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대통령’ 깍듯이 예우하는 미국인들
‘퇴임 대통령’ 깍듯이 예우하는 미국인들
  • 이상민 기자
  • 승인 2016.07.1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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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행복한 미국의 퇴임 대통령들

퇴임 후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공항·도로·건물·군함 등에 역대 대통령 이름을 붙여 국민들 머릿속에 살아 있도록 교육  

워싱턴=미국에서 매년 2월 셋째 주 월요일은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이다. 연방 공휴일인 이날은 원래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생일인 2월 22일에 ‘조지 워싱턴의 날’로 지켜졌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 대통령 못지않게 존경받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생일이 2월 12일이라는 점을 감안, 링컨 대통령도 같은 2월에 함께 기념하자는 취지에서 미 연방정부는 매년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대통령의 날’로 정하고 함께 기념하고 있다. 

이날 미국인들은 건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노예를 해방하고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며 미국을 하나로 지켜낸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도 기억하고 있다. 

조지 워싱턴 후 지금까지 43명이 미국 대통령으로 미국을 이끌어왔다. 이들 퇴임 대통령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언론과 각종 여론조사 기관들은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 누구냐는 여론조사를 자주하여 그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공영방송들은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진단하는 방송들을 계속 제작해 내보내고 있다. 

일반 미국인들에게 “퇴임 대통령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질문하면 퇴임 대통령이 재임 시절 펼친 정책들을 기준으로 답한다. 뉴욕에 거주하는 공화당원인 매튜 메이나드는 “나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후 어지러운 세계를 신중하게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당시 채택한 장애인보호법은 정말 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민주당원 캐런 로크는 “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경제를 살려냈고 중도적 입장으로 국가 통합을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부분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당을 기준으로 좋아하는 대통령을 밝히고 있는데, 공통점은 재임 중 잘못한 정책들이 있어도 이것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사실상 세계 대통령으로서 미국과 세계를 이끄는 막중한 임무를 마친 퇴임 대통령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도로, 공항, 건물, 군함 등에 퇴임 대통령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퇴임 대통령을 예우하고 기념하는 대표적인 예다. 워싱턴 DC를 보자. 차를 타고 버지니아에서 포토맥강을 따라 워싱턴 DC로 가는 길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고속도로다. 

▲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 동남아 쓰나미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左) 저소득층에게 무료로 집을 지어주는 활동을 하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中).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 고있는 조지W.부시 전 대통령(右).

역대 대통령 이름을 딴 도로·공항·군함… 

이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미 중앙정보부(CIA) 국장을 역임한 41대 대통령인 조지 H.W. 부시의 이름을 따서 지은 CIA 센터와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이름을 따라 지은 빌딩을 지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의 이름을 따라 지은 레이건 공항에 도착한다. 

레이건 공항에서 뉴욕 행 비행기를 타면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케네디 공항에 내리게 된다. 

43대 대통령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금 살고 있는 텍사스의 공항에 내리면 그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있는 조지아 애틀란타에 가면 주요 간선도로는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잠수함 등에는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 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 등 퇴임 대통령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퇴임 대통령들의 이름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처럼 미국에서 살다보면 한국과는 달리 대통령과 일반 미국인들 간에 벽이 높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워싱턴 DC 한복판에 있는 백악관은 한국의 청와대와 같이 삼엄한 경비 가운데 있어 근접할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엄격한 경비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길을 걸어가다 쉽게 다가설 수 있다. 백악관 북쪽의 라파에트 광장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사진을 찍거나 간혹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이곳에서 백악관은 코앞이다. 

백악관 남쪽은 백악관 정원 때문에 거리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정원을 둘러싼 담장에서 백악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간혹 이 담장을 뛰어넘어 백악관에 무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백악관은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하고 있어 매년 10만 명가량이 백악관을 방문하고 있는데, 4개월 전에 신청해야 원하는 때에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백악관 방문은 큰 인기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이 되면 대통령들은 퍼스트레이디와 함께 어린이들을 초대해 달걀 굴리기, 칠면조 풀어주기, 크리스마스 트리 점화식 등을 함께 한다. 백악관을 방문하는 어린이, 청소년들 뿐 아니라 일반 성인들과 대통령이 포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통령들은 심야 토크쇼 등에도 가끔 출연해 농담을 하며 일반 미국인들에게 다가서기도 한다. 

퇴임 대통령들의 공통점 

미국 대통령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다 퇴임하면 이들은 어떤 생활을 할까? 현재 생존한 미국의 퇴임 대통령들의 생활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2016년 6월 현재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91세), 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92세),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69세),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69세)가 생존해 있다. 

이들의 퇴임 후 생활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첫째, 취미활동을 하며 쉰다. 둘째, 회고록을 쓴다. 셋째, 자신의 재임 중 업적으로 정리한 대통령 도서관을 건설한다. 넷째, 재단이나 연구센터를 세워 자신의 임기 중 추진했던 국내외 정책을 이어간다. 다섯째, 고액의 돈을 받고 외부 연설을 하러 다닌다. 여섯째, 퇴임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보이지 않게 정치에 입김을 낸다. 

43대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는 퇴임 후 텍사스 댈러스 남감리교 대학 근처에 정착했다. 그는 지역 행사에 참석하고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어 지역 주민을 초대하는 등 그 지역사회의  일부 구성원으로 어울리고 있다.

재임 당시 즐겨 탔던 산악자전거를 자주 타고, 한때 자신이 소유했던 미국 프로야구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를 보러가며 골프를 치러 다니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가·작가로 활동 중인 부시 前 대통령 

영국의 유명한 수상인 윈스턴 처칠이 퇴임 후 그림 그리는 데 심취했던 것을 따라 부시 전 대통령도 화가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애완동물 그림을 그리다 실력이 늘자 재임 중 친분을 쌓았던 외국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2014년 4월에는 그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작가’로도 변신해 아버지인 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의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들 대통령이 아버지 대통령을 쓴 경우는 처음으로 이 자서전은 2014년 11월 <내 아버지의 초상(41: Portrait of My Father)>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10년 11월 자신의 재임 기간을 정리한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2001년 9.11 테러,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2007년 이라크 파병 미군 증원 등 국제적인 사건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8년 금융위기 등 미 국내적인 사건들 가운데 자신이 내린 결정들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와 당시의 경험들을 밝혔다. 

이 책은 출간된 지 두 달 만에 200만 권이 팔리면서 자신의 전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쓴 회고록인 <나의 인생(My Life)>의 판매기록을 깨뜨렸다. 

부시 전 대통령은 아내인 로라 부시의 모교인 남감리교 대학에 자신의 8년간의 업적을 정리하고 자료를 모아놓은 대통령 도서관을 지었다. 그는 도서관 뿐 아니라 연구소를 같이 세웠는데 이 연구소는 경제성장, 인간의 자유, 교육, 지구적 건강 증진, 여성인권 등 재임 중 자신과 아내인 로라 부시가 관심을 갖고 추진했던 국내외 정책들을 이어가기 위해 심포지엄, 토론회, 리더십 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9년 1월 퇴임 후 지금까지 약 140여 차례의 유료 연설을 통해 최소 1500만 달러(약 175억 원)를 번 것으로 알려졌다. 연설 한 번 당 평균 11만 달러(12억 원)꼴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대통령 선거는 물론, 연방 상하원 선거와 주요 정책들에서 보이지 않지만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올해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의 바이오 회사에서 일하는 제임스 살렘은 “연방 상하원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막후 영향력은 크다. 많은 로비 회사들이 전직 대통령에게 찾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이 마련되도록 로비를 벌이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전화하면 의원들은 듣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전화하면 오바마 대통령은 전화를 받는다”고 말했다. 

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 역시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퇴임 후 생활이 비슷하다. 2001년 1월 퇴임 후 뉴욕에 정착한 클린턴 전 대통령은 3년에 걸친 준비와 작업 끝에 회고록이자 자서전인 <나의 인생>을 출간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칸소에 자신의 대통령 도서관을 짓고 ‘클린턴 대통령 재단’을 설립해 역시 재임 중 주안을 뒀던 이슈들인 HIV/AIDS, 인종간 화해 증진, 가난한 자들에 경제적 힘 증진 등을 연구하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45분 연설에 50만 달러(5억8000만 원)를 받는 등 고액 연설을 했다. 퇴임 후 이런 유료 연설을 통해 지금까지 8900만 달러(약 1038억 원)를 번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적 영향력 행사하는 클린턴 前 대통령 

클린턴 전 대통령은 특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달리 연방 상하원 선거 때마다 특정 민주당 후보들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이들이 당선되도록 하는 데 자신의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많은 민주당원들에게 중도적이며 경제를 살린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인기를 얻고 있어 그의 지지를 받은 연방의원 후보들은 대부분 민주당 경선을 쉽게 통과하고 본선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 그의 명연설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41대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 역시 퇴임 후 텍사스에 자리를 잡고 텍사스 A&M 대학에 자신의 대통령 도서관을 지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04년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동남아 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지원과 복구를 위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구호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2014년 6월에는 자신의 90세 생일을 맞아 스카이다이빙을 해 화제가 되었는데, 자신의 두 아들이 텍사스 주지사, 플로리다 주지사에 출마하면서부터 정치 참모로 아들들을 조언해왔다.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최고의 퇴임 대통령’이라 불리면서 대통령이 퇴임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그 역시 퇴임 후 재임 시절을 정리한 회고록 <신념을 지키며: 대통령 회고록(Keeping Faith: Memoirs of a President)>을 쓰고 조지아 애틀란타에 대통령 도서관과 센터를 지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저소득층에게 무료로 집을 보수하고 지워주는 비영리단체인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전직 대통령이 저소득층 가족을 위해 공사 현장에서 망치를 들고 못을 박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고, 이 활동이 불길처럼 퍼져나가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이 명성 덕분에 카터 전 대통령은 TV에 자주 등장하며 그 존재감을 높였고 민주주의, 인권 관련한 주제들의 칼럼을 주요 언론에 게재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자칭 프리랜서 대사로 중동, 북한 등에 직접 가서 분쟁을 중재하려는 시도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김일성과 리비아 카타피를 찾아가 만나 화해를 시도하려 했고 특히, 1994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정이 마련되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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