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누비며 경영학 다시 쓴 ‘킴기즈칸’
글로벌 시장 누비며 경영학 다시 쓴 ‘킴기즈칸’
  • 최승노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부회장·미래한국 편&
  • 승인 2017.08.14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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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세상을 바꾼 기업가 시리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사람들은 ‘킴기즈칸’이라 불렀다. 기업인 김우중과 세계정복자 징기즈칸을 합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징기즈칸처럼 느끼게 만들었을까. 바람처럼 나타나 속전속결로 세계를 휩쓰는 무서운 속도감이었다.

김우중은 징기즈칸처럼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 세상을 바꿔나갔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불렀고, 그의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무려 180만부가 팔렸다.

▲ 2005년 1월 출간된 저서 '세계를 경영한 사나이 김우중'

김우중과 징기즈칸

거칠 것 없는 김우중의 세계경영에 세계도 놀랐고, 경영학의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일순간에 대우는 붕괴하고 만다. 김우중 회장도 종적을 감췄다.

화려했던 신화와 찬사도 함께 사라져갔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까지 초라할 이유는 없다. 김우중 회장은 시대를 앞서간 리더였기에 지금도 그의 스토리에는 배울 점이 많다. 다시 그가 창조해 냈던 업적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마치 우리의 역사 유산을 찾는 것처럼 새롭고 신비스러운 일이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룬 대우의 극적인 성장사에는 일반인이 체감하기 어려운 초음속의 스피드가 느껴진다. 징기즈칸 제국이나 나폴레옹 제국처럼 말이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한 에너지는 김우중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가 세계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은 1993년이다.

연간 250일 이상 해외에 머물며 하루 세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탔다. 모든 역량을 해외 시장에 집중했다.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폴란드까지 그의 세계경영은 끝을 몰랐다.

전 세계에 대우 법인을 설립해 나갔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대한 투자가 결실을 거두면서 세계경영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중국, 몽골, 인도, 루마니아, 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루트도 완성됐다.

사실 ‘킴기즈칸’이라는 별명도 1996년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공장 준공식 때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그를 칭기즈칸에 비유하며 붙여준 것이었다. 세계경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8년 말 대우그룹은 해외법인 396개사, 해외 임직원 21만9000명, 국내 계열사 41개, 국내 임직원 10만5000명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서는 자산 기준으로 삼성, LG를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경영학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쓰다

김우중의 속도경영이 빛난 이유도 실시간에 높은 수준의 고급 정보를 현장에 반영하는 데서 나왔다. 한국에는 ‘빨리빨리’라는 특유의 기질이 있다고 한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경영 현장에서 속도는 그 무엇보다도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그 ‘빨리빨리’의 정점에 김우중이 있었다.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고 아낄 수 있었기에 전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이었다. 그에게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으며, 운동하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 시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우는 김우중이 그렇게 뛰면서 이룩한 경영혁신의 성과물인 셈이다. 비록 그의 세계경영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멈춰야 했지만 그의 선구자적 시도의 의미는 이대로 사장시키기 아까운 게 사실이다. 김우중의 세계경영은 이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때마다 연구하는 최고의 경영지침서가 됐다.

학계에선 지금도 김우중의 세계경영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세계경영 와중에 양성된 대우의 글로벌 인재들은 그룹 붕괴 이후에도 다른 기업에 중용되면서 그간 쌓은 경험과 역량을 발휘했다.

어찌 보면 대우는 10년 뒤 국내 기업들이 지불해야 했을 해외경영의 값비싼 수업료를 대신 지불해 준 셈이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게 세계경영이 실패한 이유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시대가 요구한 영웅

시대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시대에 걸맞는 영웅이 태어난다.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개발시대의 시대정신이자, 국가적 합의였다. 그 시대를 이끌던 지도자인 박정희와 기업 총수 사이의 공감대가 있었다. 사업보국이었다.

그 큰 그림 속에 정치와 경제는 하나가 되어 힘을 발휘했다. 김우중은 국가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껴안았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라고 하면 인수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부가 맡긴 부실기업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량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부실기업 해결 청부사’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김우중의 말이다. “우리가 정부와 가까웠던 건 맞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게 정부가 골치 아파 하는 일들을 해줬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로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중화학산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부에서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거지요.

그리고 경제 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잘해야 돼요. 합심해서 노력하는 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그런 얘기들이 다 “장사꾼이면 그렇게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하니까 나오는 거예요. 장사꾼이 돈만 바라보고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봉제품 수출로 일어선 대우는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인수 이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옥포조선(대우조선)을 차례로 인수한다. 그는 최고 지도자와의 독대에 강했다. 박정희와도 수없이 독대했다. “우중아!”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물론 김우중이 대구사범학교 스승(김용하)의 아들이라는 요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우중의 탁월한 추진력과 경영능력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박정희와 김우중을 끈끈하게 이어준 연결고리였다. 최고 지도자와 바로 독대하면서 문제를 단 시간에 해결하는 경영 방식은 세계경영에서도 빛이 났다. 특히 중진국이나 후진국에서 효과가 컸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가 정신 빛나다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현장에 우리 기업인들이 있었다. 대우는 해외 건설 사업의 후발주자였다. 김우중 회장은 리비아 남단 국경지대의 사막 한복판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계약했다.

이탈리아 건설업체도 시공을 포기한 이 공사는 무모한 계약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우중은 밀어붙였다. 1979년 12월 22일 대우 선발대 50여 명이 리비아의 황량한 사막에 도착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죽음의 땅인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그러나 선발대는 후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모래바람과 싸워야 했던 그들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도전했다.

우선 300명이 숙식할 수 있는 캠프를 설치하고 건설본부와 현장을 잇는 2000킬로미터의 도로공사부터 진행했다. 그리고 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을 실어다 날랐다. 한낮의 더위는 트럭의 보닛에 계란을 깨면 바로 익을 정도였다. 공사가 이뤄질 때까지 1년간 이들의 야영생활은 상상할 수 없는 역경과 괴로움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사례였다.

리비아 사람들은 대우의 건설작업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러나 처음 사막에서 우물을 개발하겠다는 건설본부의 계획을 듣고 모두가 고개를 휘저으며 황당한 계획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2주간의 광범위한 조사가 끝나고 땅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지하 60미터에서 수맥을 발견하고, 드디어 지하 233미터를 파내려 가자 물이 솟아올랐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대우의 힘으로 만든 작업팀의 기쁨과 사기는 하늘을 찌르며 곧바로 비행장 건설작업으로 이어졌다.

벽에 걸린 온도계는 더 올라갈 눈금이 없었지만 작업반의 투지는 계속 상승했다. 이렇게 신화가 계속되자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지휘관과 정부 요인을 대동하고 예고 없이 현장을 방문해 10여 일간 야영생활을 함께하며 독려했다. 카다피는 심야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불철주야 작업에 몰두하는 대우인의 도전정신에 감복했다.

리비아의 우조비행장은 불퇴전의 용기와 개척정신으로 최단 기일 내에 건설한 리비아 최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대우는 그 이후 20년 동안 리비아 도로의 1/3을 건설한다. 주택 1만5000세대를 짓는다. 학교도 270개 지었다. 대우에는 김우중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역사를 이룬 성취감과 자부심 그리고 뿌듯함이 있었다.

대우가 해체된 지도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그들은 모여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 영광의 순간을 나눈다. 지금도 김우중의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우즈베키스탄에선 전설 같은 얘기가 많다. 1990년대 중반 대우의 한 임원이 우즈베키스탄의 고위 공무원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임원의 비행기 출국 시간이 됐다.

그 임원이 “비행기 출국 때문에 일어서야 한다”고 하니, 고위 공무원은 공항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 이륙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놀랐지만 대우의 위상이 그 정도로 높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김우중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후퇴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대우가 직격탄을 맞은 건 역설적으로 그의 세계경영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등하자 국내 대기업 중 외화 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5000억 원의 환차손을 입었다.

▲ - 1979년 12월 22일 대우 선발대 50여명이 리비아의 황량한 사막에 도착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 한방울 나지 않는 죽음의 땅인 황량한 사막 뿐이었다. / 유튜브 캡처

너무 의욕적이고 기업이 큰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 열리다

국가신용등급이 여섯 단계나 떨어지면서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로부터 상환 압력도 가장 심하게 받았다. 1997년 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도 정부의 외환금융정책의 실패로 국가부도위기에 몰린다.

또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이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김우중은 내부 보다는 외부 리스크에 몰입해 있었다. 그의 해법은 더 올바른 선택이었고, 뛰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의견을 외면했다. 대우를 붕괴시키겠다는 정부의 속내가 1998년 7월 22일 발표된 회사채 발생 제한조치로 드러났다.

정부의 의중을 간파한 노무라 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그렇게 시작된 금융시장의 압박은 대우의 자금난을 불렀고 결국 김우중은 1999년 봄에 백기를 듣다.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유동성 자금을 요청한다. 하지만 대우는 결국 1999년 10월 워크아웃에 들어가 그룹 해체를 맞았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 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렸다. 기업이 너무 크다며 규제를 하고 심지어 해체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대한 미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경제의 원리를 파괴하는 일이다. 경제를 이해하지 못한 반기업 실험주의의 상징적 규제가 그 당시 강제 실행됐다.

바로 부채비율 200%다.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낮추라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을 식게 만든 최악의 규제였다. 이런 흉측한 규제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재벌 증오에서 나온 산물이다.

장사는 본질적으로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다.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타인자본을 활용한다. 회계에서 부채는 자기자본과 함께 총자산에 포함한다. 부채를 두려워해서는 기업가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외채를 빌려와 투자했다.

남의 나라 돈으로 산업화를 이룬 것이다.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해당 기업이 리스크를 감수할 일이지 정부가 통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늘리는 의욕을 가지지 못하도록 그 싹을 잘라 버렸다.

대기업들은 그렇게 해서 성장의 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성장 패러다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4대 그룹의 부채비율은 삼성이 1998년 말 275.7%에서 1999년 말에는 166.5%로, 현대그룹은 449.3%에서 190.1%로, LG그룹은 341.0%에서 182.6%로, SK그룹은 354.9%에서 167.3%로 각각 줄었다.

대우그룹은 부채비율 축소에 실패했고, 1999년 그룹 전체가 붕괴되는 비운을 맞았다. 대우는 부채가 너무 많아서 망한 것이 아니다. 부채를 억지로 줄이라며 금융권이 자금을 회수하도록 한 정부의 잘못된 반성장 정책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또 다른 삶은 있다

김우중은 1999년 10월 중국의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 지 5년 8개월 만인 2005년 6월 유랑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 채 7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과거를 아쉬워하고 회한 속에서 사는 삶은 불행하다. 김우중은 역시 김우중답게 제2의 삶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경제 발전이 늦은 나라가 성장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시장은 무한하다.

비록 무장해제 당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크다. 그의 나이 81세. 하지만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김우중은 2014년 9월 아주대를 방문해 “저는 30대에 대우를 창업했으나 여러분은 40~50대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충실히 실력을 쌓아나가길 바란다”며 “저는 이미 미련이나 욕심을 가지면 안 되는 나이가 됐다. 봉사로 여기고 교육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이 올해로 6년째를 맞는다. 현지밀착형 인재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김우중 사관학교’라 불리는 이 사업은 대우그룹 임직원의 뜻을 모아 시작됐다. 우리 사회에 김우중 같은 불세출의 기업가는 앞으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경제는 작은 기업이 환영받고, 약한 기업 흉내를 내야 지원과 보호를 받는 경영환경으로 굳어 가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여전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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