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장인(丈人)
사랑하는 나의 장인(丈人)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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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미래한국 발행인 사장
내가 김상철 회장님을 처음 만난 건 1999년 7월 어느 날 탈북난민보호 1천만 명 서명운동 현장에서였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잠시 귀국해 한미우호협회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 토요일은 역삼동 김상철 변호사 사옥을 함께 쓰고 있던 한미우호협회, 태평양아시아협회, 고시계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거리 서명운동에 나섰던 것이다(회장님이 워낙 바쁘시다보니 서면 보고를 통해 인턴으로 채용됐다가 이날 거리 행사장에서 처음 뵈었던 것이다).
 
한여름 오후 내내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모두가 땀을 흘리며 서명운동을 마치고는 인근 칼국수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변호사님이 본인의 신앙간증집 ‘7일간의 서울시장’ 내지에 ‘金範壽 군, 大成을 바라네’라고 또박또박 사인해 주시던 장면이 생생하다.
 
여름 내내 한미우호협회 인턴을 마치고는 협회-변호사실 직원들과 회식자리가 있었는데 김 변호사님은 내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셨다. 나는 비록 한 달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깊게 느낀 바가 있어 “앞으로 김 변호사님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솔직히 답했다. 이어 나는 어떻게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물었다.
 
김 변호사님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당시 조금은 의외의 답변에 ‘아, 그렇구나’라고 새기면서도 ‘혹시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예전에 사모님 속을 좀 썩여 드렸었나?’라는, 돌이켜보면 완전히 빗나간 생각도 언뜻 했다. 나는 김상철 변호사님을 내 삶의 모델로 생각했고 향후 결혼을 하게 될 때 주례를 부탁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네”
 
그리고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김 변호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고 변호사님은 2001년 여름, 세계 10여 개국 엘리트 대학(원)생을 초청하는 태평양아시아협회 영리더스포럼 등 추진하고 계시던 일에 나를 참여시켜 주셨다. 2002년 5월말 대학원 공부를 끝마치고 귀국인사를 드리기 위해 역삼동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나는 평소에 통일, 정치사회문제 등에 관심이 많았기에 언론사에서 일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많은 언론사 지망생들이 그렇듯 당시 내가 생각하던 언론사는 주요 몇몇 방송사나 일간지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런데 김상철 변호사님은 당시 미래한국신문 창간호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미 역삼동 사옥 2층은 미래한국 사무실로 개조되어 20여명의 기자들과 편집위원진, 1천여 명의 주주와 임원진도 거의 구성된 상태였다. 김 변호사님은 내게 미래한국에서 일할 것을 즉각 제안했고 나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만에 마음을 굳히고 미래한국 창간 멤버로 참여하게 됐다.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에서도 국제부장이라는 타이틀로 함께 일을 시작했다.
 
지인들 중에는 나보고 왜 그런 조그만 신생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일하느냐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말이 내게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다만 아들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지해 주신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한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의 심정이랄까. 근무조건은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고 미래한국의 다른 모든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사명(社名)처럼 ‘미래의 한국’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김상철 회장님은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언론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기존 언론인 출신은 최대한 배제하고 일반 연구원급 출신 기자들을 채용했다. 덕분에(?) 초기 3,4년은 매주 마감일마다 어김없이 모든 편집국 기자들이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밤을 새워야 했는데 고되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이 없었다. 그만큼 김상철 회장님의 비전과 리더십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헌신하게 할 정도로 강렬했고 그것은 본인 자신이 먼저 희생과 헌신의 모범을 보였기에 가능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도 1999년 여름 (회장님을 처음 뵙고 몇 주 후) 명동의 탈북난민보호 서명운동 현장에서였다. 미국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면서도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내의 모습이 내내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는데 연애를 한 것은 2002년 미래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고서였다. 그런데 김상철 회장님은 누구를 사위로 찍어놓고 딸에게 만나라고 얘기할 분이 아니었다. 혹 직원으로서 나에 대한 ‘호감’이 있었을지라도 딸의 혼사는 딸이 스스로 결정할 별개의 문제였다.
 
20대 중반 판사 시절 회장님은 최고 권력자의 혼사 제의를 마다하고 법원에서 만난 장모님과 ‘전설적인 연애’를 하셨는데 그만큼 세상의 속물근성이나 허위의식을 싫어하고 개인의 인격과 결정을 존중하는 분이었다. 그는 정치철학적 이념뿐 아니라 삶 속의 실천에서도 개인의 선택과 의지, 책임을 중시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요 보수주의자였다. 덕분에 나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2년간 당당히 아내와 열애를 할 수 있었고 2004년 10월 9일 김상철 회장님은 ‘주례자’가 아닌 장인어른으로 결혼식장에 오셨다.
 
“오늘 당신이 유난히 예뻐 보이네”
 
가정에서 장인어른은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 자신이 밖에서 ‘큰 일’을 하니 집에 오면 쉬거나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장모님을 늘 최고로 높여주셨는데 거의 매번 식탁에서 ‘오늘 밥이 참 맛있어’, ‘오늘 당신이 유난히 예뻐 보이네’ 등의 말이 오갔다. 매사에 감동을 잘하고 낙관적인 것은 타고난 성품이셨지만 본인의 노력도 컸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장인어른은 언젠가 내게 부부 사이에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먼저 말을 건네고 손을 내미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인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장모님의 깊은 지혜와 기품, 내외적 아름다움은 장인을 더 빛나게 했다. 장인어른은 늘 장모님을 ‘여보~’ ‘당신~’ 하며 다정히, 그러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바리톤으로 불렀고 모든 대소사를 빠짐없이 나눴기에 ‘동지’라고도 했다.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면 두 분은 늘 집 마당에 나가 꽃밭과 텃밭을 함께 가꾸셨다.
 
두 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각별했는지는 장인어른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만 4년간 장모님이 단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 간호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병원에 계시던 만 4년 8일(1,468일) 동안 집에 대여섯 번 밖에 오지 않으셨고 병실에서도 늘 쉴 틈이 없었다. 또한 남편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혹시 누워서도 마음 아파하실까봐 슬픈 기색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셨다. 김상철 회장님은 과연 누구보다도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분이셨다.
 
김 회장님은 나를 비롯한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많이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범수는 참 전략적이야.”
“나는 신문을 했지만 범수는 앞으로 잡지를 하는 거야.”
그러고 보면 김 회장님이 2008년 12월 8일 갑자기 쓰러지시던 날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도 칭찬이었다. 그날 미래한국 조찬포럼에서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이 강연을 한 뒤 내가 질문을 던졌는데, 회장님은 행사장을 나오면서 당시 목소리가 거의 안 나올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오늘 질문 정말 좋았어!”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바로 그날 저녁 집에서 응급실로 향하기 직전 김상철 회장님의 생애 마지막 말도 감사와 칭찬이었다.
 
“나는 결혼을 참 잘했어. 최원자 권사와 결혼한 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한 일이야.”
김상철 회장님은 강직한 겉모습과 다르게 눈물이 많고 천성이 선하셨다. 2009년 아내가 첫 아이를 7개월 만에 조산해 잃었을 때 거실 창가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계시던 장인어른의 모습이 생생하다. 아내는 당시 아버지의 눈물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됐다고 한다.
 
세계와 미래를 향한 커다란 비전을 갖고 자신의 심혈을 쏟아 만들어놓은 한미우호협회와 태평양아시아협회가 세상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다보니 소인배들에게 밀려 손을 놓게 되었는데 김 회장님은 그 때에도 그들과 싸우거나 그들을 전혀 상하게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 또 다른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며 그 일에 전념해 나갔을 뿐이었다.
 
김상철 회장님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책임지며 어렵게 성장했지만 가난에 대해 콤플렉스가 없었다. 일부 성공한 위선자들처럼 가난을 출세와 투쟁, ‘멋’의 수단과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으며 자수성가한 사람의 아집도 없었다. 새어머니에 대해 응어리가 없었고 장인 장모에게도 똑 같은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섬겼다. 그런 회장님의 내외 모습을 가까이 보면서 나는 ‘아, 집안에서 효와 정성을 다해 내면에 아무 맺힘이 없기에 바깥에서도 거침없이 일할 수 있는 저력이 나오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김상철 회장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상철 회장님은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컸다. 회장님이 말을 못하며 병원에 누워계시던 만 4년간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김상철 회장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이었다. 어려운 정국 가운데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분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랬다.
 
생전에 회장님은 주변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자산’을 아낌없이 나눠주며 사용했던 분이었다. 일례로, 김 회장님의 도움으로 서울대 교수가 된 분을 여럿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적, 정치적 자산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자산을 갖추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진정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회장님의 인적자산은 사용할수록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쓸수록 더 커지는 면이 있었다. 주변에 진정한 감동과 은혜들이 점점 쌓여왔기 때문이다(물론 도움을 쉽게 잊고 저버리는 사람들도 많긴 했다).
 
김상철 회장님이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 80년대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하고 90년대-2000년대에는 북한인권운동과 보수애국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북한 동포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 주인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능력보다 진정성이 먼저였다. ‘서울고, 서울법대 3대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일례로 영어를 할 때는 스피킹(speaking)을 리스닝(listening)보다 더 잘할 정도로 모든 생각과 할 말이 머릿속에 잘 정돈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지자면 회장님은 ‘머리의 사람’이 아니라 ‘가슴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김상철 회장님이 늘 시대를 앞서가며 국가적 이슈들을 주도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이템을 잘 선정한다’라고 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떠오르는 모욕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회장님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시대를 보는 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계산하는 ‘머리’가 아니라 정의로운 ‘가슴’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회장님의 정직, 정의의 기준은 기독교 신앙에서 나왔다. 그는 세계와 우리나라를 위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말씀을 100% 믿었으며 매사에 뜨겁게 기도했고 신앙 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장인어른은 우면산 기슭 자택 주변을 산책할 때 늘 쓰레기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셨다. 언젠가 장모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보, 오늘 중요한 걸 깨달았어! 산에 쓰레기를 버리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참 기가 막히고 한심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열 명, 스무 명이 있어도 치우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산이 깨끗해질 수 있겠다는 사실을 말이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아무리 헛된 생각,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나 한 사람만 바른 말을 해도 나라가 올바로 갈 수 있지 않겠어!”
 
“나 한 사람만 바른 말을 해도!”
 
내가 김상철 회장님을 가까이서 보고 배우며 모셨던 2000년대 초반 10여 년간은 회장님에게는 시련의 기간이었다. 80-90년대 판사, 변호사 시절에도 재야활동을 펼치며 국가권력의 반대편에 용기 있게 섰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대’와 ‘주류사회’는 그와 함께 있었고 그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떠오르는 별, 차세대 국가지도자였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간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이 훼손되고 북한정권이 기사회생하면서 통일이 멀어지는 상황에서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이미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권력은 이른바 ‘민주화세력’, 진보좌파진영에 넘어가 있었고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 앞에서 국민 대다수가 어쩔 줄 몰라 손을 놓고 있었다. 이때 제일 먼저 앞에 나선 것도 김상철 회장님이었다. ‘보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욕이 되는 시절, 그는 보수정론지를 표방하는 미래한국신문을 창간해 보수와 애국의 가치를 전파했고 시청앞 애국운동을 주도했다.
 
악의적이거나 개념 없는 사람들은 김상철 회장님에게 ‘구악(舊惡)’ ‘기득권’ ‘가진 자’ 등의 이미지를 덮어 씌웠는데 그것이 당시 먹혀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북한이 범죄 집단이지 정상적 국가인가’라는 그의 포효는 허울 좋은 ‘햇볕정책' 분위기 속에서 냉전시대의 산물로 비쳐졌고 세상의 '해바라기'들은 그를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와 망각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당시 나도 작은 불만이 있었다.
 
회장님은 한 번도 기득권세력이 아니었음에도 왜 지금 보수를 자처하며 우리 사회 구악의 책임을 본인의 어깨에 모두 짊어지려고 하는가. 어려운 시기에 전선(戰線)을 만들어 전면에 나서기보다 잠시 물러나 충전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세상이 외면하는데 누구를 위해, 언제까지나 자기희생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러한 생각은 회장님이 생각하는 정의(正義)도 아니었고 그의 스타일도 아니었다. 위기의 대한민국호(號) 안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면 혼자라도 나서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도 초인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치명적 무리가 왔고 마지막까지 전력으로 일하다 2008년 12월 갑자기 쓰러지셨다. 한 창 일할 만 60세의 나이!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전심전력을 다해 일평생을 준비하며 해온 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자다가도 수없이 벌떡벌떡 일어나며 이 질문을 던졌다. 또한 나에게는 사회생활에서 만난 첫 직장상사요,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장인어른 아버님이었으며 내 인생의 멘토, 롤모델이 아니었던가. 가슴이 너무도 아프고 먹먹했다. 악몽도 수없이 꿨다. 꿈에서도 다시 회복한 회장님을 여러 번 만났다.
 
그를 통해 시대를 보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김상철 회장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이루고 가셨다. 마지막 수년간 병원에 힘없이 누워계시며 눈물도 흘리셨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시대의 거인을 보았다. 현대사를 보았다.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보았다. 애국과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겸손함을 보았다. 능력과 추진력, 그리고 그 근원을 보았다. 그는 실천가이자 철학가였고, 선지자였으며 성인(聖人)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의 정신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고 향후 더 뿌리를 내려 더 큰 열매를 맺을 것임을 확실히 믿는다. 김상철 회장님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미래한국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도 그 작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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