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잊을 인연
못 잊을 인연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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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철 변호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무렵이다.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면서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하반기 자유지식인선언의 결성을 준비하면서부터다. 2005년 2월 3일에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자유지식인선언이란 단체가 ‘대한민국의 자유⋅헌법⋅정통성 수호’라는 선언 주제로 864명 지식인들의 지지로 탄생됐던 것이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로 김 변호사와 최광 교수, 그리고 내가 위촉되면서 그와
매우 가까운 접촉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게 됐다.
 
그 당시 나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으로 자유지식인선언과 같은 민간단체를 이끌 준비가 돼 있지 않았으나 김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합류하게 됐다. 지금 회상해 보면 ‘자유지식인선언’ 탄생을 전후해 김 변호사가 보여준 국가의 장래를 위한 결연한 모습, 노무현 정권에 보여준 용감한 경고 등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자유지식인선언은 2005년부터 노무현 정권이 끝나는 2007년 말까지 3년간에 걸쳐 현안에 대한 성명 발표, 정책 심포지엄, 시국토론회, 미래지도자 과정, 통일한국 청년리더십 과정 등을 수행하면서 시대를 일깨우는 ‘자유지식인들의 목소리’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역할은 김 변호사의 투철한 애국심, 불굴의 리더십, 시간을 아끼지 않는 자기 헌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2005년에 성명 발표를 5건(북한 핵개발 관련 성명, 수도분할반대 공동성명, 한미동맹의 위기 관련 성명, 정부의 對언론관 관련 성명, 수사지휘권 발동 관련 성명) 했는데 매번 언론기관의 주목을 받았고 국민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한미동맹의 위기 관련 성명’에서는 “노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과 남방 3각 동맹 탈피론은 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의 안전판이자 국가 안보의 보루인 한미동맹을 해체하는 위험한 발상이며, 한미동맹 해체와 김정일 공조는 해국 행위다”라고 밝히고 있다 (참조: 중앙일보 2005년 4월 9일자).
 
김 변호사는 교육자는 아니었지만 ‘교육은 미래다’라는 철저한 신념으로 자유지식인선언에 ‘미래지도자 과정’, ‘통일한국 청년 리더십 과정’을 개설해 교육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비전을 실천했다. 이들 과정에 거는 김 변호사의 기대와 열정이 대단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며 교학처장으로 송대성 박사가 매우 수고해 주셨음을 말하고 싶다.
 
교회 활동을 통한 추억
 
김 변호사와는 교회활동을 통해서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은혜의교회에 김 변호사는 자주 들러 기도하곤 했다. 김 변호사가 주관하는 북한구원운동 모임에 은혜의교회가 찬양단을 보내면서 김 변호사와 가까워지고, 김 변호사는 상당기간 금요기도회 등에 은혜의교회를 방문하곤 하셨다.
 
김 변호사의 기독교 신앙은 역사관이 투철하고 애국심에 바탕을 둔 신앙으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 변호사가 기도할 때 자주 나오는 내용은 “인류의 역사와 만물의 움직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 이 나라를 이처럼 사랑하여 주셔서 한강의 기적이 있게 하시고 … 이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대국으로 삼아 주시는…” 과 같은 내용이다.
 
은혜의교회 식구들은 아직도 김 변호사의 카랑카랑한 기도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며 김 변호사가 은혜의교회 성도는 아니었지만 성도의 한 사람처럼 많은 식구들이 기억하고 있다. 나도 신앙인으로서 김 변호사가 갖는 신앙심 중에서 부러운 점이 있다. 그는 미래한국, 자유지식인선언 등 수없이 많은 단체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들 단체들이 겪는 재정적 어려움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맡기는 그의 두터운 신앙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갖기 어려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라고 보고 싶다.
 
미래한국신문 편집회의를 통한 추억
 
2004년 6월부터 미래한국신문 제2기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김 변호사와 오랫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아침 7시부터 편집회의를 같이 했다.
편집회의를 회상하면 두 가지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 하나는 그가 매우 부지런해 절대 7시를 넘겨서 참여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과 그가 변호사이면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모든 분야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에게 매우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는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의 폭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기억에 선연하다.
 
미래한국신문은 특히 노무현 정권 시절에 소위 친북좌파세력을 규탄하는 선봉에 나서 ‘나라를 생각하는 보수정론지’로 자리를 굳건히 했고 오늘날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는 미래한국 잡지를 발간하게 되는 기틀을 쌓았다.
 
나와 김 변호사와 만나고 같이 활동한 기간은 5년 정도로 아주 긴 것은 아니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수십 년 같이 활동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과학기술자로서의 내 사고영역을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로 식견을 넓혀준 은인이기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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