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함이 자랑이었다
함께함이 자랑이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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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이화여대 겸임교수

故김상철 변호사님을 회고하는 글을 쓰려 하니 ‘하나님도 참 야속하시지 우리나라가 더 필요 로 하는 김 변호사님을 이토록 빨리 데려가시다니…’하는 마음이 든다.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김상철 변호사님은 이미 생전에 그 어떤 영웅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더 큰 일을 하신 분이다. 너무 힘들고 너무 바쁘게 일을 많이 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하나님은 그를 일찍 데려가셨나 보다.

인간 사회에는 늘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앞장서서 끌고 가는 사람이 극소수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사회는 조금씩 우리가 살기 좋은 곳으로 진화하는 것일 게다. 김상철 변호사는 바로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사회, 자유로운 사회로 만든 데 혁혁한 기여를 한, 이 사회를 앞장서서 끌어간 정말 몇 분 안 되는 어르신중의 한 분이다.

언젠가 김 변호사께서 “이제 우리나라는 권력자를 아무리 험악하게 비판해도 고문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투쟁해 왔던 것이다”고 말씀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이 한 마디에 한국의 현대사가 포악한 독재국가로부터 세계에 내놓아도 부럽지 않을 민주국가로 전환된 과정이 다 녹아들어 있다. 권력자를 비판했다가 그 날로 끌려가 얻어터지는 그런 일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불과 20~30년도 되지 않는 일 아닌가? 인권 변호사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상철 변호사께 다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김상철 변호사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지고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것은 김 변호사께서 이 나라의 종북세력 및 북한 독재체제에 맞서 다른 싸움을 전개하실 무렵부터였다. 한국 내의 독재정권에 저항한 투사로서의 김상철 변호사를 잘 알고 있던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운동의 방향을 바꾸신 김상철 변호사와 직접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30대 후반 아직 신출내기 국제정치학자로서 필자는 평소 김상철 회장님이 직접 만드시고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던 한미우호협회라는 조직이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 회원으로 계시는 분들이 쟁쟁해서 감히 회원으로 가입시켜 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한 간단한 발표 기회를 얻었고 김 회장님은 쾌히 필자를 회원으로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 아닌가. 이 세상을 끌어가는 분이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옳은 걸로 보였던 사람

공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대체로 비슷하겠지만 자기 일 외의 다른 일, 즉 공공선을 위한 일에는 소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갑자기 속된 말로 김상철 변호사의 ‘꼬붕’ 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이 하시는 일이 필자의 주관에서 보기에 정말 다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무렵 김상철 변호사가 하시는 말씀들, 특히 남북한 관계, 한미동맹에 관한 언급 등은 필자로 하여금 ‘이 분이 법학을 하시는 분이야, 아니면 국제정치학을 하시는 분이야?’라고 반문해야 할 정도로 내 생각과 꼭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김 변호사님의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미래한국’의 출범이었다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미국에 다시 가서 전쟁사 공부를 하고 있던 중 미래한국이라는 주간 신문을 창간하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발기인으로 참가하라는 김 회장님의 부탁이 있었다.

신문이 창간된 후 몇 달이 지나 귀국한 필자는 1기 편집위원으로 미래한국을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같이 참여했다. 1주일에 한번 서울클럽에서 조찬 모임으로 편집회의가 진행되었다. 1년 내내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열린 편집회의는 그야말로 우국지사들의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살리는 방법을 생각하는 모임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늘 김상철 회장님이 사회를 보시고 문용린, 류우익 교수님 등 지혜가 탁월하신 편집위원들의 견해가 오고갔다. 나는 미래한국 1기 편집위원으로 편집회의에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갈 때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특히 김상철 회장님으로부터는 ‘애국’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미래한국 필진들이 좌파 정권 하에서의 분노와 울분을 글을 쓰며 달래기도 했을 정도로 미래한국은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지성들을 위로하고 계도하는 신문으로서의 소임을 했다고 생각한다. 미래한국을 읽으며 통쾌함을 느낄 뿐 아니라 글 한 자 한 자가 소중한 지혜가 되었다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김상철 회장님은 미래한국신문의 로고를 크게 붙인 낡은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다니셨다. 얼마나 만나는 분이 많으신지, 얼마나 분주하게 일을 하시는지는 김상철 회장님의 자동차를 서울 시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2007년의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래한국신문은 좌파 정권을 종식 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2008년 초 김상철 회장님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발전과 통일을 구상하자는 의미에서 ‘미래연구원’을 구상하고 계셨다. 나도 이에 적극 동의했다. 그 무렵 나는 ‘우리도 강대국으로 나아가자’라는, 논문보다 격문에 가까운 글을 써서 김 회장님에게 보여 드렸다. 내 글에 김 회장님은 적극 지지, 동의하셨다. 나는 당시 미래연구원의 연구처장으로 참여했다.

파주에 있는 미래한국 빌딩 3층을 미래연구원으로 삼았고, 연구원 내에 있는 우남홀에서는 각종 세미나와 강연회가 열렸다. 좌파 정권을 종식 시킨 후 약간의 심적 여유가 있었고 미래한국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자는 구상 회의를 여러 차례 열었다. 그때 나는 김 회장님에게 신문 형식이 아니라 고급 교양잡지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했었고 회장님도 그것이 좋을 것 같다고 동의하셨다. 오늘 미래한국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꿈속의 만남

2008년 늦가을 미래한국신문사가 있는 파주는 온갖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고 그때 필자가 본 김 변호사님의 모습은 평화롭고 따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이게 웬 청천 벽력같은 소린가! 김 변호사님이 쓰러지셨다니!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김 변호사님을 뵙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김 변호사님이 깨어나신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채 누워계시는 김 변호사님에게 달려갔다. “이 박사 왔구만.” 나는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런데 김 변호사께서 “이 박사 한 2년 누워 있다 보니 세상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그 동안 세상에 무슨 일 있어났는지 설명 좀 해 줘.” 아, 역시 김 변호사님은 세상을 위해 할 일이 너무나 많으신 일꾼이시구나! 그날 꿈이 너무 생생해서 고인의 사위인 현 미래한국 김범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상철 회장님은 이제 천국에서도 우리와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세월이 빨리 지나가고 있다. ‘우리도 강대국이 되자’는 필자의 글에 적극 동의하며 칭찬해 주시던 김 회장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이룩하고 살기 좋은 모범적 강대국이 되는 그날 한미우호협회를 만들고 미래한국을 만드신 김 회장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님은 가셨지만 그가 못 다 이룬 꿈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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