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딸 · 연세대 국제대학원 박사과정
어머니는 만 4년간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항상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간호사들이 그런 어머니를 존경한다며 “열녀비를 세워드려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전했더니 “그토록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시던 기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유난한 가족 사랑으로 뭉쳐 있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기간에도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대한민국과 하나님을 위해 ‘덤으로 받은’ 인생을 사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24시간 둘만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었고 우리도 간호에 힘을 보태면서 평생 받은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아파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두 그리 평안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전혀 불가능했을 그때의 평안함과 감사는 천국환송잔치를 은혜롭게 치르기 원하시던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함이었다고 믿습니다. 이별로 인한 슬픔과 아픔은 하루하루 더 크고 깊게 자리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쓰려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셨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딸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팬’이었던 나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우리정의당을 창당해 온 가족이 선거운동을 한다며 띠를 두르고 ‘김상철, 김상철’을 외치고 다니던 때가 문득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정의의 편에 섰습니다. 영감님 대접을 받던 판사 시절에는 군사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아 지방으로 쫓겨나셨으며 서울시장 취임식에서는 “똑바로 하겠다”고 선언해 공직사회를 떨게 하셨고, 여야에서 동시에 러브콜이 올 때는 독자적으로 창당을 하며 편한 자리를 걷어찼던 것입니다. 이후에는 누구보다 먼저 전교조와의 싸움에 나섰으며 보수가 욕을 먹던 시절에는 보수정론지를 표방하며 미래한국을 창간하셨습니다.
늘 힘든 싸움을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옳은 일을 하는 아버지를 고난의 길로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약간의 섭섭함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서울시장직을 사임한 건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몸이 상할 정도로 크게 상심하시는 걸 보고 ‘왜 남의 정의를 위해서는 적극적이다 못해 전투적이시던 아버지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저렇게 침묵하실까?’ 하며 속상해했습니다. 아버지는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며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날을 위해 증거로 마당, 다용도실 등을 사진으로 찍으셨습니다. 그 사진들은 20년 넘게 서랍 안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한 사건은 아는 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아버지는 그 상황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곤 했습니다. ‘저 여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당시 상황을 수도 없이 머릿속에 그려보았었습니다. “첫눈에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신기했어.” “하나님께서 당신 눈을 가리셨나 봐요.” “어, 그런데 아직도 그 가리개를 안 벗겨주시네.” 아버지 어머니의 대화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 거실에 나와 보면 두 분이 찻잔을 앞에 놓고 말씀을 나누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의 답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겉옷도 벗지 않으시고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선 순간부터 그날 만난 사람들과 나눈 얘기들, 새롭게 했던 생각 등을 쉬지 않고 말씀하면 어머니는 밥을 차리며 조용히 듣다가 아버지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용케 찾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니, 당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대단하네!”라며 어머니 치켜세우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비평가였습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언론사에 기고했던 시론부터 쓰러지기 직전 썼던 ‘시대를 보는 눈’까지 어머니의 비평과 교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은 없었을 정도입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기도원, 철야기도회에 다녔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제목이 많고 함께 할 일이 많으니 집안에 갈등이 있을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행사, 결정해야 할 사안들을 적은 수첩을 놓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음날 만날 분들, 할 일 등이 빼곡히 적혀 있는 수첩을 펴고 하나 하나 짚어가며 기도제목을 내 놓으신 후 함께 기도하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자정을 넘길 때도 많았습니다. 가정예배가 철야예배가 돼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토끼 눈으로 학교에 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비평가였던 어머니
돌이켜보면 우리 가정의 화목은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감당할 일이 너무 많은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 성품도 하나님께서 길지 않은 아버지의 인생을 계획하고 주신 달란트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고슴도치 아빠’라고 놀렸습니다. 부모님은 막내인 내가 글을 배우게 되자 가정예배를 시작했는데 주기도문 후에 항상 아버지는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나의 머리에 순서대로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스스로를 우리 식구라고 착각하고 있는 강아지 뽀미가 자기도 껴달라며 기도하고 있는 아버지 밑에 누워 머리를 밀어 넣어 모두가 매번 웃곤 했습니다. 가정예배는 항상 서로의 볼에 뽀뽀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는데 결혼 후 한번은 가정예배를 함께 드린 남편의 볼에 아버지가 뽀뽀를 해서 남편이 당황해 하기도 했습니다.
정이 많고 눈물도 많았던 아버지는 첫 손주인 주안이가 세상에 나와 짧은 삶을 살고 천국에 갔을 때 주안이를 집 마당에 묻어 주자고 했습니다 (결국 내가 더 슬퍼질 것 같아 무산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후 보내주신 주헌이는 18개월 동안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축복을 누렸고, 아버지가 병상에 계신 동안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주하와 조카인 하민이, 하준이도 주말마다 할아버지와 만나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복하고 기쁘게, 하지만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선한 성품과 아버지의 명석함을 닮은 오빠는 아버지의 일을 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던 반면 아버지는 내가 더 편해서인지 내게는 좀 더 많은 일들을 시키셨습니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아버지가 하는 많은 일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태평양아시아영리더스포럼(PYLF)과 미래연구원 사업은 지금까지 계속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탈북자를 도울지언정 조금도 사치하지 않았던 아버지
아버지는 태평양아시아지역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아이디어를 나누게 하자며 내게 제1회 PYLF의 운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당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실력 있는 친구 및 후배들과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주제선정, 강사섭외, 포럼진행 등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태평양아시아 각국의 국립대학에 주한 대사들을 통해 추천을 의뢰했으며 그 중 유능한 학생들을 선발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일주일간 강의 및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미래연구원 설립 및 운영 과정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보필했습니다. 미래연구원은 아버지가 자유지식인선언 창립회원들과 미래한국신문 발기인들 및 중견학자들과 함께 설립한 싱크탱크였습니다. 정권 교체 이후 좌우 대결을 넘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통일된 미래 한국의 국가목표와 발전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국판 헤리티지재단이나 AEI연구소를 꿈꾸며 2008년 7월 17일 만들어진 미래연구원은 두 번의 콜로키엄을 마치고 우남리더십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결국 중단됐습니다.
아버지는 한미우호협회, 태평양아시아협회,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행사나 시국 강연 등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가장 저렴한 경유 편 항공권 구매를 해달라고 내게 부탁했습니다. 출입국시 아버지를 알아보고 예우해 좌석 승급을 해주는 경우는 있어도 한번도 비즈니스 좌석을 발권한 일은 없었습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아버지가 안쓰러워 편하게 다니시도록 여러 번 권유해 봤으나 사양하셨습니다. 집을 담보로 대출한 돈으로 탈북자를 도우며 정작 당신을 위해서는 양말 한 켤레 사는 것을 아까워했던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이상형으로 놓고 배우자 기도를 하던 내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남편은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아버지가 뿌려놓은 씨앗들을 더 풍성한 나무로 기도하며 가꾸고 있고 가정을 사랑과 온화함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오빠에게는 현명하고 헌신적이며 아버지와 같이 활동적인 아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빠 내외는 아버지께서 병상에 계셨던 4년 간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털어 기쁨으로 병원비를 감당했으며 아버지의 유업인 미래한국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가정과 나라를 섬긴 아버지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동안 하나님과 가정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눠주며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자유통일 대한민국이라는 비전을 주셨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모세처럼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가족과 그 후손들을 포함한 남은 자들을 통해 그 뜻을 이루실 것을 믿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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