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工高가 대한민국 산업화를 만들다
박정희의 工高가 대한민국 산업화를 만들다
  • 류석춘 연세대 교수
  • 승인 2016.11.17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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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역사의 동력]

대한민국 산업화의 토대에는 실업계 학교인 공고가 있었다. 숙련공들을 집중 양성했던 공고들은 한국 제조업과 기술산업에 인적자원을 공급하는 오아시스였으며 경제 발전의 거대한 엔진이 되어 대한민국 중산층을 형성시켰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많은 숙련 기능공을 양성했다. 3년제 공업고등학교 혹은 짧으면 6개월에서 길면 2년 과정의 직업훈련원을 통해 배출된 기능공의 숫자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1973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약 80만에서 100만 정도의 규모였다. 

▲ 일리노이대 사회학 박사·연세대 사회학과 교수·한국동남아학회 이사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를 위해서는 기능공의 대량 양성이 시급하다는 점을 깨닫고 기능공 대량 양산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랑하던 ‘공업 한국(Industrialized Korea)’의 신화는 이 같은 기능공 대량 양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키고 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는 기능 인력이 거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능공을 양성하기 위해 일반 공고뿐 아니라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 공고를 설립하고 지원했다. 

1973년 1월 31일 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 비서관은 박 대통령에게 “방위산업의 근간은 기계공업인데, 우리나라 기계공업은 아직 유치원 단계”라며 기능공의 집중 양성을 건의했다. 그로부터 20여 일 뒤 경북 구미시에서 금오공고 개교식이 열렸다. 

1973년 4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금오공고, 서울성동공고, 광주공고, 부산한독직업훈련원 등을 시범학교로 선정, 2학년 때부터 전공분야별로 전문화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후 이 제도를 일반공고에 확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73년 8개의 시범공고가 지정되었다. 

연간 5만 명의 기능인력 배출 

1974년 2월 21일 문교부는 전국 시·도교육감 회의에서 1978년까지 공고의 특성화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1차 연도인 1974년에는 서울성동공고 등 6개교를 특성화 공고로 지정했다. 문교부는 실업계 학교시설 확충 및 개선을 위해 1974년 한 해에만 50억 원을 투입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고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인력양성소였다. 기계공고는 고도의 정밀가공능력을 갖춘 기계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가공사를 양성하는 학교로, 정밀기계, 배관, 금속, 전기, 용접, 공업계측 등 전공 분야가 있었다. 

시범공고는 중동 진출에 필요한 기능공 중 기계조립, 판금, 배관, 제관, 전기공사 관련 인력의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동 건설 진출을 담당했던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은 이들 학교들과 산학(産學)협동을 맺어 양성 기능사들에게 1인당 20만 원씩의 운영비와 실습재료비를 제공했다. 

특성화 공고는 전자, 건설, 금속, 제철, 화학, 전기 등 특정 분야의 기능 인력 양성을 위해 지정된 학교였다. 이들 학교 역시 기계공고와 거의 동일한 혜택이 주어졌다. 특성화 공고 중 금오공고는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금오공고는 등록금은 물론 학비 전액 지원, 전원 기숙사 생활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바람에 1970년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2급 기능사 자격시험을 100% 통과했고, 국제 기능올림픽에 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했다. 

▲ 1967년 제16회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을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 사진=국가기록원

전국의 97개 공고에서 배출된 연간 졸업생은 5만 명 정도였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원했던 ‘매년 기술자 5만 명 양성’ 과거의 일치한다. 1973~1979년까지 배출된 기능공의 수는 최소 80만, 최다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공고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는 물론 병역과 진로 선택의 혜택이 주어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 줬고, 희망자에게는 저렴한 기숙사 시설 및 저금리의 생활비도 융자해 줬다.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던 농어촌·도시 서민층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기능공 양성은 이후 전두환 체제에서도 이어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기까지 같은 규모의 숙련 기능공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두 시기를 합해 양성된 기능공은 대략 200만 정도의 대규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최첨단 공장이 들어선 울산·마산·창원 지역에 취업했다. 이들은 모두 남성으로서 1960년대 경공업 분야의 여성 노동자와는 질이 다른 전혀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딸 정도의 숙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속적인 기술 축적이 가능하도록 군 생활을 기술하사관(RNTC) 혹은 방위산업체 대체근무 등의 방식으로 마칠 수 있었다. 중동으로 진출해 건설이나 플랜트 공사에 종사하며 달러를 벌어들인 분들도 바로 이들 숙련공이다. 

이들은 현재 50대 중반에 해당하는 세대이다. 1970년대 산업화를 주도했던 이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의 칼바람도 피해갔다. 

당시 대학 운동권은 이들을 상대로 소규모 의식화 모임을 주도하고 또한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을 장악해 나가며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10년간 즉 외환위기가 벌어진 1997년까지 이들은 사업장마다 우후죽순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체제를 부정하는 노동운동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급성장하던 우리 경제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임금과 복지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 

노동자의 중산층화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200만 숙련 노동자를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전체 800만의 중산층이 탄생한 셈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회사가 넘어가면서 불어 닥친 실업의 위기는 이들 숙련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이때부터 노동조합은 조합을 구성하는 정규직의 해고를 막기 위해, 조합 바깥에 있는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98년 현대차 노조의 ‘36일 파업’이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기술교육 시스템이 숙련을 가진 200만 노동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을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에 모두 취직시켰다. 이들이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을 타며 전투적 노조를 만들어 임금 상승을 주도했다. 오늘날 대기업 노조는 평균 연봉 8000만 원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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