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재상 황희(黃喜)를 길러낸 원동력은 시련이었다
조선 최고의 재상 황희(黃喜)를 길러낸 원동력은 시련이었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9.29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실록을 통해 황희를 직접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당혹감이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식의 능수능란, 우유부단의 황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결과론적인 초상화의 한 단면이고 위인전식 인물 서술의 폐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혹감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지나칠 정도의 과단성 혹은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황희는 27살 때인 1389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였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개국 과정에서의 격랑에는 휩쓸리지 않았고 잠깐 벼슬길에서 물러났던 그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무렵에는 언관으로 있었는데 1398년 7월 5일 태조 이성계가 “직책에 충실하지 않고 사사로이 나라 일을 의논했다”며 함경도 경원의 교수관으로 내쫓았다. 거의 유배에 가까운 좌천이다.

실록 속의 황희는 세평(世評)과 달라

이 때까지만 해도 아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날 때였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 실세이던 정도전이나 남은에게 살갑게 처신하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1차 왕자의 난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와 가까운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의 심복으로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로 있다가 병이 들자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황희를 천거하고서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태종 5년(1405년) 6월 지신사에 오른 황희는 곧 박석명 못지않은 총애를 태종으로부터 받았다. 황희로서는 처음으로 지우(知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이다. 실록은 당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 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했다.”
그런데 그의 졸기(卒記)에는 앞서 그가 정도전이나 남은에게 살갑게 처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언급이 나온다.

“훈구 대신(勳舊大臣)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그 간사함을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하륜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직 임금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결국 처남들을 제거할 때 비밀리에 일을 처리한 인물들로 실록은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과 더불어 황희도 포함시키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도 깊이 간여했던 것이다.

4년 후인 태종 9년 황희는 의정부 참지사(參知事)로 자리를 옮긴다. 본격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정승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의정부 지사로 승진했다. 태종 11년 전후에는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건 누가 봐도 태종이 황희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예조판서로 옮겼고 한성부 판사로 있을 때인 태종 18년(1418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다. 폐세자를 전면에서 반대하다가 결국 세자에게 아첨하려 한다는 죄를 얻은 것이다.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보아온 조정대신들은 거의 그를 죽일 듯이 탄핵 공세를 했다. 그러나 구상은 이미 태종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황희(黃喜)를 간사하다고 하나, 나는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복(心腹)에 두었는데, 이제 김한로의 죄가 이미 발각되고, 황희도 또한 죄를 면하지 못하니, 지금이나 뒷날에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희는 이미 늙었으니, 오로지 세자에게 쓰이기를 바라지는 않겠으나 다만 자손(子孫)의 계책을 위해서 세자에게 아부하고 묻는 데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어찌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럼에도 태종은 “그대의 간사함을 미워한다”며 경기도 교하로 유배를 보냈다가 끝내 충녕대군으로 세자가 교체되자 전라도 남원으로 멀리 내쫓았다. 그리고 4년 후인 태종4년 2월 상왕 태종은 황희를 한양으로 불러 올리고 복직시켰다. 게다가 어린 세종에게 “황희를 중용하라”고 당부하고 그 해 5월 태종은 세상을 떠났다.

사실 세종의 입장에서 황희는 불쾌한 존재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세자 즉위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10월에 세종은 황희를 의정부 참찬에 임명했다. 한직이었다. 이런 황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듬해 7월 강원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당시 관찰사 이명덕이 구황과 진휼의 계책을 잘못 써서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됐다. 이에 세종은 당시 61살이던 황희를 관찰사로 임명해 기근을 구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놀라울 정도로 단기간에 강원도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 때부터 황희는 일을 통해 세종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당시 그가 맡았던 관직은 이를 말해준다.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직했다. 1424년(세종 6년) 의정부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세종 8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병조 판사를 겸직했다.  이제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가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원(李原)이라는 인물을 떠올려야 한다. 만일 그가 계속 좌의정으로서 업무를 잘 해냈다면 어쩌면 ‘명재상 황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원은 아버지 태종의 신하이자 세종 또한 크게 신뢰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세종 1년 사실상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왕 태종은 좌의정에 박은, 우의정에 이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런 체제는 계속 이어지다가 세종 4년 태종이 세상이 떠나기 하루 전날 박은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홀로 서기를 시작한 세종은 이원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우의정은 정탁, 유관 등이 번갈아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비워둔 채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이조판서 허조(許稠)의 3두 마차 체제로 정국을 이끌면서 젊은 신왕으로서의 입지를 하나하나 굳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 8년(1426년) 3월 15일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복권의 기회는 없었다.

그로부터 1년도 안 된 세종 9년 1월 25일 잠시 우의정을 거쳤던 황희는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그를 좌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세종이 그에게 했다는 말이 실록 황희 졸기에 실려 있다.

“경(卿)이 폄소(貶所)에 있을 적에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의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단(史丹)은 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재상)을 지낸 명신(名臣)으로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을 후사로 삼고자 하므로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후 20여년 재상으로서 황희의 업적은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