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뿌리 메이지 유신
일본 우익의 뿌리 메이지 유신
  • 최영재 아시아투데이 문화부장
  • 승인 2017.08.28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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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이웃 대응하려면 일본 우익 연구해야

“조선인들을 죽여라!” “조선인 여성은 강간해도 된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검은 버스를 타고 확성기를 틀어대며 혐한(嫌韓) 시위를 하는 그룹을 만나게 된다. 일본 우익이다. 이들은 재일한국인뿐 아니라 백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을 증오하고 차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다. 침략전쟁인 태평양 전쟁도 미화한다.

일본 우익은 한국인에게는 아주 불편한 그룹이다. 특히 반일감정을 부추겨서 여러 가지 이득을 취하는 한국의 좌파에게는 더욱 일본 우익이 불편하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일본 우익을 잘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최근 개봉된 영화 ‘군함도’에서처럼 욱일승천기를 찢고 일본인 탄광소장을 참수하는 등 극도의 반일감정을 드러내지만 일본 우익의 실체를 거의 모른다.

일본 우익 알아야 일본 극복

필자가 만난 한 일본 기자는 한·일간에 분쟁이 나서 한국인들이 일장기를 불태우고 반일 시위를 할 때 “한국인들은 저렇게 끓어오르다가 몇 달만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고 식어버린다.

우리 일본을 연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기자는 한국인들이 이번에는 화가 진짜로 난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금방 잊어버리는 한국인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원한을 입으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히 연구하여 반드시 복수하는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인들의 ‘처음 과잉 대응’과 ‘나중 망각’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친일 반일 차원을  떠나서 일본 우익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

일본에서 우익으로 불리는 그룹은 앞서 언급했던 가두선전 우익이 대표한다. 가두선전 우익이 받드는 국수주의의 원류는 에도시대의 국학이고 1945년 이전에는 현실정치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우익은 정치 마당에서 거의 퇴장하고 가두선전 차량에서 대형스피커로 군가와 국수주의적인 선전 내용을 틀어대는 존재로 전락했다.

가두선전 우익

하지만 가두선전 우익은 극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정치에도 극우세력들은 이익단체로서 영향을 미쳤다. 2차 아베 정권 성립 후, 각료 다수가 일본 최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가입한 사실이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회의’는 그 이전부터 자민당을 중심으로 100명 단위의 국회의원이 가입하고 있었다. 단순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 1877년 사사츠마번의 사무라이들이 일본의 급속한 서구화에 저항했다가 진압되어 처형당하는 장면.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혁명적 운동들이 전개됐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 집단은 일찍부터 존재했다. 그 선구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이 1973년 이시하라 신타로 등 31명의 자민당 국회의원들이 결성한 청풍회다.

이들은 ‘교육 정상화’, ‘자주독립헌법 제정’ 등 민족주의나 전통주의도 외쳤지만 친한국과 친대만을 기조로 한 반공주의 외교정책을 보다 강조했다. 청풍회는 관료 출신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비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선거에 강하고 당선 횟수도 거듭되면서 훗날 총리(모리 요시로)나 각료를 많이 배출했다.

다만 청풍회는 극우로서 안정된 지지 기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본 극우가 보이는 배타주의와는 연결성이 약하다. 당시 극우로서 중요한 것은 ‘생장의 집’을 중심으로 한 종교우익과 일본유족회였고 자민당을 오른쪽으로 끌어당기는 유력 지지 단체였다. 이 조직들은 중의원에 조직 대표를 보낼 만큼 득표력을 가진 단체였고 극우의 큰 기반이 되었다.

유족회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병사의 가족으로 조직된 모임이다. 1947년 설립 당시의 명칭이 ‘일본유족후생동맹’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유족연금 등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이익단체로 출발했다.

그런데 1950년대가 되자 전몰자 위령도 요구하게 되어 1952년에는 야스쿠니 신사 위령행사에 국비를 지급할 것을 주장했다. 이 요구는 오늘날까지 극우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우익의 3대 그룹, 청풍회·유족회·종교우익

다른 종교우익은 유족회와 달리 처음부터 민족주의와 전통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종교우익은 최대세력으로 ‘생장의 집’, 주요 조직으로 신사 본청이나 영우회(靈友會) 등 매우 많은 종교 교단이 해당한다. 이 가운데 ‘생장의 집’은 좌파 학생운동에게 대항하는 청년조직을 설립해 스즈키 구니오 등 많은 우파활동가를 배출했다.

유족회와 군은연맹전국연합회(軍恩聯盟全國聯合會), 일본향우연맹(日本鄕友聯盟) 등 구 군인관계 조직과 종교우익의 공통점은 그 득표력이다. 이들은 특히 자민당 당원이 많고 이 극우 조직의 의견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 구 군인관계 조직은 1990년 전후 자민당원 수에서 유족회가 16만 명, 군은연맹은 23만 명으로 전국 우편국장회 OB회와 더불어 3대 조직으로 불렸다.

다만 구 군인관계자는 고령화에 따라 활동도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교우익에는 젊은 세대가 참여해 1980년대 이후에도 통일교, 그리스도의 장막, 행복의 과학 등 새로운 교단이 더해져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주의·메이지 회귀·역사수정주의

전후 일본의 우익운동은 아시아 주변국보다 미국과의 관계에 집중했다. 즉 미군 점령 아래서 폐지되거나 변경된 패전 이전의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 일본 우익의 최대 과제였다.

여기서 회복하겠다는 제도는 전통주의라는 모습을 취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현대 일본 우익과 일본인들은 위대한 메이지의 자랑과 영광을 오늘에  되살려 일본인의 꿈과 자긍심을 되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운동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은 것은 1980년 말 이후부터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에 장기 불황이 찾아오면서 더 심해졌다. 이 국면에서 의기소침한 일본인에게 꿈과 자신감을 불어넣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였다.

시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충분히 활용해 독자들에게 일본이라면 이래야 된다는 역사적 모델을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인의 혼과 일본인의 자부심을 일깨워준 일본주의자였다. 당연히 일본 우익 정신세계의 구심이 되었고 전체 일본 국민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친 역사를 전부 시바의 소설과 역사평론을 읽고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시바는 훌륭한 역사 선생이었다. 또 시바는 비즈니스맨과 경영자들에게는 경영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난세의 위기를 돌파한 역사적 인물들의 성공담을 소설로 재현해냈다. 이는 일본 경제인들에게는 훌륭한 경영 철학 교과서가 되었다. 또 시바는 정치인들에게 국가운영의 지침과 일본의 진로를 제시해줬다.

그가 내세운 메이지의 영광 재현은 좁게는 일본 우익 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우익을 떠나 모든 일본 국민에게 사랑을 받은 국민작가였다. 시바 역사관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전체 일본 국민이 읽고 감동하고 회자되고 있으니 한국인이 일본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숙독해야 하는 저작인 셈이다.

실제로 1996년 2월 12일 시바 료타로가 향년 72세로 사망하자 일본 천지는 흡사 ‘거대한 문화산맥이 돌연 붕괴한 것’과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패전 이후 나라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던 혼미한 시절에 나침반 역할을 해준 시바의 사망은 일본인들에게 넋을 잃고 통곡할 사안이었던 것이다.

▲ 친일 반일 차원을 떠나 일본 우익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 / 메이지 시대인 1877년 사이고 타카 모리 군대와 싸운 쿠마모토 수비대 대원들, / Wikipedia 참조

천박한 아메리카니즘에서 일본으로 회귀

시바는 생전에 단행본 제목 수로 따져서 약 60종의 소설과 약 50종의 평론·에세이·대담집 등 모두 110종의 책을 발간했다. 그 가운데 12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1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작품만도 10종이 넘는다. 그의 출세작 <료마(龍馬)가 간다>와 <언덕 위의 구름>은 각각 1000만 부 이상 팔려 일본 전국민이 읽은 작품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바 소설들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때 활약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격동의 시대를 산 젊은이들과 지사들이 어떤 뜻을 세우고 어떻게 그 뜻을 실현해 오늘날 일본의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는가? 시바는 이 물음에 소설로써 답해 전후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진로를 제공해줬다. 그리고 일본 우익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시바의 역사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천박한 아메리카니즘에서 일본으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이는 글로벌화의 거친 파도 속에서 일본을 보편화해주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시바는 위대한 메이지 제국을 건설한 것은 개인의 자긍심과 뜻을 지닌 많은 일본인들이 합리주의 정신과 리얼리즘, 공(公) 사상의 토대 위에서 현실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시바 사관을 본받아 자랑스런 일본의 모습을 과거 메이지 제국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메이지 정신과 메이지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바 사관은 따지고 보면 유럽과 미국을 추종하는 노선에서 벗어나 위대한 메이지 제국에서 일본의 길을 찾자는 움직임과 연결된다.

오늘날 많은 일본인이 이런 물음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고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일본민족주의, 아니 일본주의를 드높이는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있다. 일본 우익의 움직임이 여기에 함께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역사수정주의 그룹은 근현대사에서 일본인의 자랑과 영광을 찾아내 부정적으로 서술되었던 교과서의 과거사 기술을 수정하려고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의 역사수정주의와 일본주의는 바로 시바 사관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얻고 또 시바 사관을 행동의 지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시바 사관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신봉자인 셈이다.

시바 사관은 들여다보면 특이한 문명관이 나온다. 시바는 일본이란 나라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과거 문명의 ‘주변’에서 근현대 문명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시바 사관의 역사 읽기는 메이지의 밝은 면을 찬양하고 메이지의 어두운 면 구체적으로는 대외팽창주의와 침략전쟁에는 눈을 감고 있다.

시바는 침략전쟁인 러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으로 호도했다.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화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빚어진 어쩔 수 없는 결과 내지는 불가피한 결과로 정당화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위대한 근대국민국가 메이지(明治)

알다시피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 막부를 타도한 후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국민국가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곧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란 개념을 얻게 된 일본은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고 메이지라고 하는 국가를 만들었다. 일본 우익 그룹은 이 메이지 제국을 러일전쟁에서 대국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경영할 만큼 ‘성공한 위대한 국민국가’로 여기고 있다.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국가의 성공 요인을 국가와 국민이 일체감을 이룬 데서 찾고 있다. 즉 민족주의를 드높여 비로소 ‘국민’임을 자각한 일본인이 메이지라고 하는 국가를 자기 의식 속에 절대화하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국가가 오랫동안 교토의 궁궐 속에 전통적 토속종교인 신도(神道)의 대신주(大神主)로만 추앙받던 덴노(일본 천황)를 지상의 정치세계에 끌여들여 그 덴노를 정점으로 대일본제국의 절대화를 이뤘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관이 바로 황국사관(皇國史觀)이다.

아베 신조와 요시다 쇼인

이런 위대한 메이지 제국 재건과 황국사관의 정점에 있는 현실 정치인이 바로 아베 신조 총리다. 그런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메이지 유신의 핵심 사상가요 정치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우익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베 신조와 요시다 쇼인은 둘 다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함께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이룬 두 지역 가운데 하나다.

요시다 쇼인은 존왕파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일본인에게 메이지 유신 설계도를 그려준 선각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아베의 요시다 쇼인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고향 사람인 요시다 쇼인의 묘를 매년 중요한 순간마다 참배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등 자신의 정치사상의 준거로 추앙하고 있는 듯하다.

요시다 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며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해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조선 침탈 주역들을 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은 인생의 말기였던 20대 후반에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일본 정계와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것을 배워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쇼인의 가르침대로 서양의 직조술, 대포 제조술, 조선술, 육군 군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근대 일본의 모습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후 쇼인은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서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3명의 총리와 6명의 장관이 배출되는 등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이 탄생되었다. 이들은 여지 없이 그의 사상을 실현시켰다.

그 중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후 쇼인의 무덤에 이를 고했다. 아베 신조 총리도 수차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을 정도로 요시다 쇼인이 근대 이후 일본 우익과 정치계에 끼친 영향력은 크다. 그의 위패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일본 우익 사상의 또 한 정점에는 아시아주의가 있다. 여기에는 시바 료타로 사관의 핵심인 일본 회귀(천박한 아메리카니즘에서 벗어나 위대한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돌아가자) 사상이 근저에 깔려 있다. 현대 일본 우익의 상징적인 인물인 이사하라 신타로는 1998년 <문예춘추> 8월호에서 ‘일본은 미국의 금융노예가 아니다- 신아시아 양이론’을 들고 나왔다.

여기서 ‘양이’란 말은 에도 막부 말기에 서양세력을 배격하자며 내세웠던 구호다. 그러므로 이시하라의 현대판 양이론은 미국 배격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시하라의 반미론은 일본 혼자만의 반미가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의 연대를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과 아시아와 연대하여 구미세력에 대항하자는 이 논리는 메이지 유신 직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내세웠던 정한론과 거의 흡사하다.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국민국가 혁명을 이룬 일본이 한국으로 혁명을 수출해서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한일이 연대하여 서양에 맞서자는 것이 핵심 골자였다.

이시하라의 현대판 아시아주의는 원래 메이지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반이 된 침략 사상이었다. 그 원점은 메이지 유신의 일등공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降盛)의 정한론(征韓論)이다. 한국을 치자는 의미의 정한론에서 발원한 아시아주의는 1880년대 반정부 입장에서 정치활동을 한 다루이 도키치의 흥아론(興亞論)으로 이론적 원형을 갖췄다.

또 다른 아시아주의의 줄기는 일본이 아시아 문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2∼1913)의 아시아맹주론에서 발원했다. 이후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1886∼1957)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오카와는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보급하고 확대하는 데 주력한 철저한 국가주의자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에는 A급 전범으로 지목되었으나 정신병을 이유로 재판을 면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 민족이 “아시아에 대해 위대한 사명과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적 심성과 발상을 자기 완결적인 대외사상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은 우익의 대아시아주의였다. 이 우익의 아시아주의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보다 한 발 앞서 제기되어 일본의 대륙침략을 선도해 나갔다.

동문동조와 순치보거

이 아시아주의가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아시아적 발상과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동문동조(同文同祖)’와 ‘순치보거(脣齒輔車)’ 의식이다. 몽골인·만주인·한국인·일본인은 원래 같은 조상에서 갈려 나간 민족이며 그들의 언어는 같은 친족계열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동문동조론이다.

우익사상의 정점에 있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시베리아 바이칼호 부근으로 이동하고 정착한 스키타이 문명의 유목 민족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어·일본어·퉁구스어·몽골어가 같은 알타이어 계통의 친족이라고 보았다. 이는 모두 동문동조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시바의 발상법은 우익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순치보거론은 입술과 이,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가 서로 의지하고 돕는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단결하고 연대해서 공영의 길을 닦아 나가자는 논리다. 동문동조론이 인종적이고 언어적 근친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면 순치보거론은 지정학적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다.

근대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자들은 그러한 발상법의 토대 위에서 ‘아시아는 하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또 아시아 문명을 건설하고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자고 주창했다.

동문동조론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자들이 엮어나간 아시아주의의 틀은 서양 대 동양, 백인 대 유색인의 대립 구도에 입각하고 있다. 이런 아시아주의의 원류는 1893년에 발간된 다루이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다. 다루이의 동양 단결 방식은 대략 이렇다.

한일 두 나라의 민족은 같은 동이족(東夷族)이므로 먼저 두 민족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을 건설하고 그 다음에 중국과 연대한다는 것이다. 이 대동합방 구상에 따르면 한일은 종족적·문명적 동질성에서, 중국과는 지정학적·문명적 근친성에서 3국 운명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루이 도키치의 이 흥아론은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의 원류가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주의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오카쿠라의 아시아문명론이다. 오카쿠라는 아시아를 다루이보다 지역적으로 대단히 넓게 봤다. 한중일을 넘어 이슬람 문명까지도 아시아 문명의 범주에 포함했다.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

오카쿠라의 아시아관은 기본적으로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이 두 가닥의 큰 줄기를 이루며 아시아문명을 이뤘는데 근대에 들어와 서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공세로 퇴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문명이 창출해낸 갖가지 예술과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와 독자적인 양식으로 개화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서구세력의 침략으로 무너진 반면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데 오카쿠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아시아의 미와 가치를 총괄하고 집약하여 세계에 내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오카쿠라는 또 아시아에는 서구에는 없는 미와 가치와 전통이 분명히 있으므로 ‘아시아는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서구문명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문명을 발전시킬 일본의 문명사적 사명을 ‘아시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역설했다. 그런데 오카쿠라는 단순히 일본이 아시아 문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라고 강조했다.

이 아시아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일본 민족주의, 일본 정신주의, 일본인의 선민의식을 바탕에 깐 채 아시아관을 전개했다. 겉으로는 아시아인에 대한 동정, 아시아인과의 선린, 아시아인의 해방, 아시아에 대한 원조를 제시했지만 이는 ‘주관적 선의’를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분명히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 나라들에게 불편한 이웃이다. 현대 일본에는 메이지와 쇼와(昭和)를 관통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일본중심주의, 일본우월주의, 아시아주의가 기세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다양한 형태의 일본 우익 세력과 아베 신조 총리로 대표되는 우익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는 무엇을 꿈꾸며 어떤 국가로 변화할 것인가? 그 핵에 일본 우익의 움직임이 있다. 한국인이 일본 우익을 연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 전 동아일보 기자 / 전 시대정신 편집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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