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과 이완용, 그리고 박정희
영화 <남한산성>과 이완용, 그리고 박정희
  • 이성은 격월간지 <박정희정신> 기자
  • 승인 2017.11.09 17:3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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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지난 10월 초 흥미로운 사극 영화가 한편 개봉했다. 영화 <남한산성>이다. 이 영화는 개봉 당일 4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오픈 스코어 신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이튿날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각종 구간 최단기간 최다관객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 지난 10월 3일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영화는 1636년 병자호란을 모티브로 인조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된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청나라와의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굴욕적 항복을 맞는 47일 과정을 별다른 각색 없이 담담히 풀어낸다.

영화는 조선이라는 힘없는 나라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애써 포장할 거리를 찾아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거나 환상을 덧입히지 않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가 실제로는 일본 귀족의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 가문을 항일 열사인양 둔갑시켰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이 점에서 몇몇 관객들은 “대체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며 불편함을 호소한다.  조선이라는 약소국의 무능력한 실상을 발가벗긴 것처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조선을 아름다운 유교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던 600년 역사라 믿고 싶은 이들은 이 영화가 한없이 불편하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관객들은 부끄러운 역사가 현 시대에 던져주는 의미를 찾는다. 이처럼 관객들의 상반된 평가를 바라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다.

조선, 왕을 위해 백성이 존재하는 나라

영화는 병자호란을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국왕, 사대부, 민초(民草)들의 모습을 면밀히 묘사한다. 조정이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에 고립된 폐쇄적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는 조선 사대부들의 멘탈리티를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동시에 조선의 국가 정체성은 임금을 위해 백성이 존재하는 나라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임금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국가 최우선 순위였고, 그것이 나라와 백성을 해칠지라도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빠져 현실이 아닌 명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쓰러져가는 명나라일지라도 부모로 섬기는 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청나라를 새로이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운명과 백성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중 유일하게 현실론을 들고 나온 사람이 있다. 청나라와 화친을 맺을 것을 권면한 이조판서(현재의 행정안전부 장관에 해당) 최명길(이병헌)이다. 그는 남한산성 안에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본인이 목숨을 걸고 청나라의 진영에 들어가 설득할 것을 자처한다.

그는 수차례 청나라 진영을 들락거리며 청의 요구 사항을 조정에 전달한다. 최명길은 생존을 위해서는 청나라와의 화친이 불가피하며, “삶이 없는 대의명분은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조정에서는 난리가 난다. 최명길과 대립각을 세우는 예조판서(현재의 오늘날의 교육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해당) 김상헌(김윤석)은 대의를 버리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물론 충신이지만,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있는 조선 사대부의 한계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그 외의 신하들은 최명길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명분만 앞세운 현실성 없는 대안들만을 꺼낸다. 이를테면 “죽을 각오로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우유부단한 인조는 수락한다. 덕분에 백성들은 동상을 입은 채 마땅한 무기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리고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는 청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스러진다.

인조의 조선은 수많은 백성들을 희생시키고, 청나라의 심기를 한껏 건드리고 나서 최후의 벼랑 끝에서 가장 처참한 굴욕을 맞이하며 항복한다. 그 와중에도 역사의 죄인으로 남는 것이 두려워 아무도 항복문서를 쓰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결국 붓을 들어 항복문서를 쓰는 이는 역시 최명길이다. 사대부들로부터 온갖 질타를 받으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던 최명길은 온갖 음해와 모함을 당했을지언정 결국 임금과 나라, 백성들의 운명을 구한다. 그리고 역사 앞에 역적으로 남는다.

이완용과 을사조약

한 인물이 훗날 역사의 역적으로 기록되고 국가와 백성을 지켜내는 일은 병자호란 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종말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최명길은 오랜 세월이 흘러 재평가를 받지만, 조선의 마지막 순간에서 모든 멍에를 뒤집어쓴 인물은 여전히 죽어서도 모진 고통을 받고 있다.

바로 자타공인 친일파 1순위로 꼽히는 이완용이다.
한국인들은 이완용의 이름만 들어도 욕지거리부터 내뱉는다.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친일파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완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하려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이완용을 을사조약을 앞장서서 체결하고, 그 대가로 남은 생애를 호화롭게 누린 사람으로 치부할 뿐이다.

사실 이완용은 조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서른 살의 나이로 주미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미국 공사관에서 수년간 근무하며 서양의 선진 문물을 경험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에는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변화를 모색했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어 회장까지 역임했으며, 독립문 건립을 추진한 것은 물론 직접 현판까지 썼다. 그는 당대의 명필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대한제국의 학부대신(현재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을 역임하며 근대 교육개혁을 주도한 이도 이완용이다. 그는 소학교령을 제정하여 근대적 시스템의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개정했다.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를 한 이가 이완용인 셈이다.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은 병자호란의 근대판 복사본에 불과했다. 고종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갈팡질팡할 뿐 황제로서의 국가 수호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외세에 대한 항전의 의지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전략적 외교를 펼치지도 못했다. 결국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승인받고, 이토 히로부미가 찾아와 외교권을 요구할 때도 고종은 속수무책으로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을사조약은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면담 과정에서 사실상의 승인이 이뤄졌다. 다만 그 멍에를 짊어진 이가 이완용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신들이었을 뿐이다. 이완용은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국제사회의 질서를 꿰뚫고 있었고, 만국공법이라는 국제법 서적을 통해 열강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더 심한 출혈과 불이익을 겪은 후 무력화 된 상황에서 강제적인 순응을 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판 삼전도의 굴욕을 피하고 출혈을 최소화하면서 조선 황실을 보존하고 백성들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통감의 권한을 불분명하게 명시한 초안을 뒤집고 초안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한다는 수정안을 이끌어냈다.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한다’는 마지막 조항도 이완용에 의해 삽입되었다.

출세는 꿈꿀 수도 없던 조선 백성의 삶

그는 상처뿐인 출혈을 막고 나라와 백성들을 살리는 결정을 했을 뿐 아니라, 고종 일가와 후손들이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리며 존엄을 지킬 수 있게 사수한 충신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고종 황실의 일가와 후손들은 1945년 일본의 패망 전까지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반면 이완용은 고종을 대신하여 천인공노할 매국노로 역사에 남았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죽을 때까지 평생 신변의 위협을 받았고, 조약 체결 당시 함께 있던 네 명의 대신들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는 이름으로 역사교과서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병자호란 당시 민초들의 삶을 살펴보자. 조선의 천민과 노비의 삶은 대장장이 서날쇠(고수)와 청나라 군대의 조선어 통역관 정명수(조우진)를 통해 적나라한 실상이 드러난다.

서날쇠의 삶은 조선의 평범한 천민 계급들의 처지를 투영한다. 영화 속 서날쇠는 가상 인물이지만, 서흔남이라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다. 서날쇠의 역할과 정신세계는 결코 왜곡이 아닌 조선의 현실 그 자체다.

서날쇠는 평범한 대장장이로 정묘호란 때 오랑캐들에게 처자식을 잃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임금과 조정이 들어오자 병력으로 강제 징집된다. 그는 천민이지만 똑똑한 사람이다.

추위에 떠는 병사들의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 가마니를 나눠줄 것을 건의하는가 하면, 상태가 엉망인 총기를 직접 수리할 것을 자처하여 전투력 강화에도 기여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도 운이 좋아 예조판서에 귀에 들어가 의견이 반영되었을 뿐이지 미천한 신분인 그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전혀 없다.

그는 남한산성이 겹겹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지방에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왕의 격서를 전달하는 전령 역할까지 한다. 벼슬아치들은 목숨을 잃을 확률이 십중팔구이기 때문에 천민인 그가 길눈이 밝다는 이유로 떠넘긴다. 천민인 그는 목숨 걸고 남한산성을 나서 격서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청나라 군대가 아닌 조선 군대다. 패배가 명약관화한 싸움에 지원하지 않기 위해 그를 죽이고 왕의 격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영화 속 서날쇠가 남기는 강력한 대사 한 마디는 다음과 같다.
“명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든,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전 다만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둬 겨울에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옵니다.”

이것이 조선 시대 천민들의 삶의 태도 그 자체였다.
다음으로 청나라 군대의 조선어 통역관 정명수는 조선 노비 출신이다. 청나라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영상대감은 정명수를 보고 조선 사람 출신이 그래도 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그는 정색하며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오. 더는 내게 조선 사람이라 하지 마시오”라고 답한다.

영화는 “국가를 위해 헌신해도 출세의 길이 보장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조선의 천민과 노비가 다른 나라의 벼슬아치가 되어 조선을 위협한다 해서 과연 그를 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은 조선 신분제의 현실 그 자체였다. 천민과 노비는 출세를 꿈꿀 수도 없었고, 조선의 국운이 좌지우지되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조선 백성들에겐 명나라를 모시건, 청나라를 모시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악(惡)의 사슬을 끊은 박정희

우리나라의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다.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시대의 신분이 어떠했든 간에 모두 평등한 일본제국의 2등 국민이었다. 기존의 신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아 군인이나 교사 등의 길을 간다면 출세가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박정희는 운 좋게(?) 일제시대에 태어났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농촌 빈민의 아들이 출세는 꿈도 못 꿨을 테지만, 그는 사나이의 기개를 품고 출세를 갈망했고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교사가 되었고, 만주와 일본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조국의 모습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금 과거로 회귀했다. 법적으로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그 잔재는 뿌리가 깊게 박혀 일제가 막을 내린 후 다시 관습적으로 재생되었다.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더 강한 관습적인 신분제가 유지되었다.

4·19로 탄생한 민주당 정부는 대의명분에 빠져 무능의 끝을 달리던 조선의 조정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민주당 정부가 보여준 작태는 이제는 성리학 대신 민주주의로 노선을 옮겨갔을 뿐 명분에 빠져 진퇴양난을 자처하는 조선 사대부들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이때 박정희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구원할 ‘역적’이 되기를 자처하며 등장한다. 박정희의 운명은 사실상 5·16과 동시에 정해져 있었다. 소위 말하는 사(士)의 DNA를 물려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쿠데타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에서 만주군을 해먹은 군인 따위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현실은 양반 사대부들의 인식체계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것은 그저 현상일 뿐, 무혈 쿠데타일지라도 총과 대포를 앞세워 기존 질서를 허물어뜨린 것을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절대 신성시되는 ‘명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최명길과 이완용, 그리고 박정희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으로 남는 길을 택하고 대한민국을 전면 개조한다. 조선 역사를 지배하던 ‘퇴폐한 국민도의’를 바로잡고, 조선 사대부들이 만들어놓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를 허물어뜨린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출세하는 구조를 만들 뿐 아니라, 모든 이가 마음만 먹으면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사회 기반까지 만든다. 남아 있던 신분제의 관습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한반도의 역사가 다른 나라의 역사로 병합될 수차례 위기에서 우리 역사의 명맥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죄인들 덕분에 이어졌다. 최명길이 없었다면 비참했던 삼전도의 굴욕도 없었고, 조선의 역사도 종식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비참하게 주권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지금의 부강한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더 분명하다.

박정희가 아닌 그 누구라도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말은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지 안다. 단지 여전히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조선 사대부의 대의와 명분적 사고에서 우러나는 반발심으로 진실을 아는 마음을 감출 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 선진국의 국민으로 호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매국노니 친일파니 하는 각종 수식어를 붙여 비난하는 최명길, 이완용, 그리고 박정희라는 역적들이 역적을 자처하면서 쌓은 결과다. 우리는 그들이 살려낸 나라에서, 그들을 욕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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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맨 2017-11-09 21:02:38
박정희가 역적을 자초하면서 쿠데타를 행했다는건 필자의 사견이 많은듯 하네요.
최명길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누리려하지 않은점, 마지막까지 목숨을 내어놓고 왕을 보필하고 국가의 위기를 헤쳐나가고자 하는 그의 삶이 박정희, 이완용이 거사후 호의호식하며 탐욕스런 삶을 살아간것과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에 대해 정확한 해석과 글을 부탁합니다.

djdjrd 2017-11-10 03:17:09
역시 나라와 민족을 팔아 먹는데는 늘 이유가 있다. 물런 잘 입고 잘 처먹을 려고 한건데
뒤에 가선 이렇쿵 저렇쿵. 그래서 그 뒤 박정희의 삶이 어떻던가? 그는 무엇을 했던가? 연애인 불러 술처먹다 지 가장 측근한테 총맞고 뒤진 .... 그의 딸은 무엇을 했는가? 어찌 최명길과 비교되는가? 나는 너의 생각이 침을 뱉고 싶다

뾰로롱 2021-04-21 22:28:34
글 너무 죠아요

ㅇㅇ 2017-11-11 20:31:29
아니 어떻게 이완용과 박대통령을 동렬에 놓고 평가를 하는가? 박대통령을 욕보이려고 쓴글인가? 그리고 이런글 실어주는 잡지는 또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