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아름답지 않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특별기획] 아름답지 않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조희문 영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7.05.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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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대신 ‘보여주면 믿게 만들 수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不如一見)는 말은, ‘직접보면 믿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요즘 식으로 번안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보여줄 수 있다면 믿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대상을 말로 설명하며 주고 받는 일은 양측 사이에 간극이나 오해가 개입할 여지가 다분하다. ‘춘향’이를 아무리 미인이라고 설명해도 말하는 사람의 주관이 섞이고, 듣는 사람 역시 자기 식대로 해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어떤 모양인지, 얼마나 큰지, 품질이 어떤지를 가리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다.

현물을 그 자리에 두고 이야기하면 많은 것이 분명해진다. 오해의 여지를 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show me the money’는 서양판 ’백문불여일견‘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에도 함정은 있다. 보여주는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본래 모습이어야 성립 가능하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시절에는 본질과는 다른 ‘짝퉁’을 만든다는 전제가 없었을 것이다. 있더라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뭐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하더라도 별로 이상한 데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집고, 바꿀 수 있는 현대 특히 디지털 기술이 일반화된 요즘 세상에서는  뜻이 달라진다. ‘보여주면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이라고 위조나 가짜가 없었을까마는 지금처럼 원본과 복제품이 구분하기 어렵거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시절에는 가짜 또는 의도적으로 연출한 유사현실이 더 사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영화는 선전, 선동의 유용한 수단

영화는 그 목적에 아주 유용하다. 눈 앞에 보여줄 수 있으면서, 보여주고 싶은 대로 가공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효과가 크다.

공산혁명 후의 레닌이 러시아 영화를 국영 사업으로 통제하면서 오직 당이 요구하는 영화만을 만들도록 한 것은, 사람들을 홀리고 필요한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간파한 탓이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서 연설을 해도 숫자에 한계가 있고, 삐라나 연극을 해도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제목 그대로 전태일이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영화이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성찰적인 영화가 아니라, 전태일을 불러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무대에 세운다. 선전 또는 선동 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수배자 신분으로 도피 생활 중인 김영수(문성근)는 5년 전인 1970년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고자 분신한 전태일(홍경인)의 평전을 쓰는 한편, 공장 노동자인 신정순(김선재)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신정순은 임신한 상태에서도 자신이 다니는 공장에서 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움직인다.

영화는 김영수, 신정순의 고단한 삶과 함께 전태일의 삶을 병행적으로 제시한다. 우산을 팔러 다니던 어린 전태일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들어가 봉제사가 된다. 이후 그는 열악한 평화시장 인근의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인근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바보회’를 조직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장에 의해 해고된다.

한편 신정순은 경찰에 연행되고, 김영수는 어느 건물의 보일러실에서 숨어 지내며 평전 집필을 계속한다. 해고되었던 전태일은 다시 봉제공장에 복직되고,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피복 노동자들이 결합한 ‘삼동회’를 설립한 후 근로기준법 준수를 주장하는 시위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 시위 도중에 그는 근로기준법이 담긴 법전과 자신의 몸을 불태운다. 시간은 현대로 돌아와, 나이든 김영수는 평화시장 인근에 앉아 있다. 전태일 평전을 들고 지나가는, 전태일과 같은 얼굴의 노동자를 발견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75년. 민청학련, 민혁당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관련자 중의 한 명인 김영수는 수배자 처지가 되어 도피생활을 한다. 또 다른 시간은 그보다 10여년 앞서,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다 노동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의 시절. 현재 시간은 컬러로, 전태일 시절은 흑백 화면으로 구성하고 있다.

컬러와 흑백 화면의 교차는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자 동시에 연결이다. 전태일의 시절이나 김영수가 수배자로 도망 다니는 시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인상을 연출한다.

세상을 미워하라고 충동하는  영화 <전태일>

전태일의 시대가 무지의 가난 시대라면, 김영수의 시대는 지식인적 자각이 있지만 부도덕한 권력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을 유도한다. 여전히 억압적이며, 부도덕한 시대에 매몰돼 있다는 주장이다.

 

전태일 시대의 적이 이익만을 좇을 뿐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안전과 권리를 무시하는 자본가(사실은 그들의 사정은 근로자들보다 더 열악한)들과 근로자들의 권익을 지켜주기보다는 자본가 편을 드는 공무원들(그들은 제도화된 악을 상징한다)이라고 설정하며, 김영수 시대의 적은 그보다 더 조직화되고, 폭력화된 자본 세력, 노동운동 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민주적 양심적 인물이나 조직을 탄압하는 정치권력을 적으로 설정한다. 전태일 시대는 열악하고 암울했지만, 김영수 시대는 그보다 더 어둡고 힘들었으며, 그 억압과 모순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구조다.

결국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적 구도에서 선량하고 양심적인 개인들이 제도화된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억압받고 짓밟히고 있다는 주장이다.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 또는 위대한 투사가 등장한다. 한 명은 청계천 피복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홀로 자각하고 실천하는 양심의 상징 전태일이고, 김영수는 민중운동 혐의로 수배대상이고, 체포를 피해 도피 중이지만 세상의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양심적인 인물로 설정한다. 그들의 실제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전태일은 자립형 노동 운동가다. 그 시절,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스스로 자각하고 깨우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학력은 낮고, 생활은 열악하지만 노동자의 권리 자각, 노동운동의 조직화 등을 실행하는 영웅이다.

노동법이 뭔지도 모르던 순박한 청년은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근로자들의 권리를 알려주는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한마디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이라도 한 듯 뭔가를 결심한다.

이후 전태일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근로기준법에 맞춰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법이 정한 수준으로 복지를 맞추어 달라고 회사 사장에게 요구하고, 해당 관청에 신고하고,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리려 하지만 무시당한다.

전태일이 길거리에서 우산을 팔 때, 막무가내로 우산 값을 깎자고 우기는 어느 여자 손님의 거칠고 야비한 행동은 가난하고 여린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모든 적대 세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회사 경영자들은 탐욕스럽고 야비하며, 노동 문제를 다루는 노동청이나 동향을 살피는 형사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서도 근로자들의 주문을 무시하는 기자들은 모두가 악을 비호하는 타락한 세력일 뿐이다.

전태일은 그런 환경 속에서 혼자 깨우치고 실천하려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무시당한다.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키지도 않는 법, 있으나마나 한 법을 기다리며 사느니 차라리 그 법을 태워버리고, 자신 또한 불태워버리겠다고 결심한다. 청계천 주변 피복 공장 노동자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전태일이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에서부터는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뀌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 전태일의 정신이 현재로 이어진다는 설정이다. 더 구체적인 설정은 김영수가 쓴 전태일 평전이 청계천 거리를 오가는 청년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죽은 전태일의 부활이다.

바탕은 실화 실제는 조작

영화는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태일에 관한 이야기는 노동운동가 출신의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전부나 다름없으니 영화 역시 평전의 이야기를 따라 간다.

영화 속 관찰자 겸 기록자 역할을 하는 김영수는 조영래를 인용한 것이다. 조영래는 서울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6·8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고, 1년 6개월간의 복역 후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6년여 동안 수배를 받으며 피신생활을 했다. 전태일 평전은 수배기간 중에 집필한 것이다.

영화는 전태일에 대해서는 실명을 사용하고, 조영래는 김영수라는 가상의 인물처럼 구성했으니 전기적 사실과 영화적 허구가 뒤섞여 있는 셈이다. 영화 속에서 김영수가 바라보는 시선은 곧 영화의 시선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보는 것은 전태일이 열악한 환경에서 위대한 노동 운동가로 변신해 스스로 몸을 불태웠다는 영웅 스토리, 외로운 죽음으로 묻힐 뻔한 이야기를 노동운동을 자극하는 거대한 횃불 같은 이야기로 포장하는 김영수의 이야기를 본다.

결국 전태일과 김영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영화를 보는 지금의 시기로 옮겨 놓으려는 감독 또는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계획한 전태일기념사업회의 목적이 두 인물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전태일에게 불붙인 자는 누구인가?

영화는 전태일이 미싱사나 재단사 생활을 하던 시기가 의욕적인 경제활동으로 새로운 희망을 실현하던 시기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오로지 공장 사장이나 주변 인물들은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고, 노동자들은 일방적인 억압과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에 내몰렸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이다. 김영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전태일 평전에서는 전태일이 스스로 자각하며,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영웅담처럼, 미담처럼 포장하지만, 전태일을 교육시키고, 조직적인 운동을 하게 만들고, 결국 누군가의 추동이나 압박에 의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 역시 전태일의 일생을 자각하며 현실을 인식하는 대중적 노동자의 영웅처럼 묘사할 뿐이다.

평전은 그의 몸에 불이 붙었다고 하면, 누가 불을 붙였는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시각적 구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그렇게 얼버무릴 수 없다. 스스로 붙이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줘야 하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영화는 전태일이 스스로 자시 몸에 기름을 붓고, 근로기준법을 담은 법전을 태우며 자기 몸에도 불을 붙이는 것으로 설정한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을 노동운동의 위대한 영웅으로 불러내고, 영화는 그것을 시각적 확신으로 고정시킨다. 영화를 통해 전태일을 이해하는 관객이라면, 전태일은 위대한 성인이나 다름없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실천한 끝에 결국 자기 몸을 태우면서까지 저항하고 요구했으니 이보다 더 간절한 영혼이 어디 있을까 라고 믿을 가능성이 높다.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이 그것일 테니 보는 사람이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200% 성공일 터이다.

영화를 특별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화가 대중적 이해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매체라면, 누가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영화의 제작과 등장을 막을 수 없다. 자유민주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영화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보급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인력을 양성하고, 제작을 독려해야 한다. Feedom is not free는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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