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8.05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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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8·18 도끼만행 사건(1976년 8월 18일)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저들이 또다시 도발하면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즉각 응징할 것”(1976. 8. 19. 육군제3사관학교 졸업식 치사)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 유엔사 경비대장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 한국군 대위 한 명이 7명의 경비병력과 한국인 근로자(KSC) 5명을 인솔하여 제3초소 옆 12m 지점에 커다랗게 자란 미루나무 주변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판문점 내에는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공동경비구역’이었다. 그런데 한국군 제3초소 주변에 북한이 포위하듯 세 개의 초소를 세우는 바람에 북한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에서 3초소를 지켜봐야 했는데, 3초소 옆에 크게 자란 미루나무가 시계를 방해했다. 

8월 3일 유엔군 경비대는 3초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8월 6일 노무자 4명과 유엔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이때 북한군이 이의 제기를 하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경비대는 8월 18일 가지치기만 하기로 결정하고 이날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북한군 군관 2명과 병사 8명이 나타나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을 알려주는 등 작업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10시 47분. 북한군 장교(후에 박철 중위로 밝혀짐)가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박철은 “나뭇가지를 건드리지 말라”면서 시비를 걸어왔다. 북한군 중위가 계속 엄포를 놓자 인솔 책임자인 보니파스 대위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절단하는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항의하자 북한군 중위가 “이놈들을 죽여!” 하고 외쳤다.

이를 신호로 인민군이 몽둥이와 쇠꼬챙이로 보니파스 대위를 공격했다. 그들은 한국 근로자들이 버리고 달아난 벌목용 도끼 뒷머리로 보니파스 대위의 얼굴을 여러 차례 내리찍었다. 

이 와중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의 북한 초소에서 2대의 트럭에 탄 50~60명의 인민군 증원부대가 몰려왔다. 배럿 중위는 유엔군 3초소 동쪽 50m 지점 도로변 숲속에서 발견됐는데, 도끼로 수 차례 얼굴을 강타 당해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는 보니파스 대위와 함께 서울로 후송하는 헬기 안에서 순직했다. 

이 밖에 미군 경비병 4명과 한국 경비병 2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인민군은 유엔군 트럭 3대와 유엔군 초소를 파괴한 다음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당장 내 군화와 철모 가져오라” 

당시 일본에 휴가 중이던 유엔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은 사고 소식을 보고 받고는 얼마나 급했던지 여객기 대신 전투기 후방좌석에 타고 귀임했다. 

국방부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와 스틸웰 대장을 접견했다. 

박정희는 1·21 청와대 습격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미 정보기(EC121) 격추사건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강력한 보복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런 비극이 발생한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강력한 보복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끔찍한 도끼만행 도발사건을 저지른 시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의 후폭풍으로 베트남 패망, 캄보디아 공산화, 주한미군 철수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의 파괴는 미국 내에 큰 충격과 상처를 줬다.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미국 지도부는 태평양 중시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1975년 11월 11일 헨리 포드 대통령은 “태평양 연안국의 일원으로서 아시아에 절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다음해인 1976년 1월 27일 럼스펠드 신임 미 국방장관은 취임 후 처음 발표된 국방백서에서 “미국 안보의 필수적인 힘의 중심 지역은 서구,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동북아, 즉 일본과 한국”이라고 지적하고, “한반도에서 미 지상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미국이 지난 20년간 유지해 왔던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주한미군 철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태평양 중시 전략에 재를 뿌린 인물이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지미 카터 전 조지아 주지사였다. 그는 선거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왔다. 
탈(脫)기성정치로 선풍을 일으킨 카터는 1976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고, 주한미군 철수도 민주당 선거공약의 하나로 확정됐다. 

김일성은 카터의 대통령 후보 지명,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크게 도무되어 카터의 후보 지명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백주에 도끼로 미군 장교 두 명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충격적인 도끼 살상 만행을 당한 미국 정부는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8월 18일 밤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서 F-4 전폭기 1기 대대와 미국 아이다호 주 기지에 있던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최신예 전폭기 F-111 1개 대대를 한국에 배치했다.

8월 20일에는 미 7함대에 경계령을 내리고 항공모함 레인저호를 한국 해역으로 이동시켰다. 또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1800명이 한국으로 이동했고, 요코스카에 기항 중이던 항모 미드웨이호가 중무장한 순양함 5척과 함께 한국 해역에 진입했다. 

▲ 1976년 8월 18일 발생한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 미군과 국군이 전쟁 불사의 각오로 응징 작전에 나서자 김일성은 휴전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도발에 대해 사과 성명을 보내왔다.

“도발 자행하면 즉각 응징” 

김일성은 8월 19일 새벽 5시를 기해 인민군 전 부대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예비군 병력에까지 북풍1호(준전시 상태)를 선포하고 전투태세 돌입명령을 내렸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박정희는 8월 19일 육군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단호한 발언을 했다. 

“우리가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언제나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또다시 불법적인 도발을 자행할 경우,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즉각적인 응징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 전방의 전 사단 병력과 전차부대가 휴전선으로 집결했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긴급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특별대책반’을 구성하고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 제거를 결정했다. 

작전명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 이름을 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됐다. 8월 20일, 스틸웰 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미국 정부는 도끼만행 사건으로 중단되었던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전개하여 여하한 방해가 있더라도 이를 배제, 절단하기로 했습니다. 북한 측이 무력으로 대응하면 우리도 즉각 대응하여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출하여 수도 서울에 대한 서부전선의 지리상의 근접에 따른 위협을 완화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한군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 사용까지를 고려하는 실질적인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미루나무 절단작전은 판문점 경비를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미군 측이 담당하며, 작전 개시 시각은 8월 21일 오전 7시. 보고를 들은 박정희가 스틸웰 장군에게 말했다. 

“이미 두 명의 미군 장교가 도끼만행 사건으로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판문점 공동경비지역이 미군 관할이라 하여 더 이상 미군의 희생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국토수호의 1차적 책임은 우리 국군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군 지휘관 1명을 제외하고 절단작전, 경호, 근접지원 등 제1전선은 우리 국군이 맡겠습니다. 미군은 제2전선을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군의 생명을 염려하여 한국군이 희생자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절단작전을 수행하겠다는 제안을 들은 스틸웰 대장은 순간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고는 “각하의 뜻을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국군이 이번 작전 수행하라” 

박정희는 배석했던 서종철 국방부 장관, 노재현 합참의장에게 “특전사 산하 정예부대와 제1전선을 맡고 있는 육군 부대가 이번 작전을 수행하라”고 군 통수권자로서 명령했다.

8월 21일 아침 7시. 한미 양국군이 데프곤 2(공격준비태세)에 돌입한 가운데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나섰다. 포드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무장 헬리콥터, F-4 팬텀 전폭기, F-111 전폭기, 괌에서 날아온 B-52 전략폭격기가 4중으로 판문점 상공을 경비하는 가운데 미군 장교의 지휘 하에 16명의 작업반과 이를 경비·근접 지원하기 위해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64명의 국군 특전사 정예요원, 1사단 수색대가 투입되었다. 

주한 미 2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판문점 공동경비지역 남쪽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즉각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미 2사단 장병이 탑승한 20여 대의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한국 해역에 진입한 미 항모 미드웨이호는 함재기를 띄웠고, 항모 내에는 즉시 투입 준비가 완료된 해병부대가 대기 중이었다. 

드디어 미루나무 절단 작전이 개시됐다. 7시 20분께 북한 병사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너편에서 사진만 찍을 뿐 도발행위를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인민군 부대에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걸려들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7시 55분, 한국군 작전 팀이 미루나무를 완전 절단하고 남방분계선 내에 불법으로 설치한 북한군 초소도 때려 부순 다음 철수했다. 

1시간 30분의 작전 진행 도중 방해나 저항은 전혀 없었고, 평양-원산 선 이남에서 북한 항공기는 단 한 대도 이륙하지 않았다. 

8월 21일 오후, 김일성은 한미 연합군의 모든 작전이 종료된 후 인민군사령관 명의로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유감 성명을 보내왔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쌍방은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휴전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도발 행위에 대한 사과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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