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까지는 성공했으나 재상으로는 실패한 김종서
판서까지는 성공했으나 재상으로는 실패한 김종서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1.1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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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는 1383년(고려우왕9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종서는 얼마 후 한양으로 올라와 서대문밖에서 살았고 태종5년 문과에 급제했다. 23세 때였다. 문과 급제 후에도 하위직을 맴돌던 종서는 10년 후인 태종15년 상서원 직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상서원(尙瑞院)이란 국왕의 옥새와 인장 등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도승지의 지휘 하에 종5품 판관 1명, 종7품 직장(直長)1명, 정8품 부직장 2명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종서가 처음으로 정7품직에 오른 것이다.

세종은 세종11년(1429년) 9월 30일 정3품인 우부대언(-훗날의 우부승지)으로 외직에 나가 있던 종서를 불러들인다. 여기서 종서는 훗날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되는 좌부대언 황보인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종서를 정3품 당상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다음해 7월 좌부대언으로, 12월에는 우대언으로 승진한다. 이 때 황보인도 승정원 최고위직인 지신사에 오른다. 이 때 종서의 나이 47세였다.

세종15년(1433년) 12월 종서는 함길도(함경도) 관찰사로 제수 받았다. 종서는 22개월 전인 세종14년 2월 25일 세종이 좌대언인 자신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면서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보거든 쏴라”고 했던 말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또 그해 6월에는 “경은 최윤덕을 아는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세종의 북방 개척 구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세종14년 들어 문신 김종서와 무신 최윤덕을 투톱으로 해서 자신의 구상을 실현키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윤덕은 세종15년 1월 이미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 동안 종서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6년 이상을 지금의 함경북도(6진) 개척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1440년(세종22년) 12월 3일 형조판서에 오른다.

병조좌랑에 이어 두 번째로 같은 해에 같은 직위를 맡는 우연이 겹친 것이다. 종서는 1441년(세종23년) 11월 14일 예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장장 5년 동안 재위하면서 국가의 중대 길흉사를 무리 없이 처리해 세종의 더없는 총애를 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쓴 문집에 황희와 김종서의 일화가 실려 있다. 황희가 김종서를 힐난(詰難)했다는 내용이다. 한번은 공조판서 김종서가 공조의 물건으로 정승 황희를 접대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황희는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며 “국가에서 종친과 정승의 대접을 담당하는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 바로 옆에 설치한 까닭은 정승을 대접하기 위함이다. 만일 나를 접대하려면 예빈시에서 장만해오면 될 것이지 어찌하여 공조의 물건을 사사로이 쓴단 말인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후 김종서가 병조와 호조판서가 되었을 때도 김종서의 잘못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 바람에 황희가 김종서를 유난히 미워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오죽 했으면 맹사성까지 나서 “종서는 당대의 명 판서이거늘 어찌 그리 허물을 잡으십니까”라고 따졌다고 한다. 

그러자 황희는 “내가 종서를 아끼는 까닭에 인물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오. 종서는 성격이 굳세고 기운이 날래 일을 과감하게 하기 때문에 뒷날 정승이 되면 신중함을 잃어 일을 허물어뜨릴까 염려해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를 미워하여 곤란케 하려는 것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결국 뒷날의 역사는 황희의 걱정대로 흘러가게 된다.

맹사성의 말대로 종서는 판서로는 분명 뛰어났다. 그러나 황희의 걱정대로 정승감으로는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우선 김종서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조선의 문종, 단종은 분명 치세라고 하기에는 곤란했다.

난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문종으로부터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南智)와 함께 우의정으로서 어린 단종을 책임져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대신이었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증자(曾子)는 “육척 고아를 맡길 만하면 군자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의 단종이 말 그대로 육척 고아였다. 어머니도 없어 대비의 수렴청정도 할 수 없었다.

이 때 증자의 말 뜻은 두 가지다. 대신으로서 권력을 가졌다 하여 임금의 권한을 넘어서도 안 되고 동시에 어린 임금이 자라 친정(親政)할 때까지 잘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김종서를 비판하는 척도 또한 바로 이 두 가지다.

▲ 왕이 되고자 했던 수양대군으로부터 무참히 살해당하는 김종서의 이야기를 다룬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좌로부터 첫 번째, 김종서 역을 맡은 이순재)

권력 남용과 정치적 무능

드디어 좌의정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김종서는 어린 임금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언관들이 간언을 하면 “대신을 모해했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사전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황표정사(黃票政事)다. 황표정사란 이조에서 새로운 관리를 뽑을 때 후보자들의 이름을 적어 올리면 김종서, 황보인 등이 이를 먼저 보고서 미리 낙점할 사람의 이름 옆에 노란 점을 찍으면 어린 임금은 그대로 결재하는 것을 말한다.

권력의 한계를 지킬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단종을 지켜내지 못한 그의 무능(無能)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과연 왕족인 수양대군을 먼저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단종과 수양대군 중에 충성의 대상을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물론 가만히 있는 수양대군을 제거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계유정란이 일어나기 이미 한 달 전부터 관련된 소문은 파다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단종을 위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고명을 받은 신하의 도리다.

이 점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아들 여(戾)태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무제는 지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시 승상 유굴리(劉屈&#27650;)가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하여 무제가 급히 장안으로 돌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려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한서(漢書)> 유굴리전이다.

이 때 상은 더위를 피해 감천궁에 있었고 승상의 장사가 급히 역마로 달려와 이를 상에게 보고했다. 상이 “승상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는 “승상은 이를 비밀로 하고 아직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상은 화를 내며 말했다.

“일이 이처럼 소란스러운데 무엇을 비밀로 한다는 말인가? 승상에게는 주공(周公)의 풍모가 없다. 주공은 (형제인) 관숙과 채숙을 주살하지 않았던가?”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명을 받아 무왕의 아들 성왕을 보호했고 그 때 형제인 관숙과 채숙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를 보호하기 위해 동생들을 주살했다. 그 후에 주공은 권력을 다 자란 성왕에게 되돌려줬고 성왕은 명군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김종서는 두 가지 면에서 다 재상의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조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를 미화만 해온 기존의 풀이는 사안의 본질을 놓친 해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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