건설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충도 많았습니다. 틀림없이 본의 아닌 실수도 있었습니다. 정녕 나대로는 성력을 다하여 한다는 일이 결과는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났던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둔사도 변명도 아닙니다. 정말 이것이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명분이 서는 말이 되겠습니까? 다만 솔직한 고백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한일문제만 하더라도 나는 급변해 가는 국제정세에 대비하고 또 국가이익을 위한 경제협력과 국제적 지위향상을 위하여 빨리 타결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추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세니 굴욕외교니 사전수수니 하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말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놀라움과 함께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 신명을 나라에 바친지라, 따로 나에게 그 어떤 사심이 있을 수 있으며, 또 그렇다 하여 이를 어찌 내 입으로 표시할 수야 있겠습니까?

국민여론의 뒷받침을 소홀히 하고 남도 내 마음이려니 믿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른 것이 결국 도화선이 되어 3·24 학생데모가 일어났고, 그것이 2개월여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드디어 5·20 데모로 부터는 점차 그 성격이 변질되어 끝내는 6·3 난동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도 나는 비상조치 없이 순탄하게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만 되어가 할 수 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심경과 그 고충은 이미 계엄선포에 즈음한 나의 담화를 통하여 충분히 밝힌 바 있습니다.

세간에는 그것이 지나친 조치다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비는 고사하고 적어도 그 때 그러한 비상조치를 취하지 아니했더라면 사태는 정녕 걷잡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이르렀느냐, 그 원인은 정부에 대한 불신에 있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는 재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이 불신을 불식하는 데 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획득하는 데 있다, 주권자의 신임을 만회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의 말이 지당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정부가 불과 6개월 만에 어찌하여 이렇게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였는가, 과연 국민이 현 정권을 타도한 의사가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떠한 정권이 수립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정권인가, 나는 여기에 대하여 깊이 생각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의원 여러분! 어떠한 주장도 헌정수호에 으뜸가는 주장이 있을 수 없다는 자신에 나는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에 말한바 책임을 통감하여 과거를 반성할 단호한 결의로써 시정 전반에 걸친 일대혁신을 단행하고 있으며, 또 내가 영도하는 당도 국민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편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여야 협조분위기 속에서 초당적 외교와 초당적 경제재건을 위하여 정부·국회 그리고 여당·야당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국민의 희원을 충족시키는 데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또 여러분은 국정감사를 통하여 모든 부정과 부패의 독소를 조사 공표하시어 법은 법대로 도의는 도의대로 그 책임을 추궁하시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나는 양심을 속여 가면서 국민과 여러분을 기만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나는 이 비상계엄을 하루빨리 해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계엄이라는 것은 너무나 쉽게 폈다 거두었다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는 이번 이 비상계엄이 마지막 계엄으로서 이를 해제했을 때에는 다시는 계엄을 펴야 할 사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보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비상사태를 겪어야만 했던가 하는 사태발생의 원인과 근인을 소상히 분석 검토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우려하여 마지않는 것은 학원의 과잉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순진한 학생들이 그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정치 현실에 참여하려고 하든지, 심지어 난동에까지 이르는 추태를 연출하든지 하여 국민의 안녕질서를 파괴하고 외적을 유입하는 위기를 조성하여도 여기에 하등의 대책이 없다면 어찌 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겠습니까?

과연 이 나라는 누가 정치를 하는 것인지, 정부는 날마다 밤마다 학생 데모를 막기에만 급급하고, 국민들은 불안의 도가니 속에서 한숨만 쉬고, 이것은 학장도 교수도 막을 수 없다. 학부형도 학자모도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정치인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국회의원은 그 데모가 의사당 앞에 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다른 국회의원은 그것을 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실정 하에서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안심하고 정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절대로 나나 이 정부를 본위로 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을 하는 교육자나 교육을 받는 학생이나 크게 반성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는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5·20 데모나 6·3 사태 같은 것이 정말 애국운동이라고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불순하고 불투명한 구호들은 정녕 의심스러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대로 방치해야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결코 학생 전체를 불신하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데모대에 참가하여 일시의 흥분으로 돌을 던졌다.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반드시 주동자로 규정하여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상 그러한 학생들은 이미 석방된 지 오래입니다. 학생들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관용을 베풀지라도 다른 선량한 학생들에게 누를 끼치는 학생이라면 일벌백계주의로 법대로 다스리자는 것입니다.

학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근본문제이기는 하지만 입법으로 이를 보호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지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또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도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무한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헌법에도 언론 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언론이 없는 시간부터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요, 언론의 창달여부는 문화의 척도가 된다는 것도 진실이지마는 세상에는 신문이 나라를 망쳤다는 소리도 있고 이 사회의 혼란은 신문도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다만 하나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8년간 선의이건 악의이건 너무나 많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사를 써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영상 수지는 맞추어 왔었는지는 몰라도 국가사회에 유익한 일만 해 왔다고 단언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신문이 너무 과하다’ 하면서도 아무도 감히 입을 벌려서 큰 소리로 그것을 시정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과 언론의 무책임한 자유, 왜곡된 자유, 과잉된 자유를 방치한다는 것과는 스스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타기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를 규제할 의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언론의 육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이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므로 언론의 횡포는 자유민주주의를 빙자하여 만성화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중의 국가로서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할 여건들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언론의 창달이 없으면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원칙이 인정된다면 어찌하여 그 횡포를 규제하는 조치가 양성화될 수 없다는 것이겠습니까?

나는 소위 많은 선진국가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양성화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극히 소극적인 것이요 오히려 언론 자체의 맹성이 있기를 바라는 생각이 나의 적극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소극적인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할 실정은 결코 아닙니다.

언론만의 자유로 인해 국민 대중의 자유나 국가 안전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신인 것입니다.

경애하는 의원 여러분!

지상에서나 항간에서 정쟁을 지양하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음을 나는 듣고 있습니다.

여야가 구별 있는 제도 하에서 어느 정도 정쟁이란 없을 수 없는 것이오, 오히려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왜 이 정쟁 지양을 희망하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정당한 비판이 없고 정책적 논쟁이 없다면 독재정치에 흐르고 말 것이며 국회의 기능은 마비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6대국회가 개원 이래로 거의 공전되고 말았다는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쟁에 기인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신임을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도 국민의 신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부와 국회는 헌법상 대립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그 임무를 존중하고 긴밀한 연대관계를 보지해야만 국가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6대국회의 상임위원회 중심의 운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다방면의 개선이 있기를 갈망하는 바입니다. 그 때문에 국민에게 정쟁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를 희구하는 것입니다.

재론할 것 없이 정권의 평화적 교체는 자유민주국가의 지상과업이라고 믿습니다. 학생의 데모나 혹은 무력으로 인하여 또다시 정변이 일어난다면 국가의 장래는 진실로 염려되는 바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런 말을 할지라도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을지 모르나 그러므로서 더욱 나는 한사코 평화적 교체를 실천에 옮겨서 국기를 공고히 하여야 한다는 사명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일을 망상하는 자세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어찌 진정한 정국안정을 기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과 마찬가지로 군의 엄정중립과 정치불개입은 헌정수호에 절대요건이 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상계엄해제에 관해서는 그것을 선포할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조속히 해제되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을 명확한 보장과 대책이 선행됨이 없이는 계엄해제만이 아무런 시국수습의 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의견이 멀지 않아 여러분께 개진될 것입니다. 물론 나도 입법만능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써 혹은 무력으로써 국민을 탄압한다면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6ㆍ3사태 같은 것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선정하는 것이 가장 근본대책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도 이 시기에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정부 자체가 솔선하여야 하고 나아가 일반사회에서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전을 기하더라도 오히려 절대의 보장이 어렵거늘 하물며 그것을 등한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깊은 이해와 많은 협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빨리 해제할 수 있는 적기가 올 줄 믿습니다.

최근 나는 여야시국수습협의회의 성과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히 그것이 중도에서 협상의 결렬을 보게 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원칙은 자유와 평등과 협조인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은 우리의 권리로되 협조는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하기는 쉬우나 의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와 인내와 양보로써 이 의무를 수행하여야 할 줄로 압니다. 더구나 여야 협조 없이는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없고, 또 국회의 기능도 발휘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조속히 그 협상을 재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국수습협의회의 그 간의 경과를 보건대 여야 공히 많은 안건들을 내어 진지하게 토의하고 개중에는 협상이 상당한 진전을 본 바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협상을 재개하여 여러분들의 초당적 애국심으로써 이러한 안건들이 여야의 합의점에 도달하기를 간곡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나 이 정부 그리고 온 국민이 협상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상 나의 소신을 피력한 바가 그 표현이 매우 불충분하고 이론상 모순된 것과 또는 애매한 것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마는 나의 충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권자인 국민에게 대하여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선서한 바 있으나 앞으로 임기 동안에 조국의 근대화 특히 경제재건과 민생문제해결,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 및 우방과의 유대강화 등 문제에 관하여는 초당적인 태세로 기어이 이를 성취시키고야 말겠다는 나의 소신에 지금도 또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을 다시 다짐해 두는 바입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반공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반공민주국가인 것입니다. 어떠한 이론 어떠한 형식으로도 공산주의는 물론 그 중간세력과도 타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국민 전체가 이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매진해야만 승공의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제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휴전선을 방어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유민주우방과 더불어 반공 보루의 선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립하는 날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방의 원조도 한정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원토록 우리는 외원에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자립이 없다면 진정한 독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배타주의도 아니요 고립주의도 아닙니다. 우방들도 우리의 자립을 위하여 원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고의로 곡해하여 민족정신의 혼란을 획책하고 반공 태세를 문란케 하고 있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 거리를 나가면 그것이 이북방송이 아닌가 귀를 의심할 정도의 소리가 들렸으니 이러고야 무슨 반공 태세 완비라 하겠습니까? 그것을 분격하는 마음 어찌 난동군인만의 잘못이겠습니까?

군인이나 학생이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나 위법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것이 국민의 소리인 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조금이라도 소홀이나 불공평이 있다면 기탄없이 규명해 주기 바랍니다.

의원 여러분!

나는 다시 다짐해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계엄을 하루빨리 해제해야 한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일은 계엄을 해제하더라도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과 대책의 강구인 것입니다.

이러한 보장과 대책의 강구 없이 무작정 계엄만 해제한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시국수습방안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결과적으로 6·3 사태의 그 옛날로 되돌아가고야 말게 될 것이라는 나의 예언을 의원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입니다.

의원 여러분들의 시국 수습을 위한 현명한 판단과 그리고 과감한 조치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분의 건투와 6대국회의 발전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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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 2016-06-28 21:48:57
지금의 시국도 그러하지만 시궁창같은 미개한 한국에서 박정희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위대하신 최고 존엄 김정운 동지 만세! 부르며 소리소문없이 쥐도새도 모르게 보위부에 끌려가 교화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