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분노가 허락한 만남
의로운 분노가 허락한 만남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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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前 국무총리
김상철 회장과 첫 만남을 가진 것은 나의 생애에서 수모와 아픔을 겪었던 이른바 밀가루세례 사건이 있은 후의 일이었다. 나는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고 있던 중 아프리카에 대통령특사로 다녀오게 됐다. 불가피하게 강의를 중단하게 돼 귀국 후 보강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
 
특사로 다녀온 후 나의 신분은 국무총리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을 내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학생과의 약속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 무리하게 시간을 내 보강을 하게 됐다. 그때 강의실에 밀려온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서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다음날 아침 다소 몸이 불편했으나 평상시처럼 출근을 했다. 기자들의 “지금 심정은 어떠십니까?”라는 질문에 “내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남긴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다”고 소박하게 표현한 이 말이 언론에서 크게 취급됐다. 신문 사설뿐 아니라 논객들의 칼럼이 지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제일 먼저 나온 것이 김상철 변호사의 칼럼이었다. 논지는 분명했다.
 
학생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탓하기도 했지만 노골적으로 뒤에서 학생들을 선동하는 세력에 대한 공박도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김 변호사의 칼럼은 상상 이상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연달아 여러 칼럼이 등장했으며 사회 여론은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때까지 만난 일이 없는 김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물론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지만 학생운동과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개별적인 만남에 의해서 김 변호사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충만한 경륜에 대해서 남다른 깊은 인상과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가 김 변호사는 미래한국신문이라는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나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됐다. 이 계획의 기본취지는 대략 이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여러 분야에서 점검하고 나아가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즉석에서 찬동했으며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 후 김 변호사는 재정적인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예정대로 주간신문을 발행했다. 획기적이며 대단한 시도였다. 미래한국신문의 발행을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자연히 자문위원의 역할을 하게 됐다.
 
칼럼 한 편으로 시작된 인연
 
미래한국신문은 비교적 작은 간행물이었으나 그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지식인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념적인 면에서 좌파의 논리에 대항하는 정연한 기본을 제공해줬다고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미래한국신문은 건전한 대한민국의 장래가 명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적지 않은 호응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이 세습 집권했지만 적지 않게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와 나는 새로운 연구 과제를 가지고 만나게 됐다. 2006년에 있었던 일로 생각된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김정일 정권의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모저모로 논의한 끝에 정권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 기아에 시달리는 민중의 동요가 있을 것이라는 점과 인민의 고통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정권 내부의 동요와 미국의 금융압박과 경제제재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등이 논의됐다. 결국 김정일 정권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와 같은 논의를 계속하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위해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로 했다. 다소 젊은 층의 전문지식 소유자 5명 정도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으며 매주 한차례씩 정규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이름 하여 ‘목요모임’이었다.
 
목요모임은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 가지 당면한 과제를 탐색하기로 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과제가 논의에 포함됐다. ①세계 여러 나라 전문기관에서 보고 있는 김정일 정권의 현상에 대한 견해를 수집한다. ②국내 전문 인사들을 면담해 김정일 정권에 대해 견해를 정리한다. ③새로운 지도체제의 존립과 정책의 방향을 모색한다. ④중국의 영향과 미국의 향배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일을 포착한다. ⑤ 당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전략과제 도출한다.
 
또한 모임에서는 김정일 정권의 불안정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도 중지를 모으기로 했다. 특히 ①친북세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②좌파의 퇴조 현상이 초래될 것인가? ③대북지원은 더 증대할 것인가? ④남북 간 인적‧물적 교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⑤ 남북기본합의서의 실행에 의해 군축론 등이 대두할 것인가? 등의 사항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이러한 과제를 설정한 목요모임은 도합 6명의 회원이 각기 집중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논의를 계속했다. 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경비의 문제가 있었으나 다행스럽게 독지가의 지원을 얻을 수 있어서 과제의 수행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나라의 앞날과 통일의 문제를 중심으로 매주 만나서 논의를 하게 되니까 자연히 서로 이해를 하고 이념적인 면에서의 일체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동지의식이 생긴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일종의 동지의식으로 결속됐다고 할 수 있으나 나 개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김 회장과의 접촉에 의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판단력’의 소유자
 
무엇보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그의 열정과 비전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다. 언제나 개인보다도 나라라는 전체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그의 논리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우국지사이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경륜가라고 할 수 있다.
 
김 회장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성은 냉철하고 범상한 판단력이다. 물론 그 점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람의 자질을 평가할 때 판단력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간주되는 덕목이다. 이때의 판단력이란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소유라기보다도 지식의 창조와 활용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사고력이며 이 점에서 김 회장은 남이 근접할 수 없는 사고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 무척이나 부러운 일이었다.
 
김 회장의 필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랫동안 ‘고시계’를 이끌어 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의 문장은 앞뒤가 맞는 논리적 문장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달필이다. 서울시장을 1주일 만에 사임한 다음 불과 열흘 이내에 시장 사임의 글을 한 책으로 발표 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필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저히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 회장의 예기치 않은 건강 악화로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으나 그는 나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 나라의 장래를 내다보는 비전, 예리한 분석력과 판단력, 문필의 유연함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나에게 잊지 못할 좌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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