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나는 1999년 11월 서울생활을 시작한 탈북자다. 그리고 그 해 12월 김상철 변호사님을 만났던 ‘복 받은 탈북자’다. 모든 것이 서툴고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던 당시의 나에게 변호사님은 산악(山岳) 그 자체였다.
처음 변호사님을 만났던 곳은 서울 중심가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나보다 먼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들과 변호사님이 함께한 자리였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변호사님에게 탈북자들도 소개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됐고 “저는 북한군 대위였고 작가였습니다”고 하자 “오, 김성민 씨!”하고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해 가을 ‘월간조선’에 냈던 나의 수기를 보셨다고 했다.
당시는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들의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뿐더러 군관(장교) 출신이 별로 없던 터여서 기억하시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변호사님은 나에게 “강제북송까지 당했었다면서요?”, “그 손등에 났었다던 상처… 지금은 아물었죠?” 하시며 수기 속 작은 일화까지 기억해주시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을 보자고 한 것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일을 토론하기 위해서”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탈북민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궁금했다.
그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들이 변호사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당신이 하셨던 이야기가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김성민 씨처럼 강제북송과정에서 혹은 탈북과정에서 이미 한 번씩은 ‘죽었던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지금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덤으로 사는 인생을 무권리한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또 탈북난민들의 인권을 위해서 바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한 달에 두 번씩 변호사님과 탈북자들의 만남은 계속됐고 2000년 3월 김상철 변호사님의 입회하에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내의 ‘탈북자봉사단’이 발족됐다.
변호사님과 탈북선배들의 배려로 ‘탈북자봉사단’의 첫 단장으로 일하던 시절은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동료들과 함께 대학로와 광화문 광장 등에서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고 다른 한쪽으로는 유엔에 보내는 탈북자 난민 인정 대국민 청원운동을 진행하면서 책에서나 보아오던 ‘삶의 보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 그 분과 함께 느낀 삶의 보람
그렇게 모아졌던 100만 명의 서명지를 들고 “자 이제 제네바로 갑시다!”고 하시던 변호사님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김상철 변호사님을 위시해 박근 전 유엔대사님, 정기승 대법관님, 임광규 변호사님, 조안리 스타커뮤니케이션 사장님 등 일행과 함께 나도 제네바로 갔다.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가는 길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스위스 행의 의미’만을 되새겼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 중 유일한 탈북자인 나에게 현재 중국과 제3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상황을 전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짊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내 긴장해 있는 나에게 늘 마음 써주시던 김상철 변호사님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뇌리 속에 사진처럼 박혀 있다. 오가타 사다코(緖方貞子)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을 만나던 날 아침에는 손수 방으로 찾아오셔서 “김성민 씨는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전체 탈북자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진솔하고 책임 있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따뜻이 격려해 주셨다.
나는 그날 김상철 변호사님의 말씀대로 고통 받고 있는 전체 탈북자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심정으로 내가 겪었던 탈북과정과 중국공안에 의한 체포, 강제북송과정을 이야기했다. 북‧중 국경지역의 관문인 ‘도문다리’를 건너 강제북송 될 당시 할 수만 있다면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고 싶던 아픔과 북한 보위부에서 당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저들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려 다시 두만강을 건너면서 죽어서라도 남조선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 북한여성들이 돼지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에 팔려 중국 오지를 떠돌고 있는 이야기도 모두 했다.
오로지 자유를 위해 그 모진 고난을 겪어야 하는 탈북자들이 국제법과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중국 당국에 의해 지금 이 순간도 북한으로 끌려가고 있다고 외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젖어 올랐다. 오가타 사다코 여사도 끝내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김상철 변호사님에게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저들 탈북자들의 눈물을 대한민국의 지성이 닦아주지 않으면 누가 닦아 줄 것인가”라고 이야기했다.
사타코 여사는 물론 동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젖어들었다. 그 때 유엔난민 고등판무관과 관계자들을 향해 김상철 변호사님이 하신 이야기가 있다.
“탈북자들이 난민으로 된다는 것은, 탈북자들에게 난민 지위가 주어진다는 것은 2천3백만 북한동포를 구원하는 길이며 짐승보다 못한 오늘을 사는 중국과 제3국의 탈북자들에게 저들도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는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보람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100만 명의 서명을 가져왔지만 대한민국의 지성과 양심이 살아 있는 한 ‘탈북난민보호운동’은 계속될 것이며 천만, 이천만의 서명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제 변호사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하지만 당신께서 남기신 뜻은 ‘탈북난민보호운동’이라는 소중한 가치로 우리 탈북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 아직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탈북민 보호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가치관을 치켜들었던 김상철 변호사님!
탈북민들을 그토록 아껴주셨고 사랑해 주셨고 내세워 주셨던 당신께 ‘탈북자봉사단원’들과 탈북민들의 이름으로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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