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그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 그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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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희 소설가
80년 대 우리나라는 남한 곳곳에서 피가 튀는 파업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생산 현장에서는 어제까지 섬기던 아버지뻘의 아니면 할아버지뻘의 사주(社主)를 아랫도리 한 장만 겨우 가린 맨 몸을 단상에 올려 세워 놓고 죽창이나 장대로 배를 찔러가며 능멸을 일삼던 아슬아슬하던 때가 있었다. “이 기름진 배때기는 우리 피를 빨아 먹고 만들었지?” “임금 인상 쟁취하여 사람답게 살아보자!” 임금만 인상하면 사람답게 살수 있다는 것인지 피 칠하듯 시뻘건 글씨의 현수막이 남한 곳곳을 도배질 했던 때가 있었다.
 
이유가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나라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지 불안하고 막막했다. 웬만한 지식인들까지 좌경화 아니면 반정부로 나서지 않으면 행세를 할 수 없었고 문학 분야까지 좌경 상업주의에 편승하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과부와 고아의 나라’ ‘도둑과 소매치기의 나라’ 6‧25 전쟁으로 얻었던 이 별명들을 딛고 일어나 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기적적으로 치러내고도 좀체 수그러지지 않는 반정부 분위기며 극렬한 이념 갈등이 온건한 사람들의 숨통을 막던 무렵, 나는 어느 날 조선일보 ‘아침논단’이라는 칼럼에서 신선한 필자를 발견했다. 글을 읽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나라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 구조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논리 정연했다.
 
그 글에는 보기 드문 용기가 담겨 있었다. 조국의 미래에 대해 막막하기만 하던 가슴에 희망의 바람 한 줄기가 청신하게 지나갔다. 근면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고 공정한 역사관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매국노와 보수 꼴통으로 돌려세워 놓으려는 수상한 세력 앞에서, 공정한 시각을 의연하게 피력하는 필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김상철 변호사. 나는 그렇게 조선일보의 아침논단에서 그이를 차음 알았다. 그리고 이런 분이 있으니 나라가 잘못될 일은 없으리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분이 계시니 나라가 잘못될 일은 없을 거야’
 
그 무렵 서울 서초동 반포4동 주거지에 살고 있던 나는 대법원 옆 정보사 뒷산으로 자주 산책을 다녔다. 운동이라고 달리 할 줄 모르고 어쩌다가 걷는 것이 그 뒷산이었다. 어느 초가을 별로 가파르지 않은 그 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산 넘어가 궁금해 천천히 산길을 더듬어 넘어가니 동리가 있었다. 서초구에 속한 우면동이었다.
 
우면산을 등에 지고 남태령 앞턱까지 벌판을 이룬 그 산자락 마을은 수십 동의 비닐하우스를 안고 있는 꽃동네였다. 아아, 꽃동네! 너무 반갑고 즐거웠다. 산자락에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나름의 정취를 살린 마당이 있어 동네 길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도회지의 먼지를 씻을 수 있는 정겨운 동네였다. 행정구역으로는 서초구여서 틀림없는 서울이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서울 냄새가 나지 않는 다정한 시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집을 만나면 그 집의 내부를 공상 속에서 거닐어 보고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이 홀로 즐기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우면동 꽃마을 길을 산책하면서 동화 속의 집처럼 다정한 한 집을 만났다. 마당은 넓지 않았으나 꽃밭이 다정하고 알뜰했다. 베고니아, 페추니아, 활련, 옥잠화, 봉선화, 채송화, 백일홍 등 일년초가 층층 꽃을 피웠고 관목들도 다양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트인 채마밭에서 갖가지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짚을 이어 지은 원두막이 있어 시골 정취가 물씬했다. 야트막한 통나무 대문은 열려 있었고 문패는 보이지 않았다. 이 집의 가장은 어떤 사람일까. 주부는 어떤 여성일까. 자녀들은 또…. 그 후로도 산을 넘으면 우면동 꽃동네를 자주 산책하면서 그 집 앞에서 머물러 오래도록 공상을 즐겼다.
 
그리고 그 겨울 어느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고 뜻밖에 그 자리에서 김상철 변호사와 인사를 나눴다. 나이에 비해 저력 있어 보였고 침착했다. 조국의 미래를 근심했고 애국애족의 길을 가게 될 투지도 보였다. 시국과 역사를 공정하게 해석하고 바른 길을 지켜 나갈 용기도 보였다. 그를 만나는 동안 이제 정치도 세대교체를 이뤄 젊음이 맡아야 되겠구나 싶기도 했다.
 
그 겨울 6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내각이 구성되고 각료가 발표될 무렵 김상철 변호사는 서울시장으로 임명됐다. 뜻밖의 인선이었으나 젊고 참신한 시장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가 컸다. 더구나 그의 예리한 분석과 수려한 필치의 칼럼을 반겨 읽던 나로서는 설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취임 사흘도 안 돼 서울시장 자리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이 살고 있는 개인주택에 불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신문마다 대서특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시장의 사택 사진을 들여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건? 우면동 꽃마을의 그 집이 아닌가?
 
언론들은 갖가지 트집거리를 산더미처럼 잡아댔다. ‘그 집은 그린벨트 지역이다. 그린벨트 지역에서 법정평수를 어기고 증축해 건평 30평이 넘었다. 나머지 700평의 토지에는 밭작물을 심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나무를 심고 정원으로 가꿨고 볏 집을 이은 정자까지 만들어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럴 수가. 동화 같던 그 집이 서울시장의 사택이었다는 것도 소설 같은 이야깃거리였지만 그 집에 그렇게 갖가지 트집거리가 있어 서울시장 자리를 물고 늘어지는 그 현상이 기가 막혔다.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무슨 모리배의 장원(莊園)도 아니고 으리으리한 대저택도 아닌 그린벨트에 지은 30평집이 이렇게 요란하게 문제가 되다니. 이상했다.
 
퍽 촉망되던 정치 지망 젊은이는 그렇게 7일 만에 서울시장 자리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린벨트 지역에 지은 30여 평 집 때문에 뜻이 꺾이고 말았다. 법은 엄연했다. 공직자가 법을 어겼다면 일반 시민보다 책임은 더 크다. 하지만 동화처럼 평화롭고 백설공주 난쟁이의 집처럼 작은 그 집을 물고 늘어져 7일 만에 시장을 끌어내리다니. 그렇게 시장이 경질됐지만 어쩐지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요란한 소동, 개운치 않은 뒷맛
 
그리고 그해 얼마 후 ‘7일간의 서울시장’이라는 책자를 받았다. 김상철 변호사가 보낸 책자였다. 그린벨트 구역에 있는 집을 구입하게 된 경위, 집터 밖의 녹지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 대한 상세한 해명과 7일 만에 서울시장에서 내려서야만 했던 엄청난 일을 가족이 신앙 안에서 극복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술회한 책자였다. 책자의 내용은 정치적인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전하는 신앙 고백의 전도서(傳道書)였다.
 
개인의 역사나 한 국가의 역사에는 밝혀지지 않은 행간(行間)이 있다. 7일간의 서울시장 사건이 하늘의 경륜이었다고는 하지만 문민정부의 공직자가 거주지를 그린벨트에 두고 실정법을 어겼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단 7일 만에 낙마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김 변호사는 한동안 인권과 정의를 위해 과감하게 앞장섰고 독재에 반항했다. 그랬던 그가 5공 이후 보다 깊은 안목으로 조국의 미래를 다져 나아가야 할 지평을 열어 긍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앞날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에 실리는 그의 글은 다분히 공정한 자유진영의 인사들까지 호의를 가질 만했다. 누구인가 그것을 질시(嫉視)하고 변절로 몰아붙인 사건은 아니었을까.
 
문민정부의 첫 시장으로 출범한 그 희망의 범선을 돌이켜 기수(機首)의 순을 자른 자는 누구일까. 그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이었으며 그 손은 어떻게 그리 광범위하게 연출을 해냈을까. 매스컴의 생리가 그런 것이었을까. 대중 생리가 그런 것이었을까. 어제까지 환호성으로 떠받들던 영웅도 누구인가의 이빨에 한 번 물리기만 하면 환호하던 대중은 화산처럼 증오를 폭발시키고 ‘죽여라!’ 아우성친다. 그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우리 사회의 뒷전에서 흐르던 불안한 기류가 의기양양 뜻을 이룬 미묘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다음해 정초. 연 전에 김상철 변호사와 자리를 함께 하는 자리에 초대 안내했던 장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제의 그 김 변호사 댁에서의 초대였다. 바로 그 동화 속의 작은 집.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대문 앞에는 쓸어낸 눈이 아직 쌓여 있었다. 그리고 고풍스러워 보이던 주물 외등에 등황색 불이 켜져 대문 앞은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다정했다. 정원을 거쳐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주 작은 현관. 한 사람씩 신발을 벗고 신을 수밖에 없을 만큼 작고 좁은 공간이었다.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에는 안락의자 한 세트와 소박한 벽난로, TV는 14인치. 그렇게 열린 공간에 그토록 살림이 절제된 거실이었다. 타인을 의식해서도 아니고 어떤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마땅히 지켜져야 할 사람의 도리로서 절제가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지상 평수 건물 30평. 거실과 안방, 그리고 아주 작은 부엌에 이어진 작은 공간을 식당으로 삼은 것이 전부인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었다.
 
식당에 있는 식탁은 마주 앉은 사람의 코가 맞닿을 만큼 다정한 공간. 그날 초대된 손님들은 그 작은 식탁에서 거의 코를 맞대고 음식을 들며 담소를 즐겼다. 중국에는 ‘그렇게 작은 식탁에서라면 원수도 다시 화해가 되고 친해질 수밖에 없다’는 속담이 있다. 원수도 마주 앉아 화해가 될 만한 식탁에서 우리는 다정한 시간을 즐겼다.
 
식탁을 물린 뒤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려다보며 궁금한 눈길을 보냈더니 부인이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궁금하시지요? 지붕 밑을 아이들 방으로 만들었어요.” 한 사람만 간신히 올라갈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경사진 지붕 가운데 창문을 내고 방을 만든, 아들과 딸의 다락방이었다. 삼각형의 공간에는 책장을 짜 넣거나 반침을 만들어 옷이나 물건을 정리해 넣는 정리장으로 만들었다. 지붕 밑 공간을 어떻게 그리도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게 만든 공간이었다.
 
지상 평수 30평으로 제한된 그린벨트 지역의 작은 집에서 지붕 밑에 아이들 방을 만든, 구차하지만 지혜로운 착안이었다. 매스컴이 서울시장 자리를 물고 늘어진 곳은 부엌 뒷문 밖을 다용도실로 쓰기 위해 늘린 작은 공간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들 달려들었는지 기자마다 각도를 달리해 찍고 또 찍어 신문에 보도한 사진으로는 주인조차 자기 집인 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장돼 있었다.
 
모두의 미움을 받은, 너무나도 작은 그 집
 
다락방에서 내려와 계단 밑 난간 옆에 작은 문이 보이기에 발길을 멈췄더니 그 댁 주부는 다시 수줍어하면서 문을 열었다. 한 간 쯤 되는 계단 밑 기도실이었다. 장판방에 성경책과 찬송가 몇 권, 창문이 없어 문만 닫으면 밀폐된 공간이었다. 아아, 주님은 화려한 주인공을 선호하지 않으시는가…. 이들에게 끝 날까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 하셨는가.
 
그렇게 호되고 혹독한 일을 겪었지만 김상철 그이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오로지 하늘나라와 그 의(義)를 따라 나라와 민족의 미래와 이 민족이 짊어지고 가야만 할 인류를 위한 비전의 기개였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2002년 미래한국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한미우호협회를 결성했고 태평양아시아협회를 이룩해 조국의 미래를 신앙 안에서 다져갔다. 통일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나아갈 길을 다지기 시작했다. 맡겨진 일을 묵묵하게 수행해 가며 아내를 사랑하고 남매를 보호하듯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기도 속에 끌어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미래신문을 간행해 나갔다. 뜻을 함께 하겠다며 동지들도 모여들었다.
 
그러나 의로운 영혼은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 공사를 착수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완수하기까지 끝없는 비웃음과 훼방, 살해의 위협을 겪듯이 김상철 그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조국의 미래를 설계해 가며 역사를 바로 잡아가려다가 동료로 믿었던 몇 사람에게 덜미를 잡혀 억울하고 또 얼울한 고발을 당하던 가운데 2008년 12월 과로로 쓰러졌다. 느헤미야에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 악의(惡意) 가득 찬 훼방꾼들이 에워싸듯 의로운 영혼을 악의 세력이 에워쌌다. 그렇게 4년 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2012년 12월 그리도 그리던 하늘나라로 떠났다.
 
우리는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벗어나는 사건은 없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찬송가 가사를 지은 루터교 출신 벤자민 슈몰크 목사는 실레지아 지방에서 목회하던 중 천주교로부터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던 끝에 반신불수가 되고 끝내 백내장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핍박 가운데 불치의 병을 얻은 그가 지은 찬송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
서’를 우리는 오늘도 눈물의 은혜 기운데서 그이를 기억하며 찬미를 부른다. 다만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그리도 그리던 하늘나라로 간 김상철 그이는 지금, 온갖 억울함을 알고 계신 주님 앞에서 평안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지상(地上)의 일을 주님께서 공평하게 판결해 주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 제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눈물어린 눈으로 주님께 애소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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