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생을 우리 세대가 겪어서 다행”
“그 고생을 우리 세대가 겪어서 다행”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6.07.11 0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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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인터뷰] 파독 50주년 맞은 파독 간호사 4인의 아름다운 고백

꽃다운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피 같은 월급 대부분을 고국에 송금. 

우리 누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미비했던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은 무척이나 팍팍했다. 도시지역 실업률은 16~17%에 달했고, 1965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7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237달러였던 필리핀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태국의 113달러보다도 작은 수치였다. 근로 소득을 벌어들이는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소득액도 가족이 먹고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는 의미다. 

대량 실업과 경제건설을 위한 자본 부족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 무렵, 청년들이 고난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해외에서 만들어졌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유명했던 서독에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한국과 서독 정부 간 합의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총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파견됐다.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들이 처음 독일로 떠난 해는 1966년이었다. 파독 간호사로 선발된 이들은 국내에서 3년제 간호학교 교육을 마친 예비 간호사들이거나 현업에서 활동 중인 간호사들이었다. 

간호사 파독 50주년을 맞아 만난 노금희(77)·황보수자(74)·김병연(73)·양선주(68) 씨 등 파독 간호사 출신 4명은 10~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여성의 몸으로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야 했던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아마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간호사들이 선진국에서의 근무를 꿈꿨을 겁니다. 간호사 지망생들이 미국이나 독일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김병연) 

“저는 운이 좋아서 서독의 간호대학으로 유학을 간 경우인데, 동료들을 보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셨던 분들이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양선주)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는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돼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때문에 국내에서 간호전문 교육을 받는 것도 집안의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1966년 7월 파독 간호사 3차 그룹으로 독일에 간 김병연 씨는 “부모님 덕분에 고교 졸업 후 간호전문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면서 “서독은 의료 선진국인 데다가 베토벤과 괴테로 유명한 음악과 문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젊은 여성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회고했다.

▲ 왼쪽부터 김병연 파독간호우정회 회장, 황보수자 한국파독협회 부회장, 노금희 파독간호우정회 부회장, 양선주 파독간호우정회 총무

젖먹이 떼어놓고 돈을 벌기 위해… 

대부분의 파독 간호사들은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생계형’인 경우가 거의 전부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시절이어서 본인들이 간호사로서 일을 해도 배우자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실직 상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보수자 씨는 10개월 된 아이가 있던 신혼 시절 파독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응모해 1966년 10월에 독일로 간 경우다. 양육비 때문에 갓난아이와 이별한 셈이다. 

“그때는 기본적으로 일자리가 없었어요. 저는 아르바이트로 전전하고 남편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던 상황이었습니다. 숟가락 두 개만 갖고 결혼한 상황에서 분유 살 돈도 없어 아이에게 쌀 끓인 물도 먹이곤 했어요. 나와 가족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젖먹이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모두가 다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황보수자) 

1974년 1월 독일에 갔던 노금희 씨는 사정이 더 절박했다. 6세와 9세 남매를 둔 노 씨 역시 남편이 직장이 없었다. 자신이 간호사로 받는 월급으로 살던 집 월세를 내고 네 식구가 먹을 쌀을 사고 나면 남는 생활비가 거의 없었다. 

노 씨는 “서독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귀국해서 가족과 함께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먹는 빵 값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돈을 국내에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면서 “돈을 아끼려고 내 손으로 천을 잘라 바지와 치마를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회고했다. 노 씨는 파독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도 자신이 직접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옷을 차려입고 왔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근무하던 한국 간호사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가족과 주고받는 사진과 편지였는데, 당시에는 한국에 전화가 있는 집이 흔치 않아 편지로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들이 보낸 편지를 받아 읽을 때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파독 간호사들을 가장 곤란하게 한 주인공 역시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1967년 7월 본(Bonn) 간호대학의 학생으로 독일에 간 양선주 씨는 “같이 갔던 친구들 중에 2명이 향수병 때문에 그만 뒀을 정도로 파독 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면서 “반면에 파독 간호사들 가운데 남편에게 돈을 전부 보내다시피 했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돈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한 경우가 꽤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 보훔 주립소아과병원에 근무하며 환자를 돌보던 호아보수자 씨(오른쪽 끝). 황보 씨는 “독일 사람들은 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친절했다”고 회고했다.

영안실 시체 닦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서독에서 간호사로서의 근무 조건은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자신들이 마치 서독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허드렛일이나 전담해서 했던 것처럼 비춰지는 일이 많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영화 <국제시장>의 여자 주인공처럼 파독 간호사가 시체 닦는 일을 별도로 했다는 사례는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노금희 씨는 “우리가 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서독 병원 관계자들이 특별히 힘든 일을 시키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면서 “오히려 타지에서 온 우리를 애처롭게 여기고 생경한 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세심하게 배려해줬다”고 강조했다. 

“처음 보훔 주립소아과병원에 도착하니까 외국에서 간호사들이 왔다면서 병원의 고위 관계자들이 전부 나와 영접을 해줬어요. 모두 독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 외롭지 말라고 모두 한 층에 배치해 주었죠. 중요한 건 급여 수준이었는데, 저희는 독일 간호사들과 똑 같이 월급을 받았습니다. 혹시 밖에 나가서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외국인 관련법을 우리에게 소상하게 알려주기도 했고요.”(황보수자) 

물론 서독에서의 간호사 생활이 한국보다 육체적으로 힘든 면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와 달랐던 간호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에선 별도의 간병인 없이 주로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았지만, 서독에선 환자를 씻기거나 식사를 돕는 간병 작업이 간호사 고유 업무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독은 당시 모든 가족, 아이들조차 일정한 나이만 되면 직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이 환자를 간병하는 문화 자체가 없어요. 모두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간병을 전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그때만 해도 여성을 포함해 일을 하는 인구가 적었으니 온 가족이 환자 돌보기에 나설 수 있었던 같아요.”(양선주) 

“파독 간호사들이 영안실에서 시체 닦는 일을 했던 것처럼 영화나 언론에 나오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입니다. 자기 환자가 사망하면 간호사로서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안실 업무는 영역이 달랐습니다. 그런 일을 시키는 서독 병원도 없었던 걸로 알고, 그런 일을 했다는 우리 동료도 못 봤습니다.”(김병연) 

파독 광부들이 위험천만한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현지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듯이 우리 간호사들도 특유의 친절함과 실력으로 현지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서독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병원 직원들은 한국 간호사들을 “극동에서 온 천사”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주사를 놓는 실력은 서독 간호사들이 한국 간호사들을 따라올 수 없었다고 한다. 

노금희 씨는 “VIP 환자들이 주사를 맞을 때면 ‘코리안 간호사’를 찾았다”면서 “아마도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젓가락질을 해서 그런지 손재주는 독일 간호사들보다 월등하게 좋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파독 간호사들이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1977년 정부 차원의 파독이 종료된 후인 1990년대에도 한국 간호사들을 다시 찾는 독일 병원들이 많았다. 나이가 많아도 좋으니 당시의 파독 간호사들을 다시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금희 씨는 1990년 다시 독일로 가서 15년을 독일에서 더 근무했다. 

간호사를 포함한 파독 근로자들 덕분에 1960대의 어려웠던 국가 경제도 결정적 전기를 맞았다. 경제 개발을 위해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기에 파독 근로자들이 고국에 보낸 외화 송금이 가뭄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파독 근로자들이 미화(美化)로 송금을 하면 그 외화를 국가 경제 개발의 자금으로 사용하고, 국내 가족에겐 원화로 환전해 전달하는 식이었다. 

파독 근로자 10년 송금액 총 1억 달러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자금이 요구됐지만, 1960년 외환 보유고가 2300만 달러에 불과했을 정도로 한국에는 개발계획을 추진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 외자도입이 절박했던 것이다. 

1962년 외자유치 목표가 5000만 달러였으나 정작 유치에 성공한 금액은 6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이 5·16을 문제 삼아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원에 인색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찾은 돌파구가 서독이었다. 경제 부흥에 성공한 독일의 노동력 부족 현상과 한국의 외화에 대한 수요가 맞아떨어졌다. 광부와 간호사 등 파독 근로자들이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간 고국으로 보낸 송금액은 총 1억 달러가 넘었고, 서독 정부는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1억5900만 마르크(약 4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1952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년 간 국제사회가 한국에 제공한 공공차관이 약 7억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서독으로부터 받은 송금액과 차관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외화 송금은 일반 수출에 비해 비용이 없는 순이익이라는 점에서 외화 획득의 가치가 크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보내진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 송금이 당시 경제성장에 미친 기여도를 수치로 분석한 자료도 있다.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전문가의 분석 자료를 인용해 파독 근로자들이 보낸 송금의 우리 경제 기여도가 1965년 12.2%, 1966년 11.8%, 1967년 15.1%에 달했다고 밝혔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임금을 고국의 가족에 보냄으로써 매년 한국 경제 성장에서 10% 이상의 기여를 했다는 의미다. 

▲ 서독 병원의 중환자실, 수술실 등에서 7년간 근무한 김병연 씨(오른쪽)는 귀국 후 독일에서 익힌 선진 의료시스템을 국내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독일서 번 돈으로 내 집 마련 

“한 달 월급 700마르크를 받으면 그 중 3분의 2 정도인 500마르크를 한국에 송금하고, 저는 200마르크로 한 달을 살았습니다. 독일 병원의 지원이 좋아서 그 돈으로 레코드판도 살 정도로 넉넉하게 지냈습니다. 제가 받았던 한 달 월급 700마르크는 한화로 약 4만9000원 정도였는데, 당시 한국에서 세브란스 병원에 다니던 친구의 월급이 7000원이었으니 제가 7배 정도 더 받은 셈이었죠.”(황보수자) 

“내 경우는 매월 송금하기보다는 독일에서 돈을 모아 한국으로 목돈을 가져온 경우였어요.  3년 계약 마치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4년을 더 있었죠. 임부복을 내손으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아끼고 아껴서 7년 후인 1973년 한국에 올 때는 당시에는 큰돈이었던 700만 원 정도나 되더라고요. 그 돈으로 신림동에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김병연)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바로 서독으로 간 경우, 미혼으로 가서 현지에서 결혼한 경우, 아이와 남편을 한국에 두고 가서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낸 경우 등 파독 간호사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1960~1970년대 해외 근무라는 흔치 않은 경력을 갖게 된 이들의 서독 생활이 궁금했다. 양선주 씨는 현지에서 만난 파독 광부와 만나 결혼해서 서독에서 잠시 자리를 잡았다. 

“본 대학병원 간호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광부로 와 있던 남편과 만나 결혼했어요. 남편은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가 파독 광부로 왔었죠. 나중에 아헨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제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이 둘을 키웠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여름 방학이 되면 해마다 3주씩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곤 했어요. ”(양선주)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양선주 씨는 1983년 9월 소련 전투기에 의해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됐을 때는 격분해서 한국동포들이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본에 있는 러시아대사관에 항의하러 간 경험도 있다. 

길 병원 간호이사 등 한국에 와서 간호사로서 커리어를 이어온 김병연 씨는 라인강을 보며 고향에 있는 한강을 떠올렸다고 한다. 

“기숙사가 라인강 옆에 있었어요. 발코니에서 라인강에 석탄을 실은 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한강에도 언제 저런 큰 배가 다닐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라인강의 기적을 우리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금 보면 라인강보다 한강이 훨씬 좋죠. 참 격세지감입니다. 그리고 독일 병원의 간호사들이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게 그렇게 부러웠는데, 한국에 와서는 제가 자동차로 출퇴근을 했어요.”(김병연) 

젊은이들에게 꿈을 

이들 4명의 원로 ‘산업역군’들은 파독 간호사들의 단체인 파독간호우정회 활동을 하며 사회를 위해 봉사할 일을 찾고 있다. 김병연 씨가 파독간호우정회 회장이고 황보수자 씨가 사단법인 한국파독협회 부회장, 양선주 씨가 파독간호우정회 총무를 맡고 있다.

노금희 씨는 파독간호우정회 부회장으로서 행사 활동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파독간호우정회는 파독 50주년을 맞아 강연과 세미나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파독 정신’을 전파할 계획이다.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애오라지 가족과 조국의 잘 사는 내일을 위해 외국에서 보낸 이들에게 현재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꿈을 잃은’ 우리나라 청년들이다. 김병연 씨는 “외국 여행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우리는 꿈을 좇아 외국으로 나갔다”면서 “지금의 청년들 너무 비관적으로 신세한탄만 하지 말고 좀 더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돌아와 공부를 계속해 인제대 간호학과 교수를 했던 황보수자 씨는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 데 자신을 포함한 파독 근로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됐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더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가 제 나이와 같더라고요. 영화에서 평생을 고생만 하던 덕수가 ‘(아들 세대가 아니라) 우리가 겪어서 다행’이라고 했잖아요.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물론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겠지요. 그래도 제가 서독에 가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가치관을 찾은 것처럼 우리 청년들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현실에 대한 불만보다는 좀 더 긴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어요.”(황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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