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의 총칼을 구호만으로 막을 수는 없다”(박정희)
“침략의 총칼을 구호만으로 막을 수는 없다”(박정희)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7.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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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7·4 남북 공동성명(1972년 7월 4일)

“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강탈하거나 말살하려는 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969년 1월,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을 무렵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에 투입된 미군이 무려 53만 8000명에 이르렀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화력과 병력, 엄청난 전비(戰費)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게릴라 전술로 맞서는 월맹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등의 1970년대 남북 대화는 양측간 긴장 해소뿐만 아니라, 심각한 안보 위협 상황을 극복할 생존전략을 모색할 시간 벌기 차원이기도 했다.

반전(反戰)여론의 역풍을 맞은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탈출구를 모색한다. 미국 외교의 사령탑이었던 키신저는 ‘아시아 안보의 아시아화’라는 전략을 꺼내들었다. 이런 전략 구상은 취임 6개월 후인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이 괌에서 백악관 출입기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밝힌 ‘닉슨 독트린’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닉슨은 아시아 우방국들이 핵보유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핵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인도지나 반도는 ‘민족주의적 해결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베트남에서 싸우다말고 파리에서 엉터리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 철수했다. 자신들이 지지하던 티우(월남)를 팽개치고 베트남을 포기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정책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of the Vietman War)’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스스로 알아서 지켜라

다음 수순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였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는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한국에 주둔 중이던 주한미군을 빼내가면서 “군사 지원을 해줄 테니 스스로 알아서 지키라”고 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당시 북한의 대남(對南) 도발이 그 어느 때보다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혈맹(血盟)’을 자처하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에 근본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한미상호조약 제3조는 “미국은 공동의 안보 위협에 대해 헌법절차에 따라 대응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의회 분위기로 볼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했을 경우 미 의회가 대통령의 지상군 투입 요청을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포터는 미 의회 청문회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고 증언했다.

1971년 초부터 미국은 ‘새로운 중국’ 정책을 채택하여 중공이 유엔 의석을 차지했고, 대만은 유엔에서 축출되었다. 1972년 2월 닉슨은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반공국가인 대만을 버렸다.

1971년 3월 주한 미 7사단 철수가 완료되었고, 북한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이른바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을 해온 미 2사단이 휴전선을 떠나 후방에 재배치됐다. 이것은 6·25 이후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상 가장 중대한 변화였다.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핵심 측근들에게 설명했다. 다음은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박정희의 발언이다.

“필요할 때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해야”

“오늘의 비상사태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평화체제에는 적지 않은 취약점이 내포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강탈하거나 말살하려는 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침략의 총칼을 자유와 평화의 구호만으로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응분의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하고 이에 대처해 나가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박정희는 이 무렵 미군 철수와 김일성의 무력도발로부터 국민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체제 경쟁을 위한 경제발전도 한시도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금이었다. 더 이상 겉치레 민주주의를 위해 고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각한 안보 위협 상황에 직면한 박정희는 우선 자주국방과 새로운 생존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 남북 간에 긴장 해소를 위해 대화에 나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 발표 1개월 후인 1971년 8월, 박정희는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적십자 회담을 북한에 제의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성사된 남북 적십자회담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헛돌기만 했다. 북한이 회담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답보상태에 빠진 회담이 급진전을 이룬 것은 1972년 5월 2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잠행 덕분이다.

이후락 부장은 서울로 돌아오기로 약속된 5월 4일 0시 30분, 자다 일어나 김일성 면담 소식을 들었다. 이후락은 영문도 모른 채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 칠흑 같은 밤에 산길을 달려 모처에서 김일성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문제는 이날 이후락-김일성 회담에서 “우리 민족까리라면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은 문제 삼지 말자”는 김일성의 발언을 덜컥 받아들여 통일 3원칙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외세를 배격한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자”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시인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7·4 남북공동성명의 문안에 대해 보고하자 박정희의 반응이 싸늘했다. 이후락이 들고 온 내용은 북한의 인민회의가 공식으로 채택한 ‘평화통일 3대원칙’을 그대로 받아 쓴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었다.

이후락의 평양 잠행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1972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일행이 서울을 방문했다. 박정희는 박성철과의 대화에서 외세 배격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정면에서 반격했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 상비군을 줄이고 서로가 건설에 힘을 쏟는다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스탈린 거리니 붉은 군대니 하는 말을 쓴다는 얘기를 듣고는 북한이 소련의 속국이 된 줄 알았다. …나도 여건이 성숙되면 김일성 주석과 만나겠지만 지금은 아직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 불신의 해소와 같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지금 만나봤자 오히려 만나지 않은 것보다 못할 것이다.”

박정희는 남북대화의 목적이 전쟁 재발의 방지인 이상 굳이 정치 문제로까지 판을 벌일 필요는 없으며, 인도주의적 접촉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쌍방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평화통일 원칙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어 남북한은 ①긴장상태 완화, 상대방 중상비방 중지 ②무장도발 중지,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 합의 ③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 실시 ④적십자회담 성사 적극 협조 ⑤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 개설 ⑥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운영 ⑦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 등을 약속했다.

확고부동의 대한민국 통일방안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고위급 회담인 남북조절위원회가 발족되고 남북 대표들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적십자회담 본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북측 대표단은 회의 때마다 회담장을 공산체제 선전장으로 만들었다.

북한 측의 윤기복 대표는 전국에 생중계되는 적십자회담 본회의에서 “이산가족 재회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남한 당국이 반공법을 철폐하고, 반공정책을 취소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발언과 김일성 찬양을 마구 해댔다.

그들은 또 남북 간에 긴장을 해소하고 신뢰 구축을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 철수, 남북한이 각각 10만 명 규모로 군대 축소,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을 주장했다.

박정희는 1973년 1월 23일 국토통일원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통일 방안은 시종일관 불변의 원칙 그대로 남북한이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이것이 통일과 관련된 대한민국 정부의 불변의 원칙이라고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이다. 이것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책이었고, 민주당의 장면 총리도 이를 승계했으며, 박정희도 이어받았다.

즉 남북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로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력을 배양하여 이를 토대로 남북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해 북쪽을 평화적으로 흡수통일 한다는 결의가 건국 초기부터 이심전심으로 합의해 온 통일정책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통일 방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의 동의도 없이 6·15 선언을 통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론을 내세워 국론 분열을 몰고 왔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7·4 남북공동성명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gbn=DH&mediaid=819&mediadtl=6926&qualit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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