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편집국 이야기
미래한국 편집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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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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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영 미래한국 편집국장

“강 부장, 오늘 저녁 하늘에 무지개 뜬 것 일기에 쓰게.”

미래한국신문 창간 초기 전 직원이 신문사 앞 ‘뜨락’ 식당에서 회식을 하고 나오다 아름다운 무지개 모습을 보고 모두 좋은 징조라며 감탄할 때 김상철 회장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미래한국>의 제호는 하늘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씨를 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현안 문제 분석과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는 편집 방침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늘색은 미래한국의 사색(社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호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진한 색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김 회장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2002년 5월 27일 미래한국신문 편집부장으로 입사했다. 역삼동 1층에는 변호사 사무실과 김 회장님 방이 있고 2층에 신문사가 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다보니 창간일인 6월 15일 며칠 앞둔 마감일을 디데이로 정하고 매일 날짜를 알 수 있도록 표시한 종이를 붙여 놨다. 취재기자들은 2월부터 선발돼 창간준비를 해왔다고 했다. 평일에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감 때는 밤새 일하기 일쑤였다.

3호 때인가는 편집 실무진이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일이 있다. 56시간을 한숨도 못 잤다. 새벽까지 마감한 후 오전 7시 남산 서울클럽에서 다음 편집 방향을 논의하는 편집위원회에 가려면 사무실에서 1시간 정도 눈을 붙이다 가는 일이 허다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던 시간들

김 회장님은 편집위원회 말고도 1주일이면 3-4일씩은 오전 7시 회의에 참석하는 등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하셨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10만 이상 동원하는 서울시청 앞 애국집회를 처음으로 기획 추진하는 등 각종 애국행사에 심혈을 쏟으신 것이다.

미래한국신문은 구국의 사명으로 보수 논조를 계발하고 이를 주요 언론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신생 소규모 언론이라 인지도가 낮은 데다 정권에 반대되는 입장의 기사를 많이 쓰다 보니 광고주들이 광고 내기를 꺼렸던 게 사실이다. 경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11년 이상 유지돼 온 것이 어쩌면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미래한국신문은 창간 이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전통을 이어오는 것이 있다. 매주 1주일에 3번 예배를 드렸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오전 9시와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오후 5시에 전 직원이 참석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화요일 저녁 7시에는 미래한국신문의 발전을 기원하는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함께 해서 예배와 뜨거운 통성기도를 했다.

당시 마감이 화요일이어서 아래층 회장님 방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2층 신문사까지 들렸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길 맞은 편 한정식집에서 항의를 할 정도였다. 그래도 기도회를 계속했다. 지금은 월요일과 금요일에만 예배를 드린다. 아무리 바빠도, 모두 참석하지 못해도 참석 가능한 직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수지 타산이 안 맞아 몇 년 가지 않아 문을 닫았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하나님 계산으로 이 땅에 있어야 할, 하나님이 써야만 할 도구라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는 언론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오늘까지 미래한국이 존재, 발전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김 회장님은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미래한국을 만들고 있다. 세상의 다른 언론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김 회장님은 미래한국신문의 1면에 ‘시대를 보는 눈’을 쓰셨다. 글이 알기 쉽고 논리가 명확하며 문체가 독특하다. 김 회장님은 글 쓰는 시간만큼 교정보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셨다. 한번은 편집위원회 때 한 편집위원이 사설 같은 ‘시대를 보는 눈’을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며 써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편집위원이 김 회장님의 독특한 문체와 메시지를 누가 대신할 수 없고 이것이 미래한국신문의 정체성이 되다시피 했다며 반대해 기존대로 진행하게 된 일도 있다.

미래한국신문은 창간기획으로 ‘역사를 움직인 기도’ ‘Beautiful Korea 류우익의 국토기행’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 ‘문용린의 이런생각 저런생각’ ‘주간인물’ 등을 연재했다. ‘역사를 움직인 기도’는 모두 33개의 주제를 기자들이 분담해 취재해 1개의 주제를 매호 1개면 전체 분량으로 게재했다. 한국 현대사의 고비 고비마다 어떻게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기도가 어떻게 드려졌는지를 탐구해 기사를 썼다.

첫 회 ‘대한민국 건국과 국회개회 기도’에서는 1948년 5월 제헌국회를 개회했을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며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 인도를 부탁한 것이 국회 속기록 1호임을 밝히고 있다. 일제시대의 3‧1운동 등 독립운동, 6‧25전쟁, 월남전, 엑스플로 74, 88서울올림픽 등을 다뤘다. 이 기획은 회장님이 직접 내용을 자세하게 점검하셨다.

기자들은 몇 달 전부터 담당 주제를 받아 자료를 찾고 취재하며 준비해나갔다. 그래도 막상 마감 때가 되면 회장님이 보시고 수정 보완 사항이 많아 다른 기사가 다 마감됐는데도 끝내지 못해 새벽 3시, 4시까지 고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힘들게 기사를 썼지만 신문이 나오면 그만큼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 연재됐던 내용을 2007년 8월에 책으로 발간했다.

그가 남긴 미래한국은 ‘구국의 매체’

미래한국신문은 단순한 언론이라기보다 시대를 선도하는 구국매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 민족지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처럼 좌파정권에 대항해 국가 사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괄목한 대안을 제시했다. 서울시청 앞의 대규모 집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호를 몇 만부, 몇 십만 부씩 인쇄해 직원과 기자 모두 동원돼 행사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국가의 위기 상황을 알려 이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호소했다. 자연히 미래한국신문 홍보도 되는 효과가 있었다.

미래한국신문이 진실하고 논리적으로 명쾌하다보니 주요 언론이 이를 받아 이슈화해 영향을 미친 사례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4년 12월 ‘이철우 국회의원 조선로동당 입당 보도’이다. 당시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미래한국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발언함으로써 파장이 커졌다.

열린우리당은 이 문제를 언급한 한나라당 주성영 박승환 김기현 의원과 미래한국신문 김상철 발행인과 취재기자인 김성욱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한나라당 의원 3명과 미래한국신문에 대해 각각 1억 원씩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김 회장님은 문제가 커지자 법률가로서의 소양을 살리셨다. 취재기자가 기사를 쓴 두꺼운 문건을 가져오라고 해서 빠른 속도로 점검하다가 이철우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 조선로동당기와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 앞에서 선서한 것을 확인하는 등 결정적으로 현지 입당한 사실을 확인하셨다. 이후 특집면을 계속 편집해 보도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집중적으로 알리는 등 정면 돌파해 나가셨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사실과 논리에서 이길 수 없음을 인식했는지 소송을 취하했다.

김 회장님은 침착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셨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보수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사람들을 결속하고 힘을 발휘하게 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셨다. 보수정권이 출범하게 된 밑거름의 역할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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