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대장부가 가는 길
사나이 대장부가 가는 길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8.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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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

한국을 오래 지켜본 외신기자는 박정희 시절의 격렬한 발전상에 대해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게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고 표현한다. 왜 유독 그 시절에 한국이 로켓처럼 치솟았을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명칭을 가진 김영란법이 화제다. ‘한 끼 식사 1인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으로 상징되는 김영란법의 핵심 내용은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을 따지지 않고 공직자를 포함하여 민간 부문인 기자, 사립학교 교원들의 금품 수수 행위까지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합헌(合憲) 판결을 받음으로써 9월 28일부터 시행에 돌입할 이 법의 현실성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보면 청와대에서마저 공공연하게 김영란법에 현저히 저촉되는 일들이 무시로 벌어졌음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대통령에게 여비 봉투 받은 남덕우 교수 

남덕우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196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초청으로 1년 간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 평가교수단의 일원으로서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상황을 평가 토론하는 임무를 맡았다. 

남 교수는 정부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후진국 경제개발에는 무엇보다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총리실 관계자로부터 남덕우의 도미(渡美) 소식을 보고 받은 박정희는 남덕우에게 “나를 꼭 좀 보고 가시오” 하고 메시지를 전했다. 연락을 받은 남덕우가 청와대로 가자 박정희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집안의 처자와 부모는 어떻게 하고 갑니까? 누가 따라 갑니까?” 
“저 혼자 갑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장도(壯途)’라고 쓴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여비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연구 열심히 하고 돌아오시오” 하더니 배석했던 비서실장에게 “남 교수가 집에 없는 동안 일가족의 생활을 돌봐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주는 봉투였으니 금액이 꽤 두둑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정부 관계 일을 하는 대학 교수에게 금품을 제공했고, 남 교수는 이를 수령했다. 김영란법에 의하면 직무 관련성이 없어도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이 오가면 대가성이 없어도 형사처벌 대상이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일이었다면 틀림없이 야당과 언론들은 “두 사람을 김영란법으로 처벌하라”고 아우성을 치지 않았을까. 

1년 여 교환교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남덕우는 1969년 10월 21일 라디오 뉴스를 통해 ‘재무장관 남덕우’ 개각 발표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청와대에 들어가 얼떨결에 임명장을 받았는데, 신임 장관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박정희가 빙그레 웃으며 남덕우에게 한 마디 던졌다. 

“남 교수, 정부 정책을 많이 비판했는데, 이제 정부에 들어와 맛 좀 보시오.” 

남덕우는 그로부터 5년 간 재무장관, 1974년에는 경제부총리, 1979년에는 청와대 경제담당 특보를 맡아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주인도 총영사 노신영은 1972년 6월 대통령 친서를 받았다. 외교행낭 편으로 도착한 친서 내용은 미수교국인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두둑한 활동비가 들어 있었다. 

노신영은 대통령에게 감사의 답신을 보내면서 소를 숭상하는 인도 국민의 생활상을 간단히 보고했다. 그 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부터 뜻밖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항공편으로 쇠고기 통조림을 보내니 수령하라는 내용이었다. 쇠고기를 먹을 수 없는 사정을 살펴주는 대통령의 온정에 영사관 직원들 모두가 가슴이 뭉클했다. 

노신영은 2년 간 박정희 대통령이 보내준 쇠고기 통조림을 공관 행사나 특별 회식 때 아껴 먹으며 북한이 끈질기게 반대해 온 인도의 남북한 동시 수교를 이뤄냈다. 공직자 노신영도 대통령에게 대가성 없는 봉투와 물품을 수령했으니 요즘 세태였다면 그도 김영란법에 저촉돼 형사처벌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박정희는 유독 물을 아끼는 지도자였다. 그는 재임 중 4대강유역 종합계발계획 등을 통해 소양강댐, 섬진강댐, 안동댐 등 대규모 댐을 건설하여 가뭄과 홍수 조절, 용수 공급, 부족한 전력 공급 등을 실현했다. 특히 댐 건설을 통한 용수 확보 등 국토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은 각별했다. 

▲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소양강댐 공사장 시찰 모습. 박 대통령은 댐 건설을 통한 용수 확보에 관심이 각별했다.

“다른 사람 돈은 안 먹으면서 내가 주는 돈은 왜 먹어?” 

어느 날 안동댐 건설 현장에 근무하던 한국수자원공사 직원 한 사람이 납품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수자원공사 사장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죄인 심정이 되어 머리 숙여 사죄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이른바 직원의 ‘생계형 비리’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생활이 어려우면 그런 비리를 저질렀겠소” 하더니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예산 담당 장관을 전화로 불러 “한국수자원공사 전 직원에게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한 직원의 작은 허물로 국토개발 일꾼들의 명예와 자긍심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박정희 식 용인술이었다. 

5·16의 기획자 역할을 했던 육군 중령 출신 이석제는 자신의 월급으로 도저히 집 장만을 할 형편이 못 돼 용산 관사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관사 자리에 국방부 청사 건립계획이 확정되는 바람에 거리로 쫓겨나야 할 형편이 됐다. 이 사실이 박정희에게 보고되자 어느 날 박정희가 이석제를 청와대로 불렀다. 

“자네 아직도 용산 관사에 산다면서?” 
“예”
“그 자리에 국방부가 들어선다는데 집을 내놔야 되잖아. 집은 구했어?” 
“아직 못 구했습니다.” 
“빈털터리가 무슨 돈으로 집을 구해. 내가 좀 도와줄까?” 
“다른 분이 도와주신다면 거절하겠습니다만 각하가 도와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다른 사람 돈은 안 먹으면서 내가 주는 돈은 왜 먹어?” 
“각하야 사심 없이 주시니까….” 

그런 대화를 나눈 후 박정희는 두툼한 봉투를 하나 건네줬다. 봉투 속에는 메모 한 장과 거금 5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 화폐가치로 500만 원은 서울 시내에서 꽤 훌륭한 저택을 구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이석제 저,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에서). 

한국을 오래 취재했던 외신기자는 박정희 시절의 격렬한 발전상에 대해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게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고 표현한다. 왜 유독 그 시절에 한국이 로켓처럼 치솟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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