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굴복시켜야 할 적폐?
재계가 굴복시켜야 할 적폐?
  •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 승인 2017.09.11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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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정치가 시장을 움직이는 현실 드러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심 선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묵시적 청탁을 했다는 뇌물죄로 5년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받는 동안 도주의 우려가 없음에도 구속 수사를 받게 하더니 특검은 이 부회장에게 살인자에게나 적용할 법한 12년형을 구형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드디어 1심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내렸다.

최고의 변호사들을 두고서도 이 부회장이 중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이야 법정에서 얼마나 무기력할 것인지, 대한민국에서 정치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가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 25일 오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 관련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과 1심 유죄 선고

사실 이번 1심 재판은 재판부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선고를 내릴 것인지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 부회장의 1심 선고를 앞두고 청와대가 전 정부가 놓아둔 것을 우연히 찾았다면서 입수 경위가 미심쩍은 청와대 문건들을 재판부에 넘기고, 더불어민주당 유력 정치인은 재판부를 압박하는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도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유죄판결이 필요한데 이번 1심 선고는 이 부회장뿐만 아니라 박 전 대통령도 뇌물을 받은 것으로 단죄를 한 셈이다.

이번 재판이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 데는 재판부가 석연치 않은 법리들을 내세워 유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는 등의 이유만으로 뇌물을 받겠다는 공모가 있었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3자 뇌물죄에 요구되는 구체적 청탁의 증거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개별적, 명시적 청탁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도 경영권 승계라는 포괄적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했다.

경제학에 ‘현시선호이론’이란 게 있다. 자기가 마음속에 특정한 선호가 있다면 구체적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과와 배 둘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때 배를 선택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가 마음속에 사과보다 배를 좋아하는 내면의 선호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모가 있었다면 최순실 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코어스포츠 관련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묵시적 청탁과 수용이 있었다면 그로부터 나올 행동들, 예컨대 대통령의 각종 지시 등이 있었을 텐데 그런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고 오히려 개별적 명시적 청탁은 재판부에 의해 부정됐다.

형사재판이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 엄격한 증거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죄라는 가설을 기본으로 두고 유죄라는 다른 경쟁가설들을 엄격하게 증명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번 재판은 ‘최순실 씨 등의 강압에 의해 이재용 부회장이 승마지원이나 재단출연을 했다’는 가설이나 ‘최순실 씨 일당이 박 전 대통령의 권위를 이용해서 삼성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 했다’는 가설보다 왜 뇌물을 주었다는 가설이 더 강력한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현 정권으로서는 촛불집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의 유죄판결이 필요한데 여기에 이 부회장을 희생양 삼아 그의 뇌물죄 유죄판결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1심에서는 성공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재판부가 일부러 적당하게 현 정권과 특검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허술한 법리도 노출시켜 나중에 상급심에서 감형과 집행유예를 가능하도록 만들어 변호인단도 만족시키는 ‘절묘한’ 선고를 내렸다는 견해도 있다.

정권의 말 잘 들으라는 메시지?

일단 여당과 현 정부는 1심 재판부로부터 이 부회장의 5년 유죄선고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현 정권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메시지를 재계로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들도 이 부회장이 구속될 때는 문제를 제기하는 발언을 했지만, 이제 1심 선고를 통해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가의 한 사람이 사회적 공헌으로 생각하고 낸 돈이 뇌물로 치부되어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숨죽이고 있다. 경총의 사례에서처럼 한마디 했다가 청산 대상인 적폐로 몰리는 부담을 피하려는 입장 때문일 것이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 부회장을 희생양 삼을 필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 정권이 기업가와 기업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이미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했고 국내 산업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시킨 것도 모자라 뇌물죄 선고를 환영 일색으로 반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이 정권이 시장과 기업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를 총수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규제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개혁 과제로 인식하는 데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특정 유형이 최선이라고 판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영하는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자본시장에서 끊임없이 선별되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총수의 지배력을 약화시킬수록 더 좋은 지배구조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기업총수의 구속에 대해 현 정권은 별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현 정권이 재계, 특히 대표적인 성공적인 대기업집단을 압박과 대결을 통해 굴복시킨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을지 의구심이 든다.

그렇지만 고용된 경영자와 최종 책임을 지면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내는 기업가의 역할은 다르다. 고용된 경영자는 창조적 파괴를 할 수 없는 반면 기업가들은 그런 일들을 해낸다. 일부 좌파 매체는 이재용 부회장처럼 최종적 책임을 지는 기업가가 없어도 기업 경영이 잘 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사설까지 싣고 있다.

삼성전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무튼 현 정권은 기업들에게 정치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문제는 현 정권이 이번 판결로 인해 세계적 기업 삼성전자가 입을 타격과 이로 인해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데 있다.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적 일류기업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기 때문에 얻는 혜택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이런 세계적 일류기업이 기업이민이라도 하는 날 한국경제에 어떤 타격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무감각한 것 같다. 이들에게 삼성전자는 많은 일자리와 세금을 안겨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청산되어야 할 적폐를 잔뜩 안고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현 정부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시장과 기업에 유형, 무형의 정치적 압박과 같은 반시장적 압박을 가하면 시장은 보복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 개별 기업들은 물론이고 기업들을 대변하는 단체들조차 정부의 서슬에 불편한 속내를 숨기고 있지만, 결코 이런 상태가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든 기업이든 제품이나 정책에 만족하면 계속 그 정책이나 제품을 찾고 지지한다(충성). 만약 만족하지 못하면 어떤 점이 불만인지 말하고(목소리),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떠난다(탈출).

문재인 정권은 출범 이후 줄곧 전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격의 없는 ‘소통’을 유난히 강조했었다. 그런 초심은 어디 갔는지 최근 기업들과의 소통은 그저 무늬만 하는 척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보니 비정규직 제로 추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탈원전 정책, 세금을 통한 공무원 증원과 공공부문의 일자리 추진, 건강보험 비급여의 과감한 축소 등 여러 기업이 비용을 올리는 정책에 대해 제대로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력이 이렇게 기업가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치권력으로서도 잠시 통쾌할지 모르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의 정책 등에 불만이 있어도 왜 불만이 있는지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그런 정책을 인내하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기업가들은 결국 마지막 남은 선택인 탈출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이 기업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황에서 투자와 고용이 활발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두려움을 심어놓고서 경제가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다는 게 역사적 교훈이다.

체제 불확실성(regime uncertainity)

현 정권은 출범 이후 100일 동안 일자리 상황판이 상징하듯이 비정규직 제로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등의 정책들을 숨 돌릴 겨를 없이 추진했고 최저임금제의 급격한 인상이 몰고 올 부작용을 언급한 경총 부회장에게 적폐의 한 축이라며 공격했다.

최근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상성장률을 크게 상회하는 과감한 적자재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20% 정도 격감시키고 복지 등으로 재원을 돌려 매년 12% 이상 늘리는 재원배분 상에 있어서도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기업가들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은 정부가 언제 어떤 정책을 들고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자를 했다가 어느 날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음이 드러날 위험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의미다. 경제사가인 로버트 힉스(Robert Higgs)는 이를 ‘체제 불확실성’(regime uncertainty)이라고 불렀다.

‘체제 불확실성’이란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향후 경제 질서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불확실성, 특히 정부가 장래에 재산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를 표방한 상법 개정이 추진된다면 자신의 주식이 지닌 의결권이나 경영권에 어떤 제약이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고, 또 임금, 건강보험료의 기업 부담분, 전기료 등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흔히 정치권은 유권자들의 관심사를 규제나 법률 혹은 정치적 압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런 규제나 강요는 보통 재산권을 제약하며,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효과인 ‘체제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그렇게 되면, 기업가들로서는 투자, 특히 장기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지금 소위 촛불시위의 주체들이 현 정권에 ‘빚을 갚으라면서’ 다양한 요구를 하는 상황이다. 기업가들로서는 이런 요구가 어떤 모습으로 정책으로 등장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의 금융노조의 상대평가 폐지, 성과급 폐지 등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나라도 체제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29년 미국 대공황 시기의 루스벨트 정부도 ‘체제 불확실성’을 불러 일으키는 우를 범했다. 루스벨트는 전임자인 후버의 적자재정을 균형재정으로 돌려놓겠다는 선거공약으로 당선되었지만 전임자인 후버의 후버댐과 같은 적자재정지출의 규모를 뉴딜정책으로 대형화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반(反)시장적 노동조합법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기업들을 반(半)국영 카르텔로 편입시키는 등 다양한 규제들을 입법화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이런 정책들은 체제 불확실성을 증가시켜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많은 케인지언들은 엄청난 전시수요가 사라지므로, 이를 메워줄 과감한 정부지출이 없는 한, 심각한 경기침체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특별한 적자재정지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의 죽음과 함께 ‘체제 불확실성’이 사라지자, 미국경제는 투자가 되살아났고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기업들이 탈출을 고민하게 하지 말아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유죄판결은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법의 지배보다는 정치의 지배가 우리나라의 현주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 당분간 미국의 대공황 시기만큼이나 당장의 어려움을 줄여주는 반시장적 정책들이 펼쳐지고 각종 복지정책들이 경상성장률을 상회하여 대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다. 재계를 대변하는 단체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현 정권의 창출에 공을 세운 민노총 등의 목소리는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체제 불확실성’을 누적시킬 정책들이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구 추진되고 있고 앞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유죄선고가 그런 전주곡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제발 기업들이 우리나라를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법(제도)와 시장경제의 작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치의 지배 이전에 확고한 법의 지배가 위력을 발휘하는 사회가 될 때 경제도 잘 돌아갈 수 있음은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이다.

법의 지배가 확고할수록 재산권에 대한 여러 침해 가능성이 크게 줄고 권리관계의 예측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열심히 할 유인도 생기고 가격의 정보전달 기능도 확보되기 때문이다.

▲ 뉴욕대 경제학 박사 /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시장과 경제>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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