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준비’가 통일의 지름길
‘철저한 준비’가 통일의 지름길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7.26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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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의 知性 아카데미]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中

콜 총리는 통일의 길에는 소련의 향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고르바초프와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개인외교 강화 

역대 서독 정부의 대(對)동독 정책 

서독 정부는 처음부터 독일문제를 영토문제가 아니라 모든 독일인들이 자유와 자결권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과제로 파악했다. 자유는 통일의 조건이지, 대가나 부산물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통일 기조는 콜 총리 집권 시까지 지속되었다. 서독 정부는 기본법 전문에 따라 자유로운 자결권을 통해 독일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의지를 항상 천명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기본법 전문은 유럽통합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독일 문제는 유럽의 의지와 가치에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만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63년 아데나워를 계승한 신임 총리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보다 더 보수적인 대(對)동독 정책을 추진했던 것처럼 보였지만, 통행증 발급 협정이라든가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조치, 그 밖의 인도주의적 접촉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상쇄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60년대 말에 많은 국가들이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하려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1969년 베를린 시장이며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구호 하에 서독 정부의 적극적인 대동독 협상정책이 시작되었다. 

브란트는 동독을 제2의 독일 국가로 인정했고,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했으나 연방정부가 동독의 사통당(SED)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72년 11월 8일 동독을 동등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고 동서독간의 교류를 강화시킬 것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기본조약은 동서독 교류에 상당한 개선을 가져왔으며, 분단 고착화를 상당부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이산가족들이 재결합하고,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가 허용되었다. 
서독에 있는 가족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약 600만 명의 서독인들은 간소한 절차를 통해 국경 인근 지역의 동독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1974년 브란트 총리는 비서인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으로 판명되어 자진 퇴진했다. 

통일을 준비한 콜의 리더십 

1982년 헬무트 슈미트 후임으로 총리에 선출된 콜은 “절대 환상을 갖지 말고, 항시 사실과 현실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의 좌우명(座右銘)이었다. 그는 옳다고 판단한 정책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 정치인이었다. 

콜 정부의 통일정책은 집권 초반에는 서방 통합과 체제 경쟁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지만 점차 아데나워의 보수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 사이의 중도노선을 취하게 된다. 

콜이 집권했을 때, 나토에서는 안보 논쟁이 치열했다. 이유는 소련이 SS-20 미사일을 개발하여 나토는 소련에 대한 미사일 우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독 정부에 퍼싱2(중거리 핵미사일)의 배치를 권고했고, 서독 사회는 심각한 안보 논쟁에 휩싸였다. 

분열된 정치권과 여론의 틈바구니에서 콜은 퍼싱2의 서독 배치를 승인하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미국과의 신뢰는 한층 돈독해졌지만 소련과 동독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동서독 관계, 서독과 소련과의 관계에 긴장이 감돌았다. 결국 퍼싱2는 전량이 서독에 배치되었는데, 동독이 아니라 소련을 목표로 한 공격용 미사일이었다. 

퍼싱2는 소련의 신형미사일로 인해 유럽 미사일 방어망이 취약해지는 것을 상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견고해진 나토의 억제력은 후일 소련이 서방에 대해 타협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사드 배치 결단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비생산적인 안보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려는 사드 배치는 전혀 잘못된 결정이 아니다. 33년 전 퍼싱2의 서독 배치에 대한 콜의 결단을 되돌아본다면 박 대통령의 결단이 얼마나 현명한 조치인지를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동독도 퍼싱2의 서독 배치에 대해 거품을 물고 항의만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경제난이 경직된 동독 체제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콜 정부는 1983년 경제난에 처한 동독에 10억 마르크 차관의 지불보증을 해 주면서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던 동서독 관계가 크게 진척을 봤다. 다음 해에는 다시 동독에 9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을 해 줬다. 

1987년 9월 동독 집권자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통해 동서독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콜은 통일의 길에는 소련의 향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고르바초프와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개인외교를 강화했다. 

1988년 10월 두 번째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와 사귈 기회를 얻었고, 다음해 6월 12일 고르바초프를 서독으로 초청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서독의 지원을 요청했다. 콜은 무조건적 대소(對蘇) 지원을 약속했으며, 다음해에 이를 실천했다. 6월 15일 회담 마지막 날 서독과 소련 양국 지도자들은 11개 협정에 서명했으며 유럽의 통합과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 서명에서 서독의 콜 정부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점은 “모든 국가가 스스로 정치사회 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점을 분명히 못 박은 것”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다. 콜은 그해 11월 28일 연방의회에서 행한 통일을 위한 10개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이를 빈틈없이 실천했다.

▲ 콜 독일 총리는 통일을 위해서는 소련의 향배가 중요하다고 판단, 경제난을 겪는 소련에 50억 마르크를 지원하고 고르바초프와 우호를 돈독히 하는 개인외교를 강화했다. 콜 독일 총리(우)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독일 통일 이후인 1990년 11월 9일 양국 간 우호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통일의 大長征이 된 동서독 주민의 교류 

통일의 과정은 동독 주민들의 서독 방문과 인적 교류의 꾸준한 확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서독 주민들은 1970년대 이후 상호 방문했으며, 동독 정부는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이주를 막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1988년 말까지 동독인 거의 절반이 공식적 여행 허가를 가지고 서독을 이미 한번 방문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서독을 경험한 동독인들은 보다 비판적이고, 보다 불만족스럽고, 보다 요구 수준이 높은 채로 동독으로 귀환했다. 

동독인들은 서독 시장에서 컬러 TV를 샀으며 귀국하여 서독 방송도 자유롭게 청취했다. 1980년대 말 경에는, 동독인의 약 3분의 2와 서독인의 3분의 1이 상호 방문 접촉을 경험했다. 

1980년대 이후 서독 정부는 동독과의 경제 무역 교류를 확대했다. 역대 서독 정부는 마르크를 동서독간의 결제수단으로 삼았으며,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다. 예를 들어, 1983년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를 위해 한 기업연합의 은행 차관에 대한 10억 마르크의 지불보증을 서주었는데, 이로써 동서독 관계가 괄목할 만큼 발전했다. 

1984년 7월 서독 정부는 동독에 9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을 해 줬다. 이 대가로 동독 정부는 동서독 교류를 강화하려는 서독 정부에 많은 양보를 했다. 

1984년에 4만 명의 동독인들을 서독으로 이주를 허용했으며, 동독 여행 및 방문 시의 절차와 서베를린으로 가는 통관절차를 간소화시켜 줬다. 

동서독의 무역 액수도 1970년대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고, 1983~84년에 약 150억 마르크의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동서독의 경제협력관계는 단기적으로는 동독 정권을 안정화시켰지만, 장기적으로는 동독 경제의 서독에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 동독의 사통당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것을 붕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은 소련에 차관 제공으로 50억 마르크 지원하여 우호관계를 돈독히 했다. 또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 귀국하여 소련 내에 새로운 기지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철수 및 이사비용도 제공했다. 

그러나 동독의 호네커와 지도부가 팔짱끼고 권력의 붕괴를 우두커니 바라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통일을 막으려고 몸부림쳤다.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9년 가을에 이미 격리 수용 시설의 확장계획을 마련했고, 감금 대상인 재야 반체제 인사 명단도 보충, 새로 작성했다. 그 숫자는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유럽의 자유화·민주화 물결에 편승한 동독인들의 자발적인 통일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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