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보수우파에는 미래 없다
짝퉁 보수우파에는 미래 없다
  • 권순활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승인 2017.09.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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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 이른바 보수정당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회의적이다. 가치와 대의(大義)의 깃발 아래 싸울 수 있는 구성원이 적은 조직은 결정적 위기가 오면 오합지졸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지난 대선 이후 대통령 탄핵과 보수의 붕괴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어떤 길을 걸어와 어떻게 추락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좌파의 퇴조가 두드러지고 있다. 과거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대거 도입해 국가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서방세계의 이념적 지형을 살펴봐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 일본 정치의 보혁(保革) 구도에서 보수 성향 자민당에 맞서 이른바 ‘좌파 혁신세력’을 대표했던 사회당(현 사민당)은 이미 미미한 존재로 전락했다. 현재 일본의 제1야당인 민진당(옛 민주당)은 이념적 성향에서 중도 우파 성격이 짙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프랑스 사회당도 최근 총선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참패를 맛봤다.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민당도 전통적 의미의 좌파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흐름은 좌파적 가치로는 국가의 발전과 국제 경쟁력 향상도, 자국 국민의 소득과 삶의 질 향상도 어렵다는 각성에 따른 것일 것이다. 이런 범세계적 흐름과 달리 한국은 정치 교육 법조 언론 노동 등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서 좌파 또는 준좌파가 갈수록 득세하고 우파가 퇴조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우파와 좌파를 보수와 진보라고 표현하는 풍조가 짙어졌다. 그러나 이런 보수-진보 구분법이 과연 옳고 정확한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구 사상사에서 ‘역사의 진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였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인류의 무한한 발전을 낙관했지만 정작 본인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프랑스 철학자 콩드르세는 “완전함을 향한 진보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 지구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로의 이행과 동일시함으로써 ‘도덕적 고지’를 선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좌파가 진보라는 견해는 지구촌에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1990년 전후 옛 소련의 붕괴 과정에서 서구식 체제로의 변화를 열망하던 목소리가 진보와 개혁이었고 기존의 소련 공산당 체제를 고수하던 움직임이 보수나 수구였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을 전후해 벌어진 중국의 권력투쟁에서도 문화혁명식 극좌 노선을 고집한 4인방 세력이 보수였고 상대적으로 시장경제 원리를 과감하게 도입하려던 덩샤오핑 세력이 진보로 불렸다. 유럽이나 남미의 선거 결과를 보도하는 외신 기사들의 원문을 살펴봐도 대부분 우파와 좌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보수와 진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복거일 선생은 2005년 저서 <조심스러운 낙관>에서 “누구에게나 진보라는 말이 보수라는 말보다 훨씬 좋게 들리는 현실에서 우리 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보수, 그것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부르는 관행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전통적인 구분인 우파와 좌파, 또는 친체제와 반체제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어느 젊은 우파 여성은 자신의 페이스북 소개글에 “‘진보’라는 말에 유감이 많다. 인간은 누구나 진보를 지향하고 청년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대한민국 우파는 이 말을 좌파에 빼앗김으로써 청년들을 설득하는 데 열세인 상황에 놓였다”고 썼다. 굳이 우파를 보수라고 한다면, 좌파는 진보세력 대신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진영에서 자주 사용했던 ‘변혁 세력’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정명(正名)의 원칙은 이념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진보’와 ‘좌파’는 다르다

현재 한국 사회 이념 지형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국가를 지탱하는 핵심 공권력인 검찰 경찰 법원 등에서는 좌파에는 관대하고 우파에는 혹독한 결정이나 판결이 내려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신문 방송 포털 등 넓은 의미의 언론 지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우파 매체와 좌파 매체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잡고 상호 견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1년 여간 메이저, 마이너 가릴 것 없이 쏟아진 수많은 오보와 과장, 선동, 옐로우 저널리즘은 선진국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언론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 만큼 심각한 집단적 ‘저급 찌라시 수준’이란 비판이 적지 않다.

많은 국민을 오도한 저질 보도가 난무했지만 지금까지 어느 언론사에서도 제대로 된 자성도, 사과도, 책임지는 모습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일 것이다.

정치권은 또 어땠나. 현 집권당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보수정당을 자임해온 옛 새누리당은 서구적 의미의 엄밀한 기준에서 보면 우파 정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새누리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회의적이다.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 중요

보수우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히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민간의 활력과 사유재산권 존중을 중시하는 우파적 가치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우파 정치권은 무엇보다 웰빙 기회주의 체질이나 개인적 친소 관계에 따른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 지켜야 할 대한민국적 가치와 이념으로 무장한 집단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세계적 조류에 역행해 좌파, 또는 범좌파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진 한국적 현실에서 가치와 철학은 뒷전이고 머리를 굴려가며 자신의 잇속과 자리만 따지는 웰빙 정치인보다 헌법적 대의와 국가 정체성 수호를 위해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강단 있는 우파 정치인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야 한다.

기존의 몰이념적 체질을 탈피하지 못하거나 한 술 더 떠 정책과 세계관에서 ‘좌파 2중대 정당’으로 전락한다면 잠재적 지지층의 이탈마저 가속화해 처절하게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 위에서 정상적인 경쟁이 불가능한 장애인이나 빈곤층 청소년과 노인층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줘 ‘보수우파는 차갑다’는 우리 사회 일각의 오해를 푸는 노력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다.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동아일보 미디어 연구소 국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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