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미안해! 내가 임자를 죽였어”
“임자, 미안해! 내가 임자를 죽였어”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7.01 03:1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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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6)

“김학렬 부총리 별세” 소식을 접한 박정희는 조용히 회의장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짐승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종합제철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학렬을 너무 혹사시킨 나머지 국가 인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책의 눈물이었다

박정희, 그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었을까. 인간 박정희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몇몇 단서들이 지인(知人)들의 회고를 통해 발견된다. 

1961년 박정희가 국가 근대화를 하겠다며 한강을 건넜을 때의 나이는 44세, 1963년 윤보선과 맞섰던 대통령 선거에서 “황소처럼 일하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당선된 박정희의 당시 나이는 46세.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최연소였다. 

호주가(好酒家), 의리의 사나이… 

패기만만한 박정희는 그야말로 황소처럼 일했다. 그는 개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철저한 힘의 분배를 통해 조국 근대화의 선봉에 서도록 했다. 때에 따라서는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둘러 목을 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혁명 동지였던 이석제(총무처장관·감사원장 역임)는 박정희가 권력의 전부를 국가발전에 투입했다고 증언한다. 중앙정보부 같은 파워 집단도 결국 국가건설을 위한 필요성에 의해 창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유형은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이며 면도날 같은 성격이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주가(好酒家)요, 의리의 사나이였으며, 도량이 큰 사나이였다. 

작고한 시인 구상이 박정희의 절친이었는데, 원래 구상은 박정희의 군 시절 상관이었던 이용문(초대 기갑단장, 수도사단장 역임. 이건개 변호사의 부친)과 친구 사이었다. 

구상이 어느 날 이용문의 사무실로 놀러가니 얼굴이 새까맣고 카랑카랑하게 생긴 사나이가 와 있었다. 이용문이 박정희를 구상에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의리의 남아야.” 

이후 박정희와 절친이 되어 세상과 국가를 논하는 사이가 된 구상은 박정희를 이렇게 평했다. 

“박정희를 품을 만한 그릇이 대한민국에는 없어. 허허!” 

박정희는 한편에서는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타도하는 비장한 면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정이 많고, 눈물이 흔한 사내였다.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가 12월 10일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을 찾아가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문했을 때의 ‘대통령의 눈물’ 장면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박 대통령 일행이 탄광 강당의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마지막 소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에 이르렀을 때 참석자들 모두는 목에 메이고 눈물을 쏟아내느라 노래가 중단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64년 12월 서독 방문에서 함보른 탄광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박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함보른 탄광에서의 눈물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준비했던 연설 원고를 밀어내고 즉설 연설을 시작했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더 이상의 연설은 불가능했다. 울음소리가 차츰 더 커지기 시작했고, 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육영수 여사도, 수행원도, 심지어 단상 옆에 서 있던 뤼브케 대통령까지도 울었다. 연설은 어느 대목에선가 완전히 중단됐고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함보른 탄광을 떠난 박정희는 차 안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나란히 앉은 뤼브케 대통령이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칠순 노인인 뤼브케 대통령이 사십대 후반 젊은 대통령의 눈물을 직접 닦아줬다. 그리고 우정 어린 격려를 했다. 

“울지 마십시오. 꼭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해서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박정희가 “나의 경제 과외선생”이라 부르던 김학렬을 경제부총리로 임명한 것은 필생의 작품이라 여겼던 종합제철소, 즉 포항제철의 건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김학렬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포항제철을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불살랐다. 천하의 욕쟁이 김학렬은 부총리 취임 때 자신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칠판에 ‘종합제철 건설’이라고 커다랗게 써 놓고는 틈만 나면 부하들을 닦달했다. 

“네놈들 가문의 영광이니 다른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알간? 해가 떠도 종합제철, 달이 떠도 종합제철만 생각하다 일이 안 되면 한강에 빠져 죽어!” 

▲ 박정희 대통령은 불굴의 의지로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부쳐 성공했지만, 김학렬 부총리의 부고를 듣고 대성통곡할 정도로 속정이 깊었다.

“임자, 미안해! 내가 임자를 죽였어” 

김학렬은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매달리다 결국 온몸에 암이 퍼졌다. 1970년 봄, 김학렬이 심혈을 기울였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종합평가회의가 중앙청에서 진행되는 중간에 대통령에게 메모 한 장이 전해졌다. 메모에는 “김학렬 부총리 별세” 라고 적혀 있었다. 박정희의 고개가 푹 꺾였다. 

회의를 계속할 것을 지시한 박정희는 조용히 회의장을 빠져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박정희는 “임자, 미안해! 내가 임자를 죽였어”를 외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는 종합제철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학렬을 너무 혹사시켰고 술도 많이 먹였다고, 제1회 행정고시 수석합격자인 국가의 인재를 49세의 한창 나이에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짐승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1973년 7월, 대한민국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건설한 포항제철이 드디어 준공식을 가졌다. 박정희는 종합제철에 목숨을 바친 위대한 장수를 잊지 않았다. 준공식 기념 연설에서 박정희는 부하 김학렬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1970년 봄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과 함께 기공식 버튼을 눌렀는데,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1969년 12월 말,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7개월 앞둔 시점에 대구~부산 고속도로 부분 개통식이 열렸다. 박정희는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전쟁 지휘관처럼 고속도로 관계자들을 지휘했고, 틈만 나면 지프와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헬기를 타고 현장에 가다 여러 번 추락 위기를 맞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하는 고속도로였기에 심적 부담도 컸을 것이다. 충북 옥천 구간의 당재터널(현 옥천터널) 건설 현장은 난공사 중의 난공사라서 많은 근로자가 작업 도중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는 효율적인 작업 진행을 돕고, 현장 감리를 철저히 하기 위해 젊은 공병장교 수십 명을 선발하여 현장에 투입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현장을 관리 감독하고, 애로 사항을 도우라는 지시였다. 

대구~부산 부분개통식 행사를 마친 박정희는 수행원들로부터 서울서 준비해 간 샴페인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개통된 고속도로 위에 서서 샴페인을 여기저기 고루 뿌려줬다. 

날씨가 몹시 추웠던 그날, 검은색 코트 차림의 박정희, 오른손에 샴페인 한 병을 쥔 채 이제 국가적 대업이 거의 성사되어가고 있다는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작업 현장에서 순직한 근로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도로를 성공시킨 박정희. 그는 샴페인을 고속도로에 뿌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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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2021-06-02 21:42:47
눈문이 앞을 가린다.. 하하하

Duke W. Koo 2016-07-03 06:00:45
눈물을 적시며 끗까지 읽엇다 ! 국민 연 평균 수입 , 지금의 40분의1 도 되지않는 당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때문이다 . 박정희 님 고맙씁니다 ! 명복을 빕니다 !
따님 박근혜 의 분투를 지켜봐 주십시요 ! 결코 성공해 낼것입니다 .

갈천 2016-07-02 21:05:56
김학렬 전부총리(청와대비서실:38)
[중앙일보] 입력 1991년 08월 09일


◎박 대통령 “내가 당신을 죽였네…”/회의도중 부음받고 통곡/“일에다 술로 혹사시켰어”/3공전반 경제개발 견인차… 5·16전부터 비밀스런 인연/박 대통령 김씨집서 “경제공부”/새벽 2시에 찾아가 밤샘 일쑤

갈천 2016-07-02 21:05:02
1.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부총리의 죽음에 애통해 한 이유는, '미안해! 내가 임자를 죽였어”를 외치며 꺼이꺼이 운 이유는, 김학렬이 포항제철을 추진하다가 죽었기때문이 아니지요.
2. 그는 5.16쿠테타 이전부터 박정희의 경제 과외 선생을 했던 인연이 있으며, 박대통령이 그를 친구처럼 여기고 술을 엄청 퍼먹이고, 가혹하게 부려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