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7사단, 한국을 떠나다
美 7사단, 한국을 떠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8.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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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역사 속의 오늘] 애그뉴 미국 부통령과 감군 논의(1970년 8월 24일)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자주국방 위해 중화학공업화 선언.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이었다

1970년 6월 5일,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어선단 보호 임무를 수행하던 해군 방송선(시속 8노트, 120t급)이 교전 끝에 침몰 직전 북한에 납치됐다. 약 3주 후인 6월 22일 새벽 3시 50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내까지 대담무쌍하게 침투한 북한 게릴라들이 6·25 행사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폭사시키기 위해 국립현충원의 현충문에 고성능 폭탄을 설치하고 원거리에서 전파 조작으로 폭파하려 했다. 그런데 조작 실수로 폭탄이 미리 터지는 바람에 공비 1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나머지 공비들은 추적 끝에 사살됐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970년 7월 5일,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마닐라에서 열린 월남 참전 7개국 외상회의에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7사단 철수 사실을 알렸다. 다음날인 7월 6일에는 포터 주한 미국대사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통보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주한미군을 지속적으로 빼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맹호·백마 2개 전투보병사단과 1개 해병여단(청룡부대)을 비롯한 5만 여 병력을 월남에 보내 미군을 돕고 있었는데 한국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빼내간 사실이 확인되자 박정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닉슨 미 대통령은 8월 24일, 애그뉴 부통령을 특사로 서울로 보냈다. 8월 25일 박정희와 회담한 애그뉴는 미군의 해외 군사 개입 반대와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과 관련한 설명과 함께 주한미군 7사단을 1971년 6월까지 철수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주한미군 철수 논란 

이날 박정희는 애그뉴 부통령에게 주한미군 감축이 불가피하다면 북한의 계속적인 무력도발과 위협에 대비하여 한국군 현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회담 내용이 진지하고 심각하여 점심 식사도 잊은 채 6시간이나 진행되었다. 다음날 아침 2차 회담에서 애그뉴 특사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 ▲장기 군사원조 ▲2만 명 이상은 감군하지 않는다는 점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날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애그뉴 부통령은 수행한 미국 기자들과 회견을 갖고 “앞으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 

회담에 배석해서 애그뉴 부통령이 “미 7사단만 철수하고 미 2사단은 계속 주둔하여 한국 안보에 임하게 되기 때문에 미 7사단이 철수해도 한국 안보에는 절대 염려가 없다. 2만 명 이상의 감군은 절대 없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던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그뉴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 받은 박정희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을 하더니 “미군은 가고 싶으면 가라. 자주국방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미국 측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초월해야 한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내외자가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 되어야 하고, 첨단 정밀무기는 고가이므로 외화는 신종 고성능 무기도입에만 충당하고 전통적 기본무기를 하루빨리 국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미 양국은 10차에 걸친 고위 군사회담을 통해 1971년 2월 6일,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매듭지었다. 

첫째, 1971년 6월 말까지 미 7사단 철수를 중심으로 주한미군 1만 8000명 감축. 서부전선 제1선을 담당하던 미 2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며, 북한군과 직접 대치하는 휴전선 전체의 지상방어 임무는 한국군이 전담. 

둘째,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미국은 군사원조와 군사 차관 제공. 

셋째, 종래의 연례 국방장관회의의 격을 높여 외무·국방관계 고위 관리가 참석하는 연례안보협의회의 개최.

▲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함으로써 대한민국 안보에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8월 24일 애그뉴 미부통령을 접견하는 모습.

미 7사단 한국을 떠나다 

1971년 3월 27일, 미 7사단이 이한(離韓) 고별식을 가졌다. 박정희는 미 7사단을 부대표창하고 사단장에게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을 수여했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 8일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하여 고락을 나누었던 공헌, 특히 6·25 전쟁 중의 무공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미 7사단의 철수로 인해 주한미군 병력은 총 6만3000명에서 4만3000명으로 줄었으며, 미 2사단은 서부전선 제1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에 인계하고 미 7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후방으로 이동했다.

1971년 3월 말까지 미군은 휴전선 일대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모든 작전 책임을 한국군에 이양했다. 이로써 휴전 18년 만에 처음으로 155마일 휴전선 전체의 방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비롯하여 자주국방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모래시계 사단, 총검 사단, 캘리포니아 사단(Hourglass Division, Bayonet Division, California Division) 등 갖가지 별명을 가진 미 7사단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12월에 캘리포니아 주 포트 오드에서 창설되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 예하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38선 이남 지역의 일본군 무장 해제 임무를 수행했고, 대한민국 건국과 국군 창설을 도운 뒤 1948년 일본으로 철수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선봉부대로 또 다시 인천에 상륙, 서울 수복작전을 주도했다. 

미 7사단은 북진 작전에 참여하여 그해 11월 한만(韓滿) 국경인 혜산진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했고 이어 화천·김화·철원 등지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며 전공을 세웠다. 4월 2일, 미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로 철수하여 창설 54년 만에 퇴역·해체되었다. 

주한미군 철수 준비가 진행 중이던 1971년 2월, 닉슨 미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중공이 유엔 의석을 차지하고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었다. 미국이 북한의 동맹국이자 6·25에 불법 개입하여 통일의 기회를 좌절시킨 중공과 국교 수립을 한 것은 한국에게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 동안 주일미군이나 독일 주둔 미군은 철군, 감축 이야기가 거론조차 되지 않는 데 비해 미국은 수시로 주한미군 철수를 시도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볼 때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이 걸려 있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뒤흔든 데탕트 분위기로 인해 이제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이 재개되어도 미국이나 우방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국제 정세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는 1971년 11월 10일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는 자주국방 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라고 봤다.

이제 미국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우리 국토는 우리가 만든 무기로 지킨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원철에게 국산 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 11월부터 개인용 화기와 박격포, 화포 등 병기 국산화 개발이 시작됐다. 

국산 무기 생산 위해 중화학공업 추진 

피나는 노력으로 시제품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소재의 부적합, 가공기술의 미흡 등으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됐다. 극한 상황을 견뎌야 하는 무기 제조를 위해서는 특수 철강 소재와 초정밀 가공기술 확보가 급선무였다. 1년여 시행착오 끝에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선진 수준의 철강공업, 비철금속공업, 기계공업, 전자공업 등 중화학공업을 전면적으로 건설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박정희는 거의 매일 국방 관계자와 대책회의를 가졌고, 방위산업 육성을 독려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단 시일 내에 중화학공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국가 총력전 체제가 불가피했다. 박정희는 고민에 빠졌다. 중화학공업 육성에는 10년 이상의 세월과 천문학적인 투자가 요구되는데, 자신의 임기는 3년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정치 수단이 요구됐다. 1971년 12월 5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이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1972년 10월 17일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조국 근대화 과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혔다. 10월 유신을 선포한 배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박정희와 함께 일했던 오원철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이렇게 정의한다. 

“유신체제 출범이 박정희의 권력욕과 종신 집권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10월 유신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조건으로 초강력 정부를 구성하여 단기간 내에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가시밭길이었다.” 

김형아도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10월 유신은 반드시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10월 유신을 통해 임기에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국가 총동원체제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과연 중화학공업 건설이 가능했을지는 좀 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과제다. 

중화학공업화의 산 증인인 오원철은 중화학공업화와 10월 유신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중화학공업이 추진되는 와중에도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됐다. 휴전선 일대에서 연이어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은 지극히 위태로웠다.

이제 믿을 것이라곤 오직 우리 스스로의 힘뿐인 상황에서 국산 무기를 하루빨리 개발하기 위해 총력전을 전개하는 와중에도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 언론인, 그리고 일부 대학생들은 항토예비군 철폐, 국군 감축, 교련 반대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했다. 이것이 우리의 그 시절 자화상이었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10월유신 및 유신헌법 개정안 선포 관련 동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film.ktv.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835&mediadtl=6564&gbn=DH&qualit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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