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고 서울법대 명예교수 ·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
김상철은 나와 법대 동기이다. 그를 서울법대 교정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3월 초였다.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있는 그는 약간 얼굴이 검고 입술이 두툼해 매우 의지적인 인간같이 보였다. 서울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고향이 북한이라는 사실은 후에 알았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재학 시절에는 내가 영락교회를 다니며 법대기독학생회장을 하면서 적극적인 반면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면서 공부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법학도서관의 왼쪽 창문가에 잡은 그의 지정석은 수업시간 외에는 항상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대학신문’에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던 것이다. 법공부만 하는 줄 알았던 친구가 이런 수준의 교양독서를 하고, 감히 함 선생의 ‘수난의 종’으로서의 한국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비판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외우(畏友) 같은 존경심을 갖게 됐다. 역시 그는 수석졸업을 했고 이내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로 나갔다.
친구들을 다 떠나보낸 나는 짝 잃은 외기러기 같이 거의 가지 아니하는 대학원에 진학해 학자의 길을 택했다. 1970년대 초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놓고 너무 답답해 백방 유학의 길을 찾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4년 만에 박사학위를 하고 1979년 여름에 귀국하는데 도쿄에서 우연히 김 판사를 만났다. 판사 연수로 독일 키일(Kiel) 대학을 가는 길이라 했다. 우리는 아카사카궁 앞에서 함께 사진도 찍고 내가 경험한 독일 생활 얘기도 해줬다.
운 좋게 나는 모교에 교수가 돼 금년에 정년했고 그동안 김상철과 별로 잦은 접촉은 없이 지냈다. 그가 1977년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1985년 김철수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가끔 학교 주변에서 꾸준히 향학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보통 법률실무가와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한때는 인권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하더니 얼마 후 대단히 보수적으로 바뀌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가 ‘고시계’라는 월간지를 냈는데도 나는 수험법학과는 거리가 먼 분야이기 때문에 글 쓸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매월 한 권씩 보내와서 그의 사후에야 그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운동권 인사는 인간이 안 되었더군.”
이런 어정쩡한 친구 사이가 좀 아쉽기도 하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전화를 걸어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만년의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을 가까이 모셨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2005년쯤이었다. 유 총장님이 1998년에 작고하신 후 어떻게 내가 그분의 전기를 쓰게 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그 어른이 대통령 출마까지 하려다 좌절됐다는 사실을 듣고 한미우호협회를 통해 가까이 모신 유 총장에 대한 증언을 듣고 싶었다.
아무리 친구이지만 이것은 다소 격식을 갖춘 대담으로 삼고자 미리 질문을 준비해 가져갔다. 변호사 사무실 겸 ‘고시계’ 사장실에서 둘이서 대좌해 나는 “자네는 어쩌다 인권 변호사에서 보수로 돌아섰나?”고 딴 얘기부터 시작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운동권 인사는 인간이 안 되었더군.”
나는 그만큼 부딪혀 보지 못했지만 이해할 듯했다. 종교적인 영향도 있을 것으로 알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본론으로 유 총장이 “김대중 같은 거짓말쟁이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대항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데 알고 있었는가 라고 물었다. 김 변호사는 전혀 몰랐었다고 단호히 부정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한미우호협회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조직이라고도 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도 유 총장을 몰랐는가 생각하면서 대담을 마쳤다.
후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탁돼 서울시장이 되고 하는 회오리 속에서 나는 그를 본 일이 없다. 대학 동창회에 어쩌다 나오면 ‘미래한국신문’을 구독하라고 광고하는 모습이었다. 수년간 의식을 잃고 있다는 소식만 듣다 마침내 부음을 들었다. 빈소에 마지막 작별로 이런 조시를 써 가져갔다.
자유투사를 보내며
-고 김상철 변호사 영전에
인권운동가 김상철 변호사
서울시장 김상철 박사
보수지도자 김상철 회장
자네의 혁혁한 리더십 뒤에는
학생 시절부터 탁월한 두뇌,
불굴의 의지, 종교적 신앙이 있었지.
왜 진보에서 보수로 돌아섰느냐고 물으면
“진보운동가들은 인간이 문제야” 답했지.
그래, 자네는 보수라도 이기주의 아니라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의 보수였지.
자네에겐 자유가 정의였지.
자네 앞에선 우리 모두 시대의 공범자
분단의 구정물에 떠내려가고 있지.
자넨 그걸 모른 척 하지 않고 아파했으니
장사인들 울홧병이 나지 않겠나!
부디 천국 가시거든 월송 선생* 만나
‘자유대한의 전당’에서 안식하시다
통일한국 되는 날 환생하시라.
*월송(月松)은 유기천(劉基天, 1915-98) 전 서울법대 교수, 총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미래한국 Weekl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