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불문하고 몇 년씩 집 떠나 강제노동
남녀 불문하고 몇 년씩 집 떠나 강제노동
  • 이애란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1.11 12:2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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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야기] 북한의 돌격대 생활과 인권 침해 실태

최근 북한의 돌격대에서 자행되는 노예적 노동 실태 증언이 나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북한 주민들은 어떤 돌격대이든 한번씩은 참여한 기억이 있을 정도로 돌격대 생활은 일반화 되어 있다. 집을 떠나 몇 개월 또는 몇 년씩 합숙생활하거나 집에서 출퇴근한다. 직장 내에서 활동하는가 하면 직업과 전혀 상관없는 건설노동이나 탄광, 광산 등에서 일하기도 한다. 

북한은 대규모 건설에 필요한 인력 충당이 어려워 다양한 돌격대를 운영한다. 대표적으로 ‘속도전 청년돌격대’와 ‘당원돌격대’, ‘105돌격대’, ‘8.28청년돌격대’, ‘광복거리’와 ‘통일거리’, ‘서해갑문’, 여러 고속도로 건설과 철도공사를 위해 각 직장에서 뽑는 돌격대 등이 있고,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사적지, 유적지 등 우상화물 건설을 위한 돌격대와 서해간척지와 지하시설물을 건설하는 ‘민방위돌격대’가 있다. 

북한에서 돌격대는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 필자의 아버지는 1975년부터 돌격대에 동원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추방되어 양강도 삼수군 관동리라는 임산마을에서 생활할 때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대규모 우상화 건설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혁명 전적지 건설 돌격대에 차출되었다.

임산마을을 떠나 합숙생활을 하면서 1975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했다. 1980년대 초 혁명 전적지 건설사업소가 생겨 돌격대원 대부분이 건설사업소 노동자로 편입되었지만 역시 합숙생활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혁명전적지 건설사업소에 편입되면서 우리 가족은 지긋지긋한 산간오지 임산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양강도 혜산시에서 식당 요리사로 일했는데 시 돌격대에 차출되어 1년 이상 일했다. 당시 시당학교 건설을 했는데 건설노동이나 탄광, 광산, 임산 등 중노동을 기피하기 때문에 늘 인력이 부족해 건설을 하려면 으레 그 지역 모든 기업소에 돌격대 인력을 할당했다.

기업소, 특히 상업유통 봉사부문이나 사무업종 등에서는 돌격대원을 차출하기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모든 기업소는 주부를 직장에 받기를 꺼려 한다. 주부들은 돌격대에 마음대로 내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부가 많은 기업은 주로 집에서 출퇴근하는 돌격대에 동원된다. 노동은 힘들지만 그래도 집에서 출퇴근해서 가장 선호한다.

▲ 북한 노동당은 당원 돌격대를 통해 남녀노소 주민 인력을 조직적으로 착취한다.

필자의 동생은 양강도 전신전화국에서 일했는데 민방위 돌격대로 군사시설물인 땅굴 공사에 동원되었다. 땅굴공사는 북한 전지역에서 진행되어 양강도에서도 도 범위의 땅굴공사와 시규모의 땅굴공사가 있었다. 동생은 도급 기업이기 때문에 도규모의 땅굴공사에서 일했다.

동생은 필자의 도움으로 직장 간부들에게 뇌물을 많이 바쳐 외지로 떠나는 합숙형 돌격대가 아닌 집에서 출퇴근하는 돌격대에서 8개월 정도 일했다. 계약 기간은 6개월이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돌격대 교대 인원을 뽑기가 만만치 않아 자기 계약기간보다는 1~2개월 정도는 연장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심한 경우에는 교대자가 없어 계속 돌격대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2회의 돌격대 경험이 있는데 첫 번째는 직장에 취업이 되자마자 북부내륙선 철도공사에 동원되었다. 취업된 직장이 품질감독소로 비생산단위에 속했고 대부분 나이가 많고 주부가 많아 미혼자는 무조건 돌격대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직장에 취직할 때 아예 돌격대에 나가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취직하게 된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돌격대에 동원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 중의 특혜이다. 특히 미혼 여성의 경우에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외지에서 합숙생활을 하면서 돌격대에 나가면 성폭력에 시달려 여성의 일생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미혼 여성이 먼 곳에 있는 돌격대에 나갈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돌격대에 동원된 처녀들에 대해 “어느 딸은 돌격대에 갔다 왔는데 남자들이 너무 달려들어 유방을 주물러서 염소젖통이 되었다”느니, “어느 집 딸은 돌격대에 갔는데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매독에 걸렸다”느니, “아무개는 돌격대에 가서 돌격대 간부에게 잘 보이고 돌격대 간부의 깔개노릇을 해서 당원이 되고 출세길이 열렸다”느니 하는 확인할 수 없는 유언비어들이 나돌기도 했다. 

남성 간부들에게 여성 돌격대원은 성노리개

집에서 약 400리 떨어진 돌격대에서 6개월 정도 생활했다. 실제로 돌격대 생활은 너무도 배고프고, 노동도 너무 힘들고, 또한 돌격대 기간에 간부들에게 잘 보여야 조선노동당에 입당을 할 수 있어 성상납의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남성의 경우 대부분이 20대 초반이나 미혼 남성은 드물고 주로 군대를 다녀온 30대 전후반의 결혼 초이거나 나이가 있다고 해도 40대 전이기 때문에 성적 욕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생리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돌격대에서 성폭력과 성상납은 더 일상화되기도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간부는 거의 남자들인데 이들의 성 요구에 불응하면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활필수품이 부족하고 육체적으로 감당이 어려운 중노동 속에서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 돌격대의 남녀가 서로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상부상조하게 되는데 결혼까지 가기도 하지만 불륜이나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 사회 문제가 되어 입당했다가도 탈당이 되거나 낙태를 하기도 하는데, 한때 북한에서 돌격대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불법 낙태가 너무 많아 김정일이 묻지 말고 낙태 수술을 해주라는 지시까지 할 정도였다. 

필자가 살았던 혜산에서도 속도전 청년돌격대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돌격대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는데 남성이 낙태를 시키기 위해 발로 차고 여성의 배위에 올라타는 등의 행위를 해 여성이 목숨을 잃거나 공동 화장실에 태아를 버리는 등 다양한 사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옥보다 더 지긋지긋한 돌격대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상상이 안간다. 

당시 돌격대에서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꿈 많던 시절에 교문을 나서 
돌격대로 달려 왔다네
말해다오 기타야 내가, 내가 옳았지
아이 참 돌격대는 청춘의 대학>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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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덕 2016-12-05 09:23:00
저런 일들이 이땅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하니 2016-12-04 21:25:13
이애란 박사님 존경합니다.
글 잘읽고가요~^^

유명남 2016-11-18 01:07:39
북한... 여기가 제대로 미친세상이구만! 한국에 떼법깡패들이 좋아는 세상이 틀림없다.한국의 떼법깡패들이 여기에 가서 경애하는 수령놈과 행복하게 살면 될텐데 왜 한국에서 떼거리로 세상을 뒤집을려고 미친짓들을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