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진실했던 남자, 영화 <루터>
홀로 진실했던 남자, 영화 <루터>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승인 2017.11.13 17: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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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조금 들었다고 눈물샘이 약해져서일까?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흘렀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에게 들킬세라 휴지를 꺼내 닦았지만 눈물은 계속 흘렀다. 거대한 위선의 시대에, 홀로 진실을 외쳤던 사내의 고독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에릭 틸 감독의 영화 <루터>는 오래간만에 나를 울게 만든 영화였다.

몇 달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루터>라는 영화가 올 10월 개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독의 이름은 생소했지만 주인공 루터 역을 조셉 파인즈가 맡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이 영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간 지 10년이지만, 아직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고 내세우지는 못하고 있는 ‘초보 신자’다. 루터에 대한 관심은 순전히 ‘역사적’인 이유에서였다.

다 아는 얘기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자정(自淨)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결국은 신앙의 자유를 넘어 정치·사회적 자유, 경제적 자유를 쟁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이 ‘근대의 탄생’을 이끈 것이다. ‘그 거대한 사업을 이뤄낸 사나이 루터의 모습을 어떻게 영화화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마침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 거기에 얼마 전 제임스 레스턴의 <루터의 밧모섬(원제 Luther's Fortress)>을 읽었던 기억도 새로웠다.

고난의 수도사

영화는 젊은 루터가 폭풍우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루터는 성(聖) 안나를 찾으면서 자신을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그 맹세대로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修士)가 된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등을 돌리면서까지 선택한 길이지만, 루터의 수도사로서의 삶은 위태위태하다. 수시로 악마와 만나면서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함을 자책한다. 그런 루터에게 버팀목이 되는 건 그의 지도신부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다. 그는 루터에게 묻는다.
“루터, 자네가 찾는 게 무엇이지?”

루터는 말한다.
“긍휼의 하나님, 제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요!”
이때 이미 루터에게는 반란의 싹이 나타났던 셈이다. 인간을 영원한 지옥불 속에, 그게 아니더라도 수백 수천 년 동안 죄값을 해야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연옥으로 던져 버리는 ‘심판의 하나님’을 루터는 거부한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심을 고취할 생각으로 그를 로마로 보낸다. 하지만 루터는 로마에서 타락과 부패를 본다. 가난한 민초들, 매춘부를 구하는 성직자들, 성물 숭배….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져 돌아온 루터는 스승 슈타우피츠에게 말한다.
“로마는 문란했어요. 시궁창이었어요. 여자든, 구원이든,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더군요.”

슈타우비츠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대학으로 보낸다. 신학 박사 학위를 딴 루터는 소외받은 민중들을 보살피고, 재치 있는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인기 교수가 된다.

그 무렵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피에트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한다. 루터가 말했던 ‘구원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의 집약체가 바로 면죄부였다. 면죄부의 독일 판매책이던 도미니코수도회의 수도사 요한 텔칙은 지옥불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외친다.
“봉헌함에 금화가 딸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구원된 영혼은 천국으로 곧장 올라간다.”

장애가 있는 딸을 어렵게 키우던 가난한 어머니도 면죄부를 산다. 그리고 평소 따르던 루터에게 면죄부를 샀다고 자랑한다. 루터의 칭찬을 기대하면서…. 루터는 그녀에게 말한다.
“그건 종이쪽일 뿐”이라고, “그걸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분노한 루터는 비텐베르크교회 문에 대자보를 못질한다. ‘95개조의 반박문’이라는 이 대자보에서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의 대자보는 활판인쇄술에 힘입어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전파된다. 교황은 중세인들의 삶은 물론 내세까지도 지배하던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교황에게 도전했으니, 이후 루터의 삶이 편할 리가 없다.

홀로 선 용기

“우리는 당신 편이다. 힘내라”고 격려하는 동료 교수와 시민들에게 고마워하는 루터의 모습을 보는 대목에서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말 한 마디에 고마워하는 그 모습에서 그 속에 담긴 고독감과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위선의 시대에 홀로 맞선 사내의 고독감, 두려움….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았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불의가 정의가 되고, 반역이 애국이 되는 탁류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교황의 사절 앞에서 당당하게 이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스승 슈타우피츠가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밖으로 루터를 밀어내며 “나는 더 이상 너의 지도신부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망연자실해 하는 루터의 모습을 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면서 “주여,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계속 눈물이 났다.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너는 저렇게 당당할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루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스승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수도원 밖으로 쫓아내면서 “나는 더 이상 너의 지도신부가 아니다”고 했지만, 곧이어 “계속 영적 신부로서 네 곁에 있겠다”고 약속한다. 보름스 국회에 도착한 루터에게 민중들은 “마르틴 신부님, 힘내세요!”라고 격려한다.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도 루터의 지지자이다. 그는 보름스 국회가 끝난 후,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부르크성에서 보호한다. 교황과 카를 5세, 민중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도 루터를 지켜내는 이 늙은 대공은 유머러스하면서 단호하고 현명한 리더다. 카를 5세나 교황청 사절을 어르고 달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할 때, 이 늙은 귀족의 눈꼬리에는 장난기가 감돈다.

그 표정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아니, 저 배우가 낯익은 얼굴이다. 맙소사! 영국의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였다. 어린 시절 해마다 성탄절 특집 때면 단골로 방영되었던 머빈 르로이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 역으로 나왔던 바로 그 배우! 1951년작 <쿼바디스>에서 기독교도들을 탄압했던 얼치기 예술가 황제로 나왔던 사람이 반세기도 더 지나 <루터>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옹호자로 나오다니! 반백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여전히 무대 위에 선 대배우의 연기에 고개가 숙여졌다. 피터 유스티노프는 이 영화가 개봉된 다음해인 2004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루터의 바르트부르성 시절을 다룬 제임스 레스턴의 <루터의 밧모섬>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1년은 루터에게는 가장 엄혹한 시절이었다. 이 곳에서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루터는 묻는다.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반역인가? 모든 국민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실 그건 ‘반역’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던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에 대한 반역. 루터가 번역한 성경을 받으며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말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로마와는 영영 결별하는 걸세.”

바르트부르크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라는 자신의 교의도 다듬는다. 독일어 성서를 통해, ‘오직 믿음’이라는 신조를 통해 인간은 신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근대의 ‘자유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루터의 도전에 고무된 민중들은 영적인 혁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기성의 정치·경제·사회 질서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루터의 동료 교수이자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를슈타인은 민중혁명을 주창하고, 그에게 고무된 민중들은 비텐베르크를 뒤집어 엎는다. 이 소식을 듣고 비텐베르크로 달려온 루터는 카를슈타트와 민중들을 질책하면서 자신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영적·정신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혁명과 반란의 불길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농민전쟁은 모든 걸 불살라 버린다.

루터가 긍휼히 여겼던 가난한 모녀까지도 모두….
그래도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카를 5세는 뒤늦게 프로테스탄트 탄압에 나서지만, 제후들은 “신앙을 배신하느니 내 목을 베라”고 나선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제후들이 하나 둘 카를 5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목을 내미는 장면은 감동이다. 결국 카를 5세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서를 인정한다. 루터가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와 함께 푸른 풀밭에서 이 소식을 들으며 감격에 겨워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물론 실제의 역사는 영화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농민전쟁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 파멸적이었다. 루터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주장한 것은 옳은 얘기였지만, 한때의 ‘혁명아’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듣기 불편할 정도로 기득권 세력에게 편향적이었다.

루터의 자기 확신은 때때로 독선으로 치달았고, 에라스무스 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들을 힘들게 했다. 루터 이후 종교의 자유가 쉽게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었다. 독일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벌어진 3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다. 영화는 이런 문제들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물론 이런 걸 한정된 시간 내에 다 담아내는 게 무리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종교를 떠나서,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고, 그 결과 세상을, 아니 역사를 바꾼 사내의 이야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 조지 오웰은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 행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루터는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했다. 그것은 ‘혁명적 행위’였다.

지금 우리는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루터>에 더 절실하게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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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stlf 2017-11-14 01:12:19
과학과 종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을 신비주의적으로 설명해서 인류를 혼동에 빠지게 만든다.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복잡한 개념이나 어려운 수학을 동원하면 그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우주의 원리는 단순하고 명쾌해야 우주만물이 혼동에 빠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과학자들도 이 책에 반론을 못한다. 이 책을 보면 독자의 관점 지식 가치관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