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절, 애국진영을 이끌다
위기의 시절, 애국진영을 이끌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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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상임대표 · 전 서울특별시교육위원
존경하는 김상철 변호사!
글을 쓰려니 마치 김 변호사가 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고, 구국의 일념으로 좌경화돼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변호사와 열심히 애국 활동하던 때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2003년 3월 나는 ‘한국 국‧공‧사립 초‧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전국교장회장)을 맡으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에 의해 학교 교육 현장이 유린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회장으로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듬해 4월에는 전교조에 시달리던 충청도 어느 시골마을의 보성초등학교 교장이 자택 뒷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충격적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했다. 이런 때 북한에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겨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체류했는데 머무는 동안 보성초등학교 사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전국교장회 임원회를 소집해 ‘전국교장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유시민연대를 이끄시던 안응모 전 내무 장관, 정기승 전 대법관, 임광규 변호사 등 세 분이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 분들 말씀이 시청 앞에서 ‘전국교장대회’를 개최하면 보수우파에서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교장대회 개최건 때문에 안기부, 남대문경찰서, 교육부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회를 개최하면 주모자인 나만 징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회유에도 교장대회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대내외에 천명했지만 불행하게도 임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시청 앞 광장 개최는 포기하고 서울특별시교원연수원에서 치렀다. 전교조의 만행을 공개된 장소에서 발표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교장들의 존재감이 만천하에 공표돼 큰 효과를 보았다.
 
그때 보수진영에서는 3‧1절 행사 다음 순서로 6‧25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 보수진영의 통합단체인 ‘반핵반김 자유통일국민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으신 김상철 변호사는 교육계의 대표로 참여한 나와 자연스럽게 조우하게 됐다. 말로만 듣던 김상철 변호사님과의 첫 만남이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분’
 
그의 첫인상은 대단히 똑똑하고 상대방을 끄는 능력과 리더십이 남다를 뿐 아니라 신념에 찬 모습은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분임을 직감할 수 있게 했다. 그로부터 김 변호사와 나의 관계는 집행위원장과 국민대표의 관계를 넘어 애국동지로 발전돼 서울클럽에서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씩 조찬회를 갖고 국가적 현안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대책을 세우는 등 활발한 애국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국가적 현안에 대한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 몹시 기뻤다. 회원은 약 10명에서 30명 정도로 교수, 시민단체 대표들이다. 그는 벌써 탈북자들의 안전한 인도와 구원을 위해 ‘북한구원운동’을 설립해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있어 내가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도와드린 일도 있다. 80년대 격렬한 반미운동에 대응해 ‘한미우호협회’를 만들어 한미동맹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김 변호사의 혜안은 범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조찬회 경비가 만만치 않아 논현동의 자그만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논의를 계속했다.
 
어느 날 김 변호사는 전격적으로 지성인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자유지식인선언’을 창립해 김상철 변호사,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 박성현 전 서울대 교수 세사람을 공동대표로 선임하고 나는 상임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자유지식인선언은 좌경화돼 가는 나라를 지성인들이 침묵하는 것은 직무유기로 보고 국가적 현안들에 대해 지성인들이 적극 개입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자금 부족과 대학 교수들의 비협조로 막을 내려야 했다. 짧은 기간의 실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10‧4공동선언의 위헌성’ 토론회를 개최해 이 사안을 부각시킨 점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철승 원로가 모임에 나오라고 하여 나가보니 또 다른 범 시민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보수우파가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고, 반핵반김 국민협의회측과 협의해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핵반김측과 물밑 접촉을 했지만 금전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가 있어 더 이상 교섭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일단 민족민주 비상국민회의에 김상철 변호사를 포함해 공동의장 8명중 1명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프레스센터 20층에서 개최된 창립식에서 회장을 뽑는 순서가 되자 추천위원들 사이에서 의외로 이상진을 대표로 세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미국에서 돌아와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김 변호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지만 그때 왜 나를 세우려고 했는지는 나도 확실히 몰랐다.
 
1시간 이상 논의 끝에 김상철 변호사를 다시 세우기로 했지만 상처를 받아 끝내 대표 집무를 거부해서 그후 이철승 원로가 상임대표를 맡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그 상처로 공동대표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유명무실한 단체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김 변호사는 나에게 “당신 나쁜 사람이야”라는 험한 말씀을 하실 정도로 나에 대해 오해를 했지만 간곡히 사과의 말씀을 올려 다시 보수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 김 변호사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빚어진 해프닝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밝히지 않겠다.
 
옆에서 바라본 지도자 김상철
 
이 글을 쓰면서 애국운동을 함께 했던 나로서는 현 시국에 반드시 필요한 거목을 너무 일찍 잃어버려 안타까운 마음에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꼈던 그의 지도자상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본다.
 
첫째, 앞을 내다보는 남다른 혜안을 가진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반핵반김 자유통일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리멸렬했던 반공애국단체를 보다 통일된 조직으로 만들어 효과적인 보수운동단체로 거듭나게 한 데 크나큰 역할을 담당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탈북민을 위한 탈북난민돕기운동본부의 창설 운영, 한미우호협의회 등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예견의 산물이다.
 
둘째,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서울법대 수석 졸업이라는 개인능력의 과신에 따른 결과인지는 모르나 항상 자신감 있는 그의 모습이나 태도는 타인에게서 볼 수 없는 장점이지만 단점일 수도 있기는 하다.
 
셋째, 신앙으로 다져진 겸손과 포용력은 더 그를 돋보이게 한다. 회의 때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모습이 그를 더 신뢰하게 해서 항상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큰 인물을 잃었고 국가적인 손실이라 여겨 며칠간 충격 속에 그의 쾌유를 빌어 왔지만, 2012년 12월 13일 그의 소천소식에는 그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곁에서 영원히 사실 그를 생각하며 조용히 기도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장례식장에서 쓸쓸히 되돌아와야 했다.
 
하늘나라에서도 나라걱정에 노심초사하실 거인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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